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판 안네의 일기’ 남매 똘똘한 일본 유학기

▲일본 리츠메이칸 2년생인 박춘식(右) 군이 지난달 간사이대 북한 경제학 강의 시간에 이영화 교수(左)와 함께 토론을 벌이고 있다. ⓒ데일리NK

일본 간사이(關西)대학 ‘북한 경제학’ 강의 시간. 앳된 모습의 여학생이 강단에 섰다. 박선희(22, 간사이대 사회학 2년) 양은 지난 2005년 일본으로 유학 온 탈북자다. 박 양은 이날 수업에서 동급생들에게 탈북하면서 경험했던 일들과 고향인 북한에 대해 설명했다.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 부끄러웠고, 무엇보다 자신이 탈북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이 싫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본에서 북한을 알릴 수 있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다.

박 양의 오빠 춘식(24) 군도 이 강의에 참석해 북한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춘식 군도 처음에는 탈북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에 망설이긴 했지만, 지금은 ‘참여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단다.

그는 “중국에서 한국 입국을 도와준 일본의 북한인권단체(RENK) 대표인 이영화 경제학부 교수님의 권유로 수업에 참여 했지만, 경청해 주는 일본 대학생들을 보며 힘이 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던 일본 학생들이 점점 많은 질문을 할 때 가장 즐겁다”며 “일본 학생들이 북한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많은데, 저로 인해 조금이나마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희망도 밝혔다.

춘식 군은 간사이대와 함께 간사이 지방 사립 명문으로 꼽히는 리츠메이칸(立命館)대학 국제협력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탈북 남매가 사립 명문대에서 일본인 대학생들과 경쟁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는 것. 10일 간사이 대학 캠퍼스에서 춘식 군 남매를 만나 탈북 이후 이들의 우여곡절 많은 정착기를 들어봤다.

“식량난 때 살아남은 것이 기적…어린 동생 손 잡고 두만강 넘어”

남매는 평안남도 문덕에서 태어났다. 동생 선희가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덟 살 때 아버지를 병으로 여의였다. 이후 외숙부 댁에 얹혀살았지만 당시 북한은 고난의 행군 시절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한끼조차 먹기 힘들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남매를 책임질 수 없다는 외숙부는 중국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남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살겠다는 일념으로 두만강을 넘었다.

춘식 군이 13살, 선희 양이 11살이 되던 1997년, 오빠는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고 두만강을 건넜다. 춘식 군은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고 한다. 그는 “이 세상에 동생과 나 둘밖에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지만 살겠다는 의지가 두만강을 넘게 했습니다”고 소회했다.

▲춘식 군의 꿈은 영·중·일어에 능통한 국제문제 전문가가 되는 것이다. ⓒ데일리NK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동생과 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셨어요. 고난의 행군 시절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된 우리가 살아 남았다는 것이 기적 같습니다. 그 당시 중국에 가면 먹을 것이 있다는 어린 마음으로 두만강을 넘었는데 국경 경비대에 발각되지 않았다는 것이 정말 천만 다행이었죠.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는 것은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렇게 탈북해 중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중국에서의 생활은 언제 중국 공안에 잡혀 북송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의 연속이였다.

다행히 남매는 중국에서 알게 된 지인의 소개로 중국인 양부모님 슬하에서 그 동안 받아 보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지냈다. 남매는 양부모의 배려로 몰래 학교도 다닐 수 있었지만 북한아이라는 것이 들킬까봐 친구들과 놀 때도 불안한 마음이었다.

남매는 하루 빨리 한국에 가고 싶었다. 당시 남매는 일본 RENK의 도움을 받아 2000년 한국에 입국했다. 한국 입국 당시 남매의 탈북 과정에서의 역정을 담은 ‘북한판 안네의 일기-굶주림보다 무서운 것은 희망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시대정신 刊)라는 책이 발간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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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식 선희 남매가 중국에서 쓴 탈북수기

한국에 입국한 후 남매는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입국한 후 6개월만에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모두 통과했다. 이후 선희 양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춘식군은 전문대에 다니면서 한국 사회에 적응해 갔다. 그러나 부모, 친지가 없는 상황에서 남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선희 양은 탈북자 양부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았으나 마음이 편치 못했고 결국 혼자 살게 됐다.

춘식 군은 전문대를 졸업하고 수준급 중국어 실력으로 무역회사에 입사해 일년 가까이 일했다. 그러나 한국 사회 경험이 없는 탈북자로서는 조직 생활이 벅찼고, 결국 중도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남매는 “좀더 노력을 했다면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었겠지만 탈북자에 대한 편견이 항상 저를 따라 다녔다”며 한국사회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한국생활 5년만인 2005년, 한국 입국을 도와준 일본 단체 지인들의 추천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남매가 처음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일반 대학생들도 힘든 유학 생활을 부모, 친척도 없이 남매 단 둘이 잘 해낼 수 있냐’며 만류했다고 한다. 더구나 탈북자가 유학을 간다는 것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남매는 두만강을 건널 때의 각오면 못할 것이 없다는 결심으로 일본 유학에 나섰다.

“힘든 일본 유학 생활…두만강 넘던 각오로 버텨”

처음에는 고생도 많았다. 돈도 없고 말도 안 통했다. 일본에 온지 3개월 만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간단한 인사말 밖에 하지 못했지만 생활비와 학비 마련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일본어 학원을 마치고 저녁 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스무살을 갓 넘긴 선희 양은 주방에서 하루 여섯시간 이상 설거지만 했다.

“처음 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는데 접시가 미끄러워서 자주 깨먹었어요, 접시 한 장 깨면 1000엔(円)을 변상해야 했기 때문에 그냥 맨손으로 설거지를 했죠. 그렇게 한달 정도 지나니까, 손이 흉할 정도로 갈라졌어요, 무엇보다 여러 번 씻어도 없어지지 않는 음식 썩은 냄새가 정말 싫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찾아 탈북한 만큼 일본에서 많은 것을 경험해 보고 싶었어요. 힘들기는 했지만 새로운 것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저를 버티게 한 것 같아요.”

춘식 군도 유학 초기 고생한 것은 마찬가지다. 식당, 슈퍼, 술집, 편의점 아르바이트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일본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남들보다 시급(時給)은 적게 받았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몇 개월분의 월급을 받지 못했을 때도 있다. 무엇보다 춘식 군은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를 받을 때가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이었다고 털어놨다.

“일본에 온 지 3개월 정도 지나서 바로 일을 시작했어요. 처음 식당 주방 보조로 일했는데 저의 생각을 전달 할 수 없었을 때 가장 힘들었어요. 사장이 볶음밥 하는 방법을 알려줬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사장은 알아듣지 못하자 손찌검까지 했습니다. 사장이 손찌검하고 무시하자 다른 아르바이트생들도 저를 무시하더군요.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무시당하는 것이 정말 싫었습니다.”

선희 양은 지난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 남자 친구를 만났다. 선희 양은 남자 친구를 사귀면서 엄마 생각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1997년 탈북한 박선희 양은 간사이대 사회학과 2학년에 재학중이다. ⓒ데일리NK

“제가 탈북자 출신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남자친구가 잠시 떨어져 있자고 말했어요. 남자 친구는 ‘북한이 무섭고 북한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당시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특히 남자 친구가 ‘부모님에게 저를 소개시키고 싶은데 고아고 북한에서 왔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을 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엄마 생각이 많이 났어요”

남매가 탈북자이기 때문에 겪은 설움은 남다르다. 선희 양은 최근 일본 NHK방송에 자신의 이야기가 방송된 후 아르바이트 모집에서 아무 이유 없이 떨어졌다. 2006년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했을 당시 탈북자라는 이유로 택시에서 쫓겨났던 경험도 있다.

춘식 군은 NHK의 방송 후 같은 과 일본인 친구들이 자기를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져 당황했다고 한다. 일부 학생들은 강의실 뒤에서 수군거리기도 했다고.

“탈북자라고 좌절 안 해…남들보다 잘하는 모습 보여줄 것”

한국과 마찬가지로 탈북자에 대한 일본 사회의 선입관이 남매를 더욱 아프게 했다. 그러나 남매는 좌절하지 않았다. 춘식군은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 유학생활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북한과 중국에서 고생한 거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물론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그런 과정은 누구나 겪잖아요. 지금은 일본 생활이 정말 즐겁습니다. 이제 탈북자라고 해서 창피하지 않아요. 오히려 일본 생활은 탈북자라는 족쇄에서 저를 해방시켜줬습니다. 물론 일본인들도 탈북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좋지만 일본어를 잘하게 되면서 자신감을 갖게 됐습니다. 탈북자라고 해서 전혀 불편하지 않습니다.”

남매는 한국에서의 생활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어디에 가든 ‘탈북자’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탈북자라고 하면 얼굴 표정이 바뀌는 한국인들을 볼 때 마다 남매는 ‘탈북자들도 남들보다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각오를 갖게 됐다고 한다.

남매는 1997년 탈북한 후 11년째 타향에서 생활하고 있다. 선희 양은 북한에서보다 중국, 한국, 일본에서 살았던 시간이 더 길다.

일본에서 남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한 지인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북한에서 부모님을 여의고 고난의 행군 시기 아사 직전의 상황까지 경험한 남매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 낼 것”이라면서 “중국과 한국에서의 생활도 적지 않은 고통이었지만 지금까지 꿋꿋이 살아온 남매는 어디서든 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했다.

중국어, 일본어를 수준급으로 구사하는 남매는 앞으로는 영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다는 계획도 밝혔다. 남매의 얼굴에서는 죽음과 공포로 얼룩졌던 과거의 그림자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꿈을 향해 도전하는 20대 청춘의 희망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