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어제와 오늘] 김정일 사망-김정은 시대 개막의 ‘막전막후’

독재자가 사망하면 어떤 신비한 느낌이 든다. 신처럼 절대적인 권위가 있어 보였지만 결국 그도 인간에 불과했다는 진실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2011년 북한의 두번째 통치자였던 김정일이 사망했다. 이 칼럼은 그의 마지막 12월을 살펴볼 목적으로 작성했다.

당시 사람들은 김정일이 곧 사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 북한 전문가는 ‘강철의 영장’은 몇 년 더 살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다가올 2012년 4월에 김일성 탄생 제100돌이었고, 김정일이 이 달에 어떤 큰 행사를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에 오히려 관심을 두곤 했다.

즉, ‘민족의 위대한 태양’은 담당해야 할 부분이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이 모든 예측들과 달리 2011년 12월 그는 사망하였다.

김정일에게 2011년 12월은 바쁜 달이었다. ‘어버이 장군님’은 국내 현지지도에 주력하면서 여러 인민군 부대에도 방문하였다. 당시에 노동신문을 비롯한 국가 매체를 보면 김정일의 마지막 프로젝트인 컴퓨터수치제어에 대한 언급들이 많았다. 북한 매체에 이 기술의 영어 약칭 CNC를 자주 볼 수도 있었다.

사상적인 구호 중의 제일 자주 언급한 단어는 아마도 ‘강성대국’이었을 것이다. 당시 북한 당국은 2012년 북한이 곧 강성대국의 문을 열 것이라고 약속했다. 물론, 북한 경제의 상황을 보면 믿기 힘든 허황된 구호에 불과했다.

북한의 대남 정책을 보면 당시 제일 중요하는 주제는 북한인권법이었다. 이 법은 나중에 2016년에야 통과되었지만, 당시 북한 당국은 이 법안 통과에 대한 반대 캠페인을 내세웠다. 이 점도 별로 예외적인 일은 아니었다.

12월 15일 조선중앙통신은 ‘위대한 장군님’의 마지막 현지 지도에 대해 보도하였다.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 김정일은 광복 백화점을 찾았다. 보통 북한 매체가 김정일의 행위에 대해 늦게 보도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정일은 이 백화점을 12일 혹은 13일에 찾았을 것이다.

김정일 생존 시에 그의 마지막 공개 사진. 오른쪽에 김정은과 장성택이 보인다. / 출처= 노동신문

2011년 12월 북한 매체는 김정일 행위에 대해 추가 보도를 하였다. 특히 북한 매체는 16일 21시 13분에 김정일이 평양 시민들에게 청어와 명태를 공급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고 보도하였다.

문건을 서명한 다음 날 아침에 김정일은 사망하였다.

북한의 공식 보도에 따르면, 김정일은 2011년 12월 17일 아침 8시 30분 현지지도 길에서 사망하였다. 북한 당국의 역사 왜곡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북한 건국 날짜를 9월 9일, 당 창건 기념일을 10월 10일로 정했다. 이 왜곡은 심미적 목적에 따른 것인데, 다만 ‘8시 30분’은 믿을 만한 시간으로 보인다. 일단 사회주의권 국가의 경험을 보면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소련 당국도 그의 사망 날짜와 시간을 그대로 보도하였다.

아침 8시30분. 이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경비원들은 김정일을 17일 아침 위독 상태 또는 이미 사망한 후 발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김정일은 어디서 사망했을까? 북한 매체는 ‘현지지도 길에서’ 사망했다고 했다. 비행 공포가 있었던 김정일은 현지지도에 갈 때 일반적으로 전용 열차를 이용했다. 물론, 한국 국가정보원은 이 열차를 위성으로부터 늘 관찰했고, 국정원에 따르면 김정일 사망 시에 이 열차는 평양 북쪽에서 위치한 룡성역에 있었다. 룡성역은 김정일 전용 정류장이 있었고, 이는 위성 사진(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다.

룡성역 특별 정류장. / 사진= Google Earth

문제는 김정일 사망 전후 이 열차는 움직이지 않았고, 룡성역에 있었다. 때문에 애초에 김정일이 열차를 타지 않았거나 사망 시에 열차 안에 없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김정일 사망에 대한 또 하나의 주장은 존재한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김정일의 사망은 자강도 희천시에 위치한 발전소와 관계가 있었다.

이 발전소는 수력 발전소였고, 독자들은 잘 알다시피 수력 발전소의 핵심 부분은 댐이다. 희천 댐은 2009년부터 건설돼 왔고, 김정일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높았다. 김정일은 이 댐을 2009년에 2번, 2010년에 4번, 2011년에 2번에 찾았다. 그러나 조선일보의 출처에 따르면 2011년 12월 김정일은 댐에 누수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어버이 장군님’은 매우 분노해서 ‘빨리 수리하라’고 했고 즉시 현장에 출발하려고 했다. 이 분노는 김정일 사망의 원인이 됐다는 보도다.

아래에 위성 사진을 보면 희천 댐은 김정일 사망 몇 달 후인 2012년 3월 완성되었다.

이 스토리의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현재 2020년 기준으로 북한은 아직 김정일의 사망 위치를 공포하지 않았다. 아마도 앞으로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경애하는 최고사령관 동지’의 심장이 멈추었던 순간부터 공식 발표까지 이틀 3시간 30분. 이 시간은 김정은 통치 시대에 가장 어려울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대내외 발표 때까지 그는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확인을 받지 못 했다.

김정일의 사망 기준으로 보면, 2009년 1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거의 2년동안 북한 내에 김정은 후계 캠페인은 벌어졌다. 특히, 최근에 유출된 북한 제3군단의 기밀 자료를 보면, 북한 당국은 ‘청년 대장 동지’를 명확하게 2인자로 보여주었고, 일부 지방에서는 ‘대장복(大將福)’이라는 구호까지 등장하였다.

그러나 노동신문은 김정은을 후계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12월 17일 김정은은 당 중앙위 위원이었지만, 정치국 위원은 아니었다.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그는 다른 부위원장 리영호보다 군사 계급이 낮았다. 리영호는 차수였고, 김정은은 대장에 불과했다.

이 사실을 보면, 17일 북한 지도부는 김정은의 승계를 막을 수 있었다. 예컨대, 김일성 사망 시기처럼 3년의 애도 기간을 선포하고 3년동안 ‘어버이 장군님께서 제시하신 령도체계’를 바꾸지 말자고 결정을 내린 얼마 후 당 중앙위 위원 김정은 동무가 실수가 많아 후계자 자격을 상실했다고 조용히 결정할 수도 있었다.

아무튼, 12월 17일 김정일 사망부터 12월 19일 사망 보도가 나올 때까지 북한 지도부는 비상 모임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임에 누가 참가했을까?

12월 17일 기준으로 보면 북한 최고 지도 기관인 당 중앙위 정치국 상임위원회에 살아 있는 위원은 3명이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 내각 총리 최영림, 그리고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리영호 차수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정은은 아직 위원 자격이 없었다.

이 셋 사람 중 1~2명은 김정일의 사망에 대한 보고를 받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12월 18일 노동신문 보면, 17일 최영림 총리는 평안남도 숙천군에 있었다. 특히, 노동신문 전자 보전에 있는 칼라 사진을 보면 밖에 빛이 보인다. 즉, 18일 낮 최영림은 아직 숙천군에 있었다. 2011년 12월 17일 해돋이 시간은 아침 7시 49분이었고 김정일은 8시 30분에 사망했다. 때문에 최영림은 김정일의 사망에 대한 보고를 제시간으로 받지 못했다고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겠다.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이날에 최영림 북한 총리는 평양에 아니라 평안남도 숙천군에 있었다. / 사진=노동신문

김영남도 김정일 사망에 대해 제시간에 알지 못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래 볼 수 있는 것처럼, 17일에 그는 카타르의 부군주(副君主, 노동신문에서 ‘추장’이라고 호칭했음)에게 축전 전보를 보냈다.

2011년 12월 17일에 김영남이 보낸 전보. /사진=노동신문

2011년 카타르는 북한에 상당히 중요한 나라였다. 북한 노동자 수 천 명은 카타르에서 근무하였다. 그래서 이와 같은 형식적인 전보를 보낸 것으로 보인다. 전보에 대해 신경을 쓸 시간이 있었을 정도였다면 아마도 그는 김정일 사망에 대해 모르고 있지 않았을까.

이처럼 김영남, 최영림, 리영호 등 상무위원 중 최대 2명은 김정일의 사망에 대해 보고를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보고를 받은 자들은 어떤 결정을 내렸나? 나중에 벌어진 일들에서 추측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였다.

    • 김정일의 계승자는 역시 김정은이다. 김정은의 권위는 부친처럼 절대적일 것이다.
    • 김정일 국가장의위원회는 232명으로 구성될 것이다(참고로 1994년에 김일성 국가찬의위원회는 273명으로 구성되었다). 장의위원회위원장은 김정은, 제2위원 김영남, 제3위원 최영림, 제4위원 리영호일 것이다.
    • 12월 18일 밤 1시부터 국경경비대에 특별 경비 지시를 하달할 것이다.
    • 12월 19일 월요일 12시에 김정일 사망 보도가 나올 것이다.
    • 12월 19일 조선중앙통신은 보도를 15시가 아닌 아침 9시부터 시작할 것이다. 9시부터 12시까지 총 5차례에 걸쳐 12시에 특별 보도가 있을 것이라고 방송할 것이다.
    • 방송은 리춘희가 할 것이다. 이는 녹음으로 방송될 것이다.

필자의 추측이 맞다면 이 모임에 김정은과 리영호는 참가하였다. 이는 김정은이 추후 리영호를 상무위원회에서 내렸고 결국 제거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김정일의 사망이 공포될 시간은 다가왔다. 2011년 12월 19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의 생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1941년생 이 대통령은 70세였다.

북한 지도부는 비밀을 잘 지켰던 것으로 보였다. 극소수에 제외하면 누구도 김정일이 사망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이날 오전 한국 매체의 보도를 보면 놀라운 소식도 별로 없었다. 필리핀에서 대풍이 있었다고, 청와대 일꾼이 체포되었다고 수준이었다. 다만 재미있게도 북한에 관한 소식도 있었다.

미국과 북한은 우라늄농축을 중단과 함께 식량지원에 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또한 조선일보는 김정일의 광복백화점 방문에 대해 보도했고, 그가 중국식 개혁에 대한 관심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였다. 그리고 KBS은 라오스에서 있었던 탈북민에 대한 보도를 하였다.

특별방송 예고. / 사진=조선중앙TV 캡처

12월 19일에 조선중앙방송은 명령대로 9시에 방송을 시작했다. 이날의 오전 방송은 다음과 같았다:

    • 09:12 <조선기록영화>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 함경남도 여러 부문 사업을 현지에서 지도 – (주체100.10.3~17) – (2011.12.17 재방)
    • 09:58 혁명사적관은 혁명사상교양의 거점이라고 하시며
    • 10:00 특별방송 예고(시청자 여러분. 오늘 12시부터 특별방송이 있겠습니다. 거듭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12시부터 특별방송이 있겠습니다.)
    • 10:01 <소개편집물> 선군령장을 모셨던 못잊을 그날에
      조선인민군 장령이였던 후보원사 교수, 박사 김병무
    • 10:14 <음악소개편집물> 백승의 진리, 총대의 사명을 새겨주는 노래
      가요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하자」
    • 10:30 특별방송 예고
    • 10:39 <련속편집물> 력사에 길이 빛날 불멸의 대기념비들 – 백두의 기상 비낀 천출명장의 위인상(2) –
    • 11:00 특별방송 예고
    • 11:13 <련속참관기> 위인칭송의 보물고 – 국제친선전람관을 찾아서(257)
    • 11:20 특별방송 예고
    • 11:25 <소개편집물> 총대가정의 어버이 – 조선인민군 장령이였던 길금석가정
    • 11:40 특별방송 예고

위에 볼 수 있는 것처럼, 10시에 보도 프로그램은 없었다. 데일리NK에 따르면, 2011년 전 특별보도가 있었던 날은 2010년 9월에 있었다. 당시에 김정일은 다시 당 총비서로 추대되었다.

당시 통일부 대변인은 정례브리핑에서 특별방송의 성격에 대한 질문을 받아 ‘이제까지는 북측 내부적으로 특별하게 알릴 일이 있거나 국방위원장과 관련된 특별한 사실, 6자회담 내지는 북핵문제와 관련된 사실이 있을 때 간혹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역시 대한민국 통일부까지도 북한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알지 못했다.

기자들은 북미대화에 관련한 내용을 포함할 수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최 대변인은 ‘거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답변을 드리기 보다는 12시 발표를 지켜보는게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리고 평양 과학기술대학에서 대학교 지도부는 학생과 교원들에게 조용히 지내라고 지시했다. 필자는 이 사실을 당시 대학교에 있었던 강사로부터 알게 되었다. 설마 김일성종합대학보다 위신이 높은 이 대학교의 지도부는 김정일의 사망에 대한 알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래도 특별보도에 대한 소식을 들었던 그들은 제일 안전한 선택지를 뽑았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19일의 정오가 다가왔다. 그리고 17년의 김정일 시대의 종말이 다가왔다. 이 시대 조선중앙방송이 마지막으로 보도한 노래는 ‘당중앙을 목숨으로 사수하자’였다. ‘당중앙’은 1970년대에 시용했던 김정일의 호칭이었고, 이 노래는 김정일 시대의 마지막 시간에 어울렸다고 할 수도 있다.

12월 19일 정오. 모든 북한TV에서 1초 동안 붉은 스크린이 나오다가 상복 (喪服)을 입고 있는 리춘희가 등장하였다. 12시에 특별 방송이 있을 것이라는 보도를 들은 후에 상복을 입고 있는 방송원의 모습을 본 북한 주민들은 아마 이 순간부터 김정일이 사망했다고 인식했을 것이다.

김정일 사망 보도의 첫 순간. 사진=조선중앙TV 캡처

엄숙한 침묵의 5초가 지나간 후에 선언을 읽고 있는 리춘히의 목소리는 나왔다.

우리의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에게 고함. 우리의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 조선 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조선 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은 조선 로동당 총비서이시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위원장이시며 조선 인민군 최고사령관이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동지께서 주체 백(이천십일)년 십이 월 십칠 일 여덟 시 삼십 분에 현지 지도의 길에서 급병으로 서거하시였다는 것을 가장 비통한 심정으로 알린다.

10분 동안 리춘희는 김정일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이었는지 이야기했다. 역시 여기도 북한의 특수성을 느낄 수 있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아들이었고, 북한은 물론 이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식 문건에서 김정일을 ‘김일성의 아들’이라고 직접 부르는 것보다 다른 표현을 자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김정일이 ‘빨치산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버이 수령님의 가장 친근한 동지, 가장 충직한 전우’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가장 중요한 문장이 나왔다. 리춘희의 목소리가 갑자기 밝아졌고 그는 ‘오늘 우리 혁명의 진두에는 주체혁명 위업의 위대한 계승자이시며 우리 당과 군대와 인민의 탁월한 령도자이신 김정은 동지께서 서 계신다’고 했다.

2011년 12월 19일 12시 11분 45초. 바로 이 순간에 김정은의 아버지를 승계했다. 이 순간엔 북한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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