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에세이’ 우수작

두가지 악몽

한영수 (前 함경북도 안전보위부 납치공작원)

1.

“선생님 살려주세요, 한번만 살려주세요. 저한테 있는 돈 다 드릴께요. 제발 저기로는, 저기로는…….”
여자가 수갑에 차인 채 주머니를 뒤적거린다. 손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돈이 떨어져 바닥에 나뒹군다.
“선생님, 선생니-임…….”
여자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내가 중국공안 복장을 하고 있어, 그저 중국의 한 파출소에서 조사받고 벌금 내고 나오면 되는 줄 알았던 여자는 ‘불요불굴의 공산주의 투사 김정숙 동지를 따라 배우자’라는 구호판이 보이자 얼굴이 새파얗게 질렸다.
“입 닥쳐, 이 X간나. 그러게 왜 조국을 배반해?”
이제야 그는 내가 북한 보위부 요원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 여자는 북한으로 끌려가는 중이다. 차는 라이트를 죽인 채 국경으로 향한다. 흔들거리는 차 안에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가득하다. 한참 조용하다 싶어 옆을 보니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뭐야, 이건?’
순간, 여자가 얼굴을 들어 나를 본다. 눈동자가 없다. 얼굴이 하얗게 빛난다. 깡마른 얼굴에 광대뼈가 툭 튀어나왔다. 입에서는 피가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다.
“으악, 으악, 으아악…….”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 침대 시트가 땀으로 흥건히 젖어있다. 벌써 몇 년째, 나는 이런 꿈을 꾸고 있다. 내가 끌고 간 사람들이 원혼으로 꿈 속에 살아나 피를 흘린다. 지독한 악몽이다. 어떤 때는 양○○, 어떤 때는 최○○의 여덟 살짜리 아들이 꿈 속에 나타나 팔다리를 짓누르며 원망 어린 눈빛으로 한참을 내려다 보거나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친다.
오늘은 자기가 북한에 끌려가는 줄도 모르고 차에 올라타, 강가에서 발버둥을 치는 것을 기절시켜 데리고 갔던, 림○○이 꿈에 나타났다. 그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조사를 받고 정치범수용소에 보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2.

나는 국가안전보위부 산하 함경북도 안전보위부 반탐처 공작원으로 1997년 9월부터 2000년 12월까지 수십 명의 탈북자와 북한인권운동가들을 잡아 북한으로 끌고 갔던, 인권의 ‘가해자’이다. 그런 내가 피해자들의 피맺힌 절규가 묻어나야 할 북한인권수기 공모에 얼굴을 내미는 것이 부끄럽고 송구스럽기 그지없지만 지난날의 죄인이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의를 밝히는 차원에서, 그리고 북한인권의 가해자로서 겪는 또 다른 심적 고통을 털어놓고자 어렵게 펜을 들었다.
내가 납치공작원이 된 것은 사실 ‘내 한 목숨이 살기 위해서’였다. 나는 1997년 6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조선족 중국인으로부터 평양에 살고 있는 어느 탈북자의 가족을 중국까지 데리고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거액의 금전적 대가가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 일을 흔쾌히 승낙했고, 일을 성공시켰다. 그런데 나중에 보위부에 그 사실이 발각되어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어느 날 보위부원에게서 “너는 정치범수용소로 가거나 공개처형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너무도 흥분한 나는 화장실 유리창을 깨서 복부를 자해해 병원으로 실려갔다. 그런 물불 가리지 않는 성격이 맘에 들었는지 함경북도 안전보위부 반탐처장 윤창주가 찾아와서는 “우리(보위부)를 위해 협조하지 않겠는가”하고 물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목숨이니,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퇴원 후 나는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보위부 초대소에 들어가 교육을 받고, ‘이춘길’이라는 가명과 ‘쓰얼링(중국어로 ‘420’을 뜻함)’이라는 암호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탈북자 납치를 전문으로 하는 공작원이 되겠다는 충성맹세를 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족으로 위장해 살아가며 숱한 탈북자들을 잡아 북한으로 끌고 갔다. 그 후 3년의 삶은 인간백정, 저승사자와도 같은 길이었다.
중국으로 넘어가면서 윤창주가 내게 준 가장 큰 임무는 “반북단체인 ‘민족통일연합회’(민통련) 내부에 침투하여 그 조직원을 일망타진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 연변지역을 무대로 활동하던 민통련은 북한에 반체제 선전물을 배포하고 김일성 동상 폭파를 기도하는 등, 북한 보위부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내가 탈출을 시켜줬던, 그러다 결국 보위부 공작원이 된 계기를 만들어 준, ‘평양에 사는 어느 탈북자의 가족’이 바로 민통련 핵심 활동가의 가족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는 내가 도와주었던 사람을 가장 먼저 잡아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고, 몇 달 간의 추적 끝에 그를 붙잡아 북한으로 압송했다. 그리고 한국인 백○○의 밑에서 활동하던 탈북자 류○○, 박○○, 연락책이었던 중국인 석○○ 등을 체포해 북한으로 끌고가 ‘민통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성과로 나는 훈장을 받고 보위부 회의에서 모범적인 사례로 보고가 되기까지 했다.
일을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사실 그 동안에도 내가 잡아온 사람들의 마지막 뒷모습이 떠올라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러나 솔직히 그때는 ‘살아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나의 삶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한 망나니 같은 날들이었다. 그 뒤로는 정말 뭐가 뭔지 모르는 비이성의 상태에서, 상부에서 지시한 명령을 이행하는 ‘납치 기계’로 살아왔다.
1960년대에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왔던 귀국자의 일본인 부인이 중국으로 탈출하자, 할머니가 된 그녀와 일가족 4명을 붙잡아 북한으로 넘겼다. 그리고 북한의 전 정무원(내각) 고위간부였던 황○○, 탈북자 림○○ 일가족 등을 체포했고, 함경북도 보위부원으로 활동하다 탈출한 윤○○, 한국의 국가정보원 요원인 한○○ 등을 추적하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을 여기에 기록하기엔 너무도 부끄럽다. 영웅심에 들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몇 푼의 돈과 재물, 중국에서 나름대로 자유로운 삶을 만끽하는 재미에 휩쓸려 그런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가담하게 되었다.

3.

그런 내 마음이 흔들린 것은 1999년 6월, 내가 체포하여 북한으로 끌고 갔던 최○○의 가족을 회령시 보위부 감옥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 나는 우연히 회령시 보위부에 들르게 되었는데, 지하에 있는 조사실에서 최○○의 가족이 조사받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호기심에 그들을 한번 보자고 내려갔는데 최○○의 아들이 쇠창살을 붙잡고 울고 있었다. 아이에게 나이를 물어보니 여덟 살, 내 아들과 동갑이었다. 미안하고 측은한 마음에 근처 장마당에 나가 빵과 사탕을 사서 감옥 안에 넣어주었다.
그 장면을 함경북도 회령시 곡산공장 보위부장인 지영수가 보게 되었다. 지영수는 나에게 지령을 내리는 상관 중 한 명이었다.
“왜 반역자들에게 인정을 베푸는가?”
날카로운 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았다.
“동무, 동무는 계급주의가 바로 선 사람인가? 그렇게 동정을 베풀다가 나중에 저 아이가 크면 우리에게 총부리를 겨눈단 말이야!”
그는 일말의 자비심이나 동정심도 느끼지 말라고 했다. 그때 참 회의감이 들었다. 이 어린애가 뭘 안다고 반역과 계급주의를 운운하는가. 이들에게는 어린애의 손에 빵 한 조각 쥐어주는 일말의 인간성조차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지용수는 “나중에 비판을 받을 줄 알라”고 쏘아붙이며 돌아섰다.
그때부터 나는 일을 하는 둥 마는 둥 했고, 중국에 있는 다른 공작원들과 술을 마시면서 김정일이 사실은 백두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태어났다는, 북한사람들 사이에서 절대 해서 안 되는 말까지 해버렸다. 북한에 돌아가면 정치적 처벌을 세게 받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결국 나는 탈북자를 잡아들이던 사람에서 탈북자의 처지가 되어 쫓기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1999년 11월 18일, 중국 선양(瀋陽)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들어가 망명을 요청했다. 열흘 동안 영사관에 머물면서 조사를 받았는데, 망명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조사관이 했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네가 저지른 죄를 모르고 어찌 감히 대한민국으로 가려고 하는가.”
그때서야 나는 내 이마에 ‘가해자’라고 하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전혀 억울할 것도 없고, 내 스스로 빠져든 죄악의 구렁텅이이지만 그땐 그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고 한참을 방황하며 살았다. 나는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허공 속의 인물’의 되어버린 것이다. 2000년 1월 10일, 7월 10일, 2002년 7월 10일, 나는 칭다오(靑島)주재 한국총영사관, 상하이(上海)주재 한국총영사관, 베이징(北京)주재 한국총영사관에 들어가 계속 망명을 신청했다. 그때 마다 ‘거절’의 쓴 잔을 마셔야 했다. 2003년 1월 한 NGO의 활동가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하기까지 나는 그렇게 도망자의 암담한 처지를 처절하게 느껴야 한다.
2000년 9월에는 체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가기까지 했다. 한국으로 망명이 되지 않으니 일본에 망명할 생각으로 일본영사관에 팩스를 넣었는데, 저녁에 내가 은신하던 숙소로 중국의 국가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아마도 일본영사관으로 통하던 팩스를 감시하였던 것 같다. 2000년 7월의 일이었다.
중국 안전부에서 2개월동안 조사를 받은 후 나는 북한으로 송환됐다. 수갑이 채워진 채 단둥(丹東)-신의주간 다리를 건너는데, ‘이것이 압송되는 탈북자의 심정이구나’ 하는 것을 처절하게 알게 되었다. 후들후들 다리가 떨리고 머리 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하는 생각에 몇 번이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나에게 잡혀갔던 사람들도 이런 심정이었을까?’
물 속에라도 뛰어들고 싶었지만 양 쪽에서 꽉 붙잡고 있는 공안원들 때문에 자살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체념했다. 건너편에서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는 평안북도 보위부 반탐처장의 손에 넘겨졌다.
“이인모처럼 절개를 지키고 돌아올 것이지, 왜 다 불고 돌아왔느냐. 아무튼 고생했어.”
승용차에 올라타 수갑을 풀어주며 반탐처장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는데, 이내 이들은 내가 중의 안전부에 북한 보위부의 어떠한 비밀을 누설했는지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긴, 나 같은 미물의 목숨 하나 앗아가는 쯤은 그들에게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리라.
불행인지 다행인지, 중국 일반 공안(경찰)이 아니라 정보기관인 안전부에 잡혀가는 바람에 나는 북한에서도 특별하게 취급 받았고, 평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몇 달간 조사를 받은 끝에 그 동안 훈장을 탈 정도로 보위부에 충성했고, 앞으로도 활용가치가 있다는 판단에서인지 다시 공작원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공작 지령을 받고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나는 다시는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북한의 납치범죄와 송환된 탈북자를 학살하는 이 진실을 세계에 알리는 것이 지난 날의 죄를 씻는 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북한에 계속 머무르게 되면, 내가 살기 위해 또다시 그런 인간백정 노릇을 계속 해야만 할 것 같아 그랬다. 나는 정말 새롭게 살고 싶었다.

4.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까지 2년 동안 나는 영락없는 도망자의 신세에서 악몽에 시달렸다.
“한영수, 이 쥐새끼 같은 놈. 네가 여기 있으면 우리가 못 찾을 것 같아?”
누군가 어른거리는 그림자에 놀라 눈을 떠보면 나와 함께 활동했던 보위부 납치공작원들이 포승줄을 들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돼, 안돼’하면서 몸을 움직여보려 하면 사지가 못에 박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땀이 범벅이 되어 버둥거리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보면 은신처의 다락방이었다.
내가 잡아갔던 사람들이 원혼이 되어 짓누르는 꿈에, 나를 잡아가려는 사람들이 포승줄을 들고 웃고 있는 꿈에, 나는 두 가지 악몽에 시달렸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 “여러분, 이곳은 대한민국 인천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을 듣는 순간, 나는 이제 이 두 가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1년 넘게 조사를 받고, 나는 탈북자들의 한국정착교육을 담당하는 기관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사회로 방출되었다. 다른 탈북자들이 내가 북한에서 했던 일들을 알게 되면 문제가 발생할까 봐 한국정부에서 취한 조치였다.
지금 나는 북한에서의 이름을 버렸고,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들이 모이는 자리에도 찾아가지 못한다. 내가 잡아갔던 탈북자의 가족이 한국에 살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들과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무릎 꿇고 빌고 싶지만 그들이 쉬이 나를 용서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의 가해자가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하는 형벌의 과정이리라 생각하며, 나는 이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고 있다. 내가 잡아갔던 사람들과 그 가족이 겪었던 고통에 비해 사실 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스스로를 위로한다.
북한이 새로운 사회로 개변하고, 정권의 편에서 인민을 탄압했던 사람들이 심판의 무대에 오를 것이다. 그때 누구를 벌하고 누구를 용서해야 할지 나는 사실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 변명처럼 하는 이야기는, 그 체제 속에 나서 자랐던 우리로서는 달리 어떡할 수 있는 선택의 갈래길이 없었다. 내가 가해자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또 하나의 피해자가 되어 쫓겼듯, 지금 북한에서 누구는 완전한 가해자이고 누구는 완전한 피해자라는 절대공식은 없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피해자가 또다시 가해자로 되기도 하는 것이 오늘 북한의 현실이다. 오직 한 사람만 자유롭고 만인은 부자연스러운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는 자숙하며 지난 2년을 살아왔다. 앞으로도 특별히 얼굴 내밀지 않고 조용히 북한의 진실을 알리는 일을 하려고 한다. 얼마 전 정치범수용소 출신의 한 탈북자가 ‘함경북도 보위부 요원들이 탈북자를 유인 납치해 끌고 와 수용소에 가뒀다’고 증언하면서 내겐 낯익은 윤창주, 지영수와 같은 사람들이 이름을 나열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도 이제라도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북한의 참혹한 실정을 만천하에 고백했으면 한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나로 인해 끌려갔던 사람들, 정치범수용소에 갇혀있는 사람들,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 그의 가족과 애인, 친지들, 지금도 북한에 살고 있는 인민들과 나의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북한에 인권의 빛이 환히 비추는 날, 나 또한 두 가지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다시 한번 그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끝)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