북한 인권에 침묵하는 新‘괴벨스’들

2005년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황우석교수의 줄기세포 조작사건으로 사회의 다른 모든 문제들이 세모(歲暮)의 어둠 속에 갇힌 듯 보이지를 않는다. 비록 국민 전체에 심각한 충격과 실망을 주었지만, 줄기세포 조작사건의 본질은 학자의 양심과 관련된 것이며, 줄기세포 연구가 가져다 주리라는 수십 조의 막대한 경제적 부가가치란 냉정하게 볼 때 그 실현가능성이 아직 전혀 확증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체적 손실이라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황교수 사건의 영향은 사회전체를 볼 때 제한적이며 또 앞으로도 그렇게 진행될 것이다.

다른 한편 북한의 핵보유선언, 강정구의 통일전쟁론에 대한 논쟁, 유엔총회의 북한인권결의안 채택과 한국정부의 기권, 북한인권국제대회에 대한 한국정부, 열린우리당, 친정부 시민단체 및 지식인들의 노골적인 비토, 6자회담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점점 그 해결가능성이 희박해지는 북핵문제, 김대중의 남북연방제 실천론 및 정동영의 통일헌법개정론 등은 한반도 내에서 두 개의 지각이 부딪혀 점차 그 파괴적 장력이 축적되어 가는 과정, 혹은 내년과 내후년에 있을 한반도 전체의 지각변동을 알리는 지진계의 진동으로 보인다.

“北 어려움은 외세 탓” = 모든 파시즘정권의 전형적 궤변

사람들은 남북의 문제에 대하여는 늘 좌와 우, 진보와 보수의 이념대립을 말하곤 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20세기 최고의 철학자 중의 한명인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한 단어의 의미는 그 단어의 사용”이라고 한다. 이른바 언어철학에서 ‘화용론(話用論)적인 전환(pragmatische Wende)’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마찬가지로 이념 역시 명문화된 가치체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성종교와 사이비종교와의 차이가 그 내적 신앙체계보다는 한 종교의 사회에 대한 기여의 유무, 정도에 있듯이, 한 이념에 대한 평가는 무엇보다도 그 이념이 사용되고 구체화된 사회의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북한의 실상 자체는 이미 북한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이념, 이른바 수령절대주의가 파탄상황에 빠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300만 명 이상의 북한인민을 굶어 죽이고 수십만을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의 길로 몰아가는 정권이 주장하는 이념을 도대체 ‘이념’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 봉건세습파시즘을 옹호하는 남과 북의 세력들은 결코 이 이념의 파탄 상황 혹은 국가폭력의 정체를 외세, 정확히는 ‘미국과 대한민국의 수구보수세력의 압력’으로 돌리며, 북한의 인권 문제 역시 외세에 대한 저항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국가 및 인민 전체의 생존권 문제로 돌린다.

놀랍게도 이런 주장이 김정일 정권의 관영매체뿐 아니라 한국의 좌파정권과 정당, 그리고 시민단체,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더 놀라운 점은, 바로 이러한 변명이란 역사상 존재하는 모든 파시즘정권의 전형적인 궤변이라는 점이 전혀 안 알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파시즘에 대한 저항이 가장 확고하다는 좌파지식인 사회에서 말이다.

인간의 금기 넘어버린 한국의 親金세력

여기 하나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히틀러의 ‘386’, 나찌 독일의 선전상이던 괴벨스가 1943년 한 연설 ‘전쟁과 유태인’의 일부이다. 이 연설의 배경은 나찌가 유럽 전역에 세웠던 유태인 절멸수용소에 대한 참혹한 실상이 조금씩 외부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이를 변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유태인 문제를 인도적 관점에서 보곤 한다. 그런 이유로 이들은 명석하고 냉정한 이성의 통찰력이 아니라 순간적인 감정의 격앙에 의해 이 문제를 판단한다. 따라서 우리가 전쟁 중 유태인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약한 면을 보인다면,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 민족과 제국 그리고 유럽 전체를 극도의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한의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다만 전해 들었을 경우 정상적인 인간의 반응은 “믿을 수 없음”이며, 또 이런 참상이 탈북자들이 지어낸 허구가 아니라 확실한 사실이라는 점이 밝혀질 경우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 내 김정일 파시즘의 옹호자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이들은 마치 감정이란 없는 듯, 마치 모든 감정이란 이성의 통찰력에 비하면 열등한 반응인 듯, 혹은 이런 종류의 인간성의 절멸상태란 인류의 역사에서 매일 오고 가는 것인 양 냉정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이들 냉혈한(冷血漢)들을 볼 때 느끼는 견딜 수 없는 답답함이란 실은 이들이 인간본심의 가장 원초적인 반응방식을 넘었다는 점에 있다. 한국의 친김정일 세력들은 인간의 금기(taboo)를 넘은 것이다. 그러나 이 정상적 금기를 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그 어떤 ‘더 큰 가치’를 날조하는 수밖에 없고, 여기서 모든 파시스트의 방식은 동일하다 : 그 어떤 악의 무리가 세계제패를 원하고 있으나 바로 우리 민족만이 사생결단 대항하자, 그 외세는 우리 민족을 압살하려고 한다.

“유태인세력이 이 전쟁을 원했다. 우리가 적들을 한번 살펴본다면, 그것은 부자들의 국가들이든(미국, 영국) 아니면 볼셰비키 국가든 전쟁수행의 배후에는 반드시 유태인 전쟁광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적의 전시경제를 조직하고 3국동맹을 파괴시키기 위한 절멸계획을 세우고, 미국과 영국에서는 입에 피거품을 물며 복수심에 불탄 정치적 선동꾼, 망나니들을 끌어 모았으며, 볼셰비키 소련에서는 테러조직인 비밀경찰을 동원했다. (……) 이들은 우리 국가사회주의 제국(히틀러의 제3제국)에서 자신들의 세계지배의 야욕에 군사적으로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대항할 수 있는 힘을 본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들의 분노와 뿌리 깊은 증오가 놓여 있다.”

확신과 열정, 행동력 갖춘 소인배들의 위험성

아마도 연설의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괴벨스 자신이 자신의 궤변의 논리정연함에 스스로 감탄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유태인 절멸수용소의 존재를 도덕적, 논리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영토 내에서 이러한 위험에 우리 민족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국가안전상의 지상명령인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여기저기에서 실로 어려운 결정을 내릴 필요가 있을 경우도 있으나, 당면한 위험에 비추어 볼 때 실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생명과 자유, 인간의 존엄을 위협한 이들에게는 어떤 자비심도 있을 수 없다. 동정심이란 이 악마 같은 종족들로부터 증오와 절멸의 위협에 아무런 대책 없이 노출된 우리 민족과 다른 유럽의 민족들에 대해서나 가질 수 있다.”

절멸수용소라는 惡으로부터 인류의 구원자라는 善을 도출하는 길이란 괴벨스식의 “냉철한 이성의 통찰력”에 비추어 볼 때 이처럼 짧은 것이다. 필자는 현정권, 여당, 국가인권위원회, 친여시민단체 및 지식인들의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저 비열한 태도의 근간에는 괴벨스류의 확고한 신념, 그리고 열정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 비난의 한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방편책에 불과하다면 저렇게 집요하고 반복적으로, 그리고 그렇게 당당하고 당돌하게 북한의 강제수용소의 참상을 180도 돌려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강정구가 북한인민의 인권을 생존권과 시민적 자유로 나누고 미제의 전쟁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후자를 희생하더라도 전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 개별적 자유보다는 총체적 생존권이 우선권을 갖는다는 주장 역시 괴벨스적 전통의 한 사례일 뿐이다.

괴벨스는 사족으로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즉 반유태주의에 동조하는 세력들이 점차 늘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아마도 북한의 관영매체에 접해본 사람이라면 결코 낯선 내용이 아닐 것이다.

“모든 적국에서 점차 반유태주의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들이 들려오고 있다.”

솔직히 괴벨스의 이 연설은 그의 다른 모든 연설이 그렇듯 한편의 코메디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코메디가 심각한 문제인 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듯 이런 종류의 소인배들이 참극을 불러일으킨다는 데에 있다. 확신과 열정에 찬, 그리고 행동력이 있는 소인배들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가해자 편에 섰던 자들을 역사는 기억할 것”

나찌 치하로부터 탈출한 독일출신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 Arendt)는 강제수용소를 “절대악(absolute evil)”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강제수용소는 단순한, 즉 상대적으로 그 어떤 이유를 부칠 수 있는 악이 아니라 ‘인간성(humanity)’, ‘인간의 위치 자체(human status)’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이다. 강제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단순한 유기체, 움직이는 형해(形骸)에 불과하며, 삶과 죽음의 영역 모두에서 버림받은 자, 죽어도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순교조차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영역에 있다. 미래의 어느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또 기억할 수도 없는 쓰레기로 치부되는 영역, 또 그 체험을 결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인간은 인간일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강제수용소의 존재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실로 말할 수 없는 착잡한 상황을 만들고 있다. 왜냐하면 김정일 파시즘에 대한 옹호와 변명은 궁극적으로는 대한민국내의 몇몇 세력의 책임으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대한민국이 유태인 절멸수용소를 세운 히틀러 파시즘을 옹호하였다면 후대에 어떤 문제가 일어날런지. 어느 누가 ‘후대에 태어난 행운’을 말할 수 있겠는가? 김정일 파시즘에 대한 옹호와 침묵으로 우리 대한민국은 ‘이미’ 절대악을 행사한 역사의 가해자의 편에 섰다. 그리고 역사의 기억은 길게 지속될 것이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철학박사)

홍성기(洪聖基)
-서울출생(1956)
-경기고, 서울대 독문과 졸업
-뮌헨대 철학석사
-자르브뤼켄대 철학박사(논리학, 동서비교철학)
-아주대 특임교수(현)
-주요논문 : <용수의 연기설><괴델의 불완정성 정리 비판>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