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마침내 동북공정에 입을 열다

“최근 어떤 학자들의 론조에… 고구려 사람들이 고구려가 중국에 의해 멸망한 것에 대하여 ‘한’이 없고 따라서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 ‘중국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였다는 괴이한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고구려이야기 215쪽)’

그동안 중국의 동북공정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던 북한 학계가 최근 북한의 일반 주민을 대상으로 발간한 역사서 ‘고구려이야기’에 동북공정을 비판하는 내용을 수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 책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출판되자마자 북한 주민들의 화젯거리가 돼 책방에서 대대적으로 판매되고 있다”고 전할 정도로 북한 주민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뉴스가 입수한 ‘고구려이야기’는 2007년 3월 북한 사회과학출판사가 출간했으며 저자 조희승 박사는 북한의 대표적인 고구려 연구자로 북한 사회과학원 소속 고구려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고구려이야기’를 검토한 국내의 한 고구려사 전문가는 “분명 동북공정을 의식한 기술을 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그동안 무반응으로 일관해 온 북한 학계도 어떻게 든 동북공정에 대응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동북공정에 대한 비판적인 기술은 제7장 ‘연개소문과 그의 아들’의 제2절 ‘역적의 운명’에 가장 잘 드러나 있다.

‘고구려이야기’는 중국 학계가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 고선지, 이정기 등의 전기가 중국 사서 ‘신당서’에 실려있는 것을 근거로 고구려가 중국에 귀속됐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몇몇의 이름이 중국의 정사에 올라있다고 하여 고구려의 조선적 성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또 부록으로 수록된 ‘고구려풍습을 통해 본 조선민족의 력사적전통’에서는 온돌, 숫자 8과 관련된 풍습, 윷놀이 등 고구려의 문화적 유산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밝혀 고구려가 한민족의 뿌리를 이룬 국가임을 내비쳤다.

고구려는 온돌을 이용해 난방을 했으나 중국은 방안에 화로를 설치하거나 이동식 화로를 사용해 고구려와 중국의 생활양식이 구별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또 거의 모든 절의 중심탑 혹은 중심당을 8각으로 지을 정도로 숫자 8을 중요하게 여긴 고구려의 정신세계가 훗날 발해 상경용천부의 8각 돌우물, 고려 왕성의 8각전, 8만대장경 등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윷놀이가 부여와 고구려에서 유래했다는 기술은 남한 학자들도 대부분 인정하는 학설이다.

책은 “윷놀이의 도, 개, 걸, 윷, 모는 부여의 관직인 저가, 구가, 우가, 마가 등 관직을 활용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도는 돼지, 개는 말 그대로 개, 걸은 양, 윷은 소, 모는 말이다”라고 설명하고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 고분군에서 발견된 윷놀이판을 소개했다.

이밖에도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초해 고구려의 건국시기를 기원전 37년으로 보는 남한과 달리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27년으로 보고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왕 5명의 이름이 빠져있다는 학설을 수록했다.

또 남한 학계와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음을 들어 당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진 ‘천자의 나라’였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고구려이야기’는 동북공정에 대응해 고구려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도 중국을 의식한듯 비판의 수위와 책의 구성 등에서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한 것으로 분석됐다.

책 전체를 통틀어 동북공정을 직접 언급한 부분은 한 곳도 눈에 띄지 않았다. 서문에서 ‘최근 사람들속에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여…’라며 동북공정이 빚어낸 고구려사 갈등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또 ‘중국의 속국’, ‘중국소수민족의 지방정권’ 등 누가 봐도 중국학계의 주장임을 알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중국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어떤 학자’라고만 표현했다.

책의 구성에 있어서도 그동안 북한 학계가 자랑스러운 역사로 다뤄온 고구려의 대 수ㆍ당 전쟁이 축소 기술되는 등 오히려 중국의 눈치를 본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동북공정이 본격화되기 이전인 2000년 북한 사회과학원이 출간한 ‘고구려사의 제(諸)문제’의 경우 대 수ㆍ당 전쟁을 ‘수나라의 침략을 반대한 투쟁’과 ‘당나라의 침략을 반대한 투쟁’으로 직설적으로 표기했으나 ‘고구려이야기’에서는 ‘살수와 안시성’이라는 간접 표현으로 대체했다.

또 목차 구성에 있어서도 대 수ㆍ당 전쟁을 전체 7장 가운데 6장에 배치하는 등 중국과 문제를 일으킬 만한 부분을 뒤로 돌린 반면 ‘평양천도와 왜나라땅에 새겨진 고구려의 발자취’를 5장에 배치, 북한 내 고구려 유적을 강조했으며 그동안 북한 학계가 상대적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던 고대 일본에 고구려가 미친 영향을 새롭게 조명했다.

‘고구려이야기’를 검토한 국내 전문가는 “최근 중국은 대 수ㆍ당 전쟁을 국제전쟁이 아닌 국내의 통일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을 정도인데 주체사상을 강조하는 북한이 오히려 기존 입장에서 후퇴한 점은 실망스럽고 안타깝기도 하다”고 말했다.

이 전문가는 “북한도 동북공정에 대해 무언가 말하고 싶기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눈치를 안 볼 수도 없었을 것”이라며 “이 책은 동북공정을 비판하고는 싶지만 드러내놓고 할 수는 없는 북한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지표”라고 덧붙였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