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실세 3인방 訪南과 남북관계의 구조

I.
10월 4일 북한의 실세라 칭해지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최룡해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장,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의 전격적인 방남은 그 의도 내지는 목적과 관련하여 한국에서 백가쟁명과 흡사한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물론 이러한 추측은 여러 가지 사실들과 관례에 기초하여 있지만, 탈북자나 북한전문가들 사이에서 동일한 사실적 기반 하에 정반대의 주장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북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병중의 김정은이 한 달 정도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음에 따라 그의 실각설마저도 나도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각종 추측이 ‘시나리오’라는 명칭 하에 제시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이지만, 남북관계라는 중대한 문제를 추측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연기를 보면 불이 나고(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식의 징후를 통한 추측을 배제하고, 북한 정권이 그 의도를 단정하기 어려운 어떤 행태나 움직임을 보일 때, 그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행태 자체의 특징, 그 행태로 인한 효과 그리고 이런 행태가 일어나고 있는 남북관계의 구조가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전제한다. 여기에 세계정세 속의 북한, 예를 들어 미국과 북한, 중국과 북한과의 관계가 추가될 수 있을 것이다.


II.
우선 북한 실세 3인방의 방남은 그 전날 사실상 일정까지 정하여 남측에 통지하였고, 형식적으로는 한국이 동의하였지만 사실은 동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라는 대북정책의 기조 하에서 혹은 북한과의 교류협력 증진을 천명한 어떤 정권의 대북정책 하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핵문제가 점점 더 위협적인 현실로 다가오는 상황 하에서는 북한이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가를 명분으로 하였든 혹은 그 어떤 다른 명분을 내걸었던 한국이 북한의 대화제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 이번 방남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많은 전문가들과 언론이 황병서에게 개인 경호원이 따라 붙었고 일행이 김정은의 전용기를 사용하였다는 점을 일종의 상징적 제스처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것은 부차적인 추측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인다. 즉 황병서 일행의 방남에서 분명히 드러난 점은 남북관계의 주도권 혹은 시발점을 북한이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금 강하게 표현하면, 핵보유 북한 정권이 한국 정부를 대하는 태도를 우리는 미리 보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분명해진 것은 한국 언론과 정치계의 반응이 조건반사적이라는 사실이다.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있는 새정치민주연합과 좌파 언론은 북한의 대화제의에 즉각 대규모 지원이나 이른바 ‘정상회담개최’를 연계시켜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과의 그 어떤 고위급회담을 남북관계의 해빙의 전조 혹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과거 20년간 수십 차례 있어 왔다. 심지어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남북관계에 경색-해빙의 주기를 관찰할 수 있었다. 즉 봄이 되면 남북장관회담이나 고위급 회담을 통해, 혹은 이산가족 상봉을 이유로 북한에 대규모 비료 혹은 식량 원조를 하고나면 몇 개월 소강 내지는 경색 혹은 연평해전과 같은 도발이 자행되고, 추수가 끝나고 나면 다시 그 어떤 남북관계 증진을 위한 회담 등을 이유로 다시 한 번 북한에 대한 지원이 있었다. 그리고 겨울은 남북관계가 동면기로 들어가고, 그 다음 해 봄이 되면 이런 주기적 행태가 반복되었다.


특기할 점은 이 당시 한국 정치계와 언론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언급하였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정치계와 언론의 기억상실증만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념갈등,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및 정상적인 남북관계를 ‘남북 간의 이벤트 활성화’와 동일시하게 된 한국의 상황이 그 배경에 깔려 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북한 정권은 그들의 대화제의가 한국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잘 이용할 줄 안다는 사실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북한이 한국의 상황을 인형놀이 하듯 조정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한다. 다행히 박근혜 정부는 3인방의 방남 결과를 ‘작은 성과’라고 지나친 부정도 지나친 긍정도 하지 않는 평가를 내놓았다. 그것은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남북관계에서 한국 정부의 구조적 약점을 이해해야 한다. 5년 단임 대통령제 하에서 역대 정권은 물론 박근혜 정부도 남북관계의 장기적 전망을 대북정책으로 내놓았다. 그러나 좌파와 우파 정권은 대북정책에서 본질적으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고, 따라서 정권의 이념적 방향에 따라 남북관계의 장기적 전망도 바뀔 수밖에 없다. 박근혜 정부는 대북정책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햇볕정책의 성과와 이명박 정부의 한미동맹 강화 등 안보 중시 모두를 계승하겠다고 하였지만, 북핵문제와 관련해서는 한국의 야권과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즉 박 대통령은 “핵을 이고 살 수는 없다”며 북핵문제의 해결을 강조하지만, 2012년 문재인 후보는 10·4공동선언 이행으로 남북경제공동체 형성, 한미동맹 위상 재조정, 남북국가연합 시작을 대북정책으로 내걸면서 북핵문제는 이른바 ‘출구전략’이라는 이름하에 그 우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한 마디로 말해 남북이 본격적으로 통일의 길을 가게 되면 북핵문제는 자연스럽게 해소 내지는 소멸된다는 가정이다. 그러나 문 후보의 대북정책은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태어나면 근사하겠지요”라는 이사도라 던컨의 결혼 제의에 “아니오. 내 얼굴과 당신의 머리를 물려받은 아이가 탄생할 수도 있겠지요”라는 버나드 쇼의 대답을 연상시킨다.


즉 한국에서 한 정권의 대북정책은 항상 정권의 유효기간과 부정합상태에 놓여 있다. 반면에 북한은 수령체제의 보위와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잃지 않겠다는 장기적 전략을 대남정책의 기조로 깔고 있고, 이 기조는 ‘김일성가(家) 백두혈통’의 정권세습과 정합상태에 놓여 있다. 한 마디로 장기적 대북정책을 천명한 한국 정부는 임기 중반을 넘어서면 그 거대 담론으로 인해 남북관계에서 가시적 성과를 내기 위해 시간에 쫓기게 되어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음 정권도 어쩔 수 없게 ‘대못을 박겠다’며 합의한 2007년 정권말기의 노무현-김정일의 10·4선언이다.


넷째, 지금까지 한국이 대북정책에서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경제지원과 경제제재 그리고 중국의 대북 압박을 위한 대중외교 뿐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두 가지 경제카드와 무관하게 무력도발과 핵개발, 대륙간 탄도탄 개발을 꾸준히 지속해 왔다. 이점은 경제지원이나 경제제재가 완전히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경제카드로는 북핵문제와 미사일 개발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한 지금까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이후 중국의 대북압박은 사실상 효력이 없었으며, 수개월이 지나면 북중무역은 증가하여 왔다. 이런 상황 하에서 북한의 선택은 한국에 북한에 우호적인 정권의 등장을 기다리거나 선거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었다. 바꿔 말해 조건부 지원이든 신뢰 프로세스이든 우파 정부의 대북정책보다는 ‘통 큰 지원’을 약속하는 좌파 정부의 등장을 당연히 선호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임기 후반에 들어서면 사실상 실현되기 어려운 구조적 이유이다.


III.
남북 관계의 구조적 현실을 고려할 때, 이번 북한 3인방의 방남은 일단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북한이 쥐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미국과 박근혜 정부의 북한인권 문제 제기를 무력화시키는 효과를 낳았으며, 남북 간의 대화나 한국의 대북지원을 촉구하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한미군사훈련을 핑계로 다시 대결국면으로 전환하거나, 과거의 경우처럼 대륙간 탄도탄 발사를 주권국가의 인공위성발사로 호도하여 감행하고, 이에 대한 유엔제재를 이유로 4차 핵실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이 되면 사실상 박근혜 정부의 대북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판단될 것이고, 특히 북핵문제 해결 실패는 한국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6자회담을 중심으로 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모두의 공동실패로 판가름 날 것이다. 이때 한국의 야권이 다시 한 번 대규모 경제지원을 통한 남북경제공동체 형성과 남북화해, 그리고 남북국가공동체의 시작을 앞세우며 ‘출구전략’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주장할 것은 명약관화하다.


북한 3인방의 방남 이후 북한에서는 이들에 대한 보도가 전무하고, 10월 5일에는 박 대통령에 대한 원색비난을 재개하였다. 그것은 물론 “수모를 당하더라도 한국 정부가 대화에 응할 수밖에 없다”는 오래된 북한의 경험이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하에서 박근혜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방법은 북한이 4차 핵실험이나 또 다른 탄도미사일 발사를 한 후에 강력한 제재를 하겠다는 현재의 정부의 입장이 아니라, 핵실험의 확실한 징조 혹은 미사일 발사의 준비상태에서 북한이 결코 극복하기 힘든 강한 제재를 북한에 통고하거나 천명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스스로 타부시할 수 있을 만큼 무서운 ‘전략적 비수’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오로지 이런 경우에만 한국 정부는 북한의 무례한 태도를 감내하고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아니면 적어도 대등한 위치를 확보할 수가 있게 된다. 청와대의 안보담당 김관진-김규현 듀오가 사자와 같은 가슴과 여우와 같은 지략을 통해 만들어내야 할 것은 이 전략적 비수이며, 박 대통령은 특유의 좌고우면하지 않는 결기로 이 전략적 비수를 북한에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최소한의 토대가 마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