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에세이’ 우수작

사람이 살고 있었네

지난 7월, 우연치 않게 북한 땅을 밟을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다니는 학교와 현대아산이 공동 주최하는 ‘금강산지역 자원봉사활동’ 이었다. 평소에 북한과 북한사람, 그리고 북한의 인권개선과 자유민주화에 관심이 많았기에, 나는 프로그램에 선뜻 동참했다. 북한문제의 본질을 해결하기 위해, 비록 작은 힘이지만 나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는 나였다. 그렇기에 북한 땅을 직접 밟아보고, 탈북자가 아닌 북한사람을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실로 커다란 행운이라 생각했다. 나는 금강산호텔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그 곳에서의 가슴 벅찬 12박 13일은 빠르게 지나갔다. 북한 땅을 밟고 왔다고, 북한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왔다고,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거라곤 몇 장의 사진과 기념품이 전부이다. 나도 사람인지라, 그 곳에서 있었던 수많은 추억과 금강산의 절경은 내 기억 속에서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가슴 깊숙이 담아 놓은, 내가 경험하고 정을 나눈 북한 사람에 대한 기억의 끈은 놓고 싶지 않다.

북한에서 2~300만이라는 실로 놀라운 숫자가 아사하고, 수십만 명이 제 3국에서 인간이하의 삶을 살며 유랑한다는 놀라운 소식을 계기로 북한과 북한인권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북한동포 돕기 모금운동’을 시작으로 한 작은 활동은, 이제는 북한인권운동으로 어느덧 내 삶의 중심이 되었다. 북한인권운동의 출발점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닌 북한과 북한사람들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사랑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막연한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은, 나처럼 자기중심적이고 세심하지 못한 이에게는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금강산에서 만난 북한사람들 그리고 또 그들과의 경험은, 북한인권운동을 하는 나에게 새로운 자극과 힘을 주는 계기점이 되었다. 어쩌면, 반복되는 일상과 가시적인 성과의 부재로 굳세게 결심했던 북한인권운동에 대한 초심이 약간은 희미해졌을지 모를 동지들, 그리고 이제 막 북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대학생들과 나의 소중한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

지금으로부터 십여 년 전, 1990년대 대학가에는 북한바로알기 운동이 퍼졌다고 한다. 북한은 우리가 총을 들고 싸워야하는 적대적 관계가 아닌, 함께 통일을 이루어야 하는 같은 민족이라고. 공산당은 머리에 뿔 달리고 눈이 빨간 괴물이 아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이 즈음 운동권에서는,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루이제 린저의 글과 함께 황석영의 ‘사람이 살고 있었네’라는 책이 필수교양서였다고 한다. 수많은 탈북자들의 교차증언으로 북한의 열악한 실상이 밝혀진 지금, 이 책은 북한의 숨겨진 이면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잘못된 환상을 심어준 책이라 비판을 받곤 한다. 하지만 12박 13일 이라는 금강산에서의 내 짧은 경험에 비추어 보면, 황석영 작가가 책 제목을 참으로 잘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처럼 북한에는 실로, ‘사람’이 살고 있었다. 나와, 우리와 같은 ‘사람’ 말이다. 그들도 정을 나눌 줄 안다. 그들도 우리처럼, 더 풍요롭고 싶어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각자의 욕망이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누군가의 감시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도 우리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말과 행동을 하고 싶어 한다. 그들도 우리처럼!! 우리와 같은 다양한 욕구를 가진 사람임이 당연하지 않은가!!

봉사활동의 하루 일정을 마치면 나는, 습관처럼 온정각에 있는 편의점으로 달려가 캬라멜과 초코바를 한가득 사곤 했다. 금강산특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특권층인 사람들이다. 특구에서 일 하기에, 다른 지역의 북한주민에 비하면 월등히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먹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 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눈에 띄는 무언가는 잘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하나씩 포장을 분리해 주머니에 넣어가지고 다녔다. 그리고 항상 내가 도움 받을 상황을 연출하고 그에 대한 답례로 캬라멜이나 초코바를 드리곤 했다. “단 것을 먹어서 오늘은 힘 좀 쓰겠구나”라며 웃음 지으시던 어느 아저씨의 희미한 미소, 어린 아이처럼 카라멜을 소중히 녹여 드시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나는 그날 밤 오랫동안 잠자리를 뒤척여야 했다.

비록 남한 사람만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특구이지만, 북한의 모습을 구석구석 생생하게 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사진을 많이 찍고 다녔다. 우리네야 사진 찍는 게 별 일도 아니지만, 북한주민들에게 당신의 멋들어진 독사진 한 장을 갖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한 일인 듯 했다. 몇 번 인사를 나눈바 있는 분들은 조용히 다가와, 독사진을 찍어서 인화해 줄 수 있냐고 부탁을 하기도 하셨다. 순간, 젊었을 적의 빛바랜 사진을 장롱 깊은 곳에 넣어두시고, 가끔씩 꺼내어 보시던 나의 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애석하게도 그 곳에는 디지털카메라 인화가 불가능했기에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했지만, 사람이라면 당연한 욕구인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일깨워준 경험이다. 카메라와 사진 자체가 무던히도 귀했을 할머니의 과거와 지금 북한의 현실이 다를 게 무엇인가.

너무도 당연해서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풍요로움과 일상이, 그렇지 못한 다른 누군가에겐 근접하기 힘든 소망이란 사실이 안타깝다. 그래서 그 분들의 따뜻한 마음과 작은 배려가 더욱 감동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비록 가진 게 적더라도, 그 적은 것을 나누어주시던 그네들의 따뜻한 마음. 객이 없어 한가한 오후시간에는 호텔의 여기저기를 혼자 돌아다니곤 했다. 그 때 만난 한 아주머니, 얼굴이 너무도 곱던 그 분. 그 분은 아래층에서 오가는 몇몇의 관광객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며 무언가를 조금씩 드시고 계셨다. 내가 다가가 조용히 아주머니 옆에 서자, 쑥스럽게 웃으시며 드시던 것을 감추셨다. 내가 점심을 많이 못 먹었다고 일부러 엄살을 피우자 감추셨던 네모난, 그리고 습기가 차 눅눅해진 비스켓을 슬며시 건네셨다. 그저 내 느낌이었을까?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그윽한 눈빛으로 “수정선생, 남쪽은 살기 어때요?”라고 물으셨다. 아! 순간 눅눅해진 비스킷이 목에 메었다. 그 눈빛 앞에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그냥 환한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그저 북한 사람들은 간식거리로 무엇을 먹는지 궁금했을 뿐인 내가, 장난스레 아양을 떨며 비스켓을 받아 먹은 내가, 그리도 미울 수가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질 즈음, 아주머니는 저녁밥은 꼭 많이 먹으라며 부끄러운 내 손에 비스켓 하나를 더 쥐어주고 자리를 뜨셨다.

하루하루 새로운 경험으로 인해, 금강산에서의 잠자리는 매일 뒤척임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안타까움과 고뇌로 찬 나의 뒤척임을 눈물로 바꾼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너무도 즐기고 소중히 여기는 것을, 역시 마찬가지로 제일 좋아하던 한 동무의 작은 속삭임 이었다. 여럿의 동무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함께 나눌 때 물어보았다. “동무들은 언제가 제일 행복해요?”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순간적인 침묵이 흘렀고, 다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짧은 침묵을 깨고 “수령님의 사랑을 생각할 때가 제일 행복하지요.”라고 말하며 환하게 웃음 짓던 동무. 남쪽으로 돌아오기 며칠 전, 그 동무와 우연치 않게 잠시나마 둘만 있을 수 있었다. 나는 넌지시 다시 한번 물었다. 동무는 정말 너무도 고운, 그리고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집에 가서 잠자기 전에 누워서, 혼자 이것저것 생각하는 시간이 난 제일 좋아요.” 아, 혼자 있는 시간!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는 구나!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이 동무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얼마나 보장이 될까.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그리고 이 동무는 혼자 이것저것 생각한 것을, 누구와 함께 아무런 거리낌 없이 공유하지도 못할 텐데! 내가 이를 앙다물고 눈물만 뚝뚝 흘리자, 내 속도 모르는 예쁜 동무는 ‘통일이 되면 다시 만날 수 있는데, 울기는 왜 우냐’면서 나를 달래주었다.

금강산에서 만난 북한 사람들은 남한의 대학에 북한학과가 있다는 사실을 매우 신기해했으며, 내가 학교를 졸업한 뒤 나중에 어떤 직업을 가질 계획인지 무척 궁금하게 여겼다. 근 2주일 동안 나에게 질문을 퍼붓는 그들에게, 나는 차마 내 꿈은 말하지 못했다. 왠지 그들이 커다란 충격을 먹고, 무척 혼란스러워 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금강산에서의 마지막 밤, 술에 얼큰히 취해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러 호텔에 들렀다. 또 언제 만날지 모르는 헤어짐이 아쉬운 그 순간에, 굳이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들에게서 꿈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또 받았다. “동무들 충격 안 먹을 자신 있어요?” 소심한 나는 또 걱정이 되었다. “일 없슴네다. 얘기 하시라요.” 그래도 노파심에 다시 한번 물었다. “동무들 정말 충격 안 먹을 자신 있어요?” “아아~빨리 말 하시라요” 대답을 안 하면 이제 짜증을 낼 기세다. 술기운이 올라와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나는 우리 북한이 지금보다 더 많이 자유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해요. 동무들이 다른 사람 눈치 안보고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사회. 나는 그 것을 앞당기기 위한 일을 할 거예요.” 우리 예쁜 동무들은 여느 때처럼 내 말에 논박하지 않았다. 그냥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말끄러미 바라본 후, 황급히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금강산에서 북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렇게 정리되었다.

표현으로부터의 자유, 신앙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공포로부터의 자유. 1941년 나치독재에 대항하기 위하여 의회에서 주장한 바 있는,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4대 자유다. 600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유태인이 나치독재에 의해 학살당하고 2차 전쟁이 종결된 지 60여 년이 흘렀지만, 북한의 상황은 나치독재 하의 그것보다 나을 게 없다. 예전부터 인간의 가장 기본적 권리로 여겨져 쟁취의 대상이 되어왔던 것들, 그래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이제 일정정도 소유한 것들. 자유화, 민주주의, 인권, 인간존엄성… 우리는 너무도 많이 듣고 자라 진부한 말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이 단어들이,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 그래서 우리가 누리는 온갖 풍요로움과 자유로운 일상이, 경험해 본적이 없기 때문에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멀리 있지 않다, 서울의 도심에서 불과 1시간이면 도달할 거리에, 그것도 무려 2천 3백만 명이 있다.

예전에 어느 언론사의 국가만족지수와 행복지수 조사에서 북한이 1위를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혹자는 북한사람들이 만족하는데, 우리의 기준으로 북한사람들의 행복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말한다. 하지만, 사실 북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다’라고 말할 자유도 없다. 행여, 그렇게 말했을 때 그들이 어떤 대가를 받을지 그들 스스로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한 척 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일상을 비디오로 찍어서 보여준다면, 그리고 누군가 그들을 감시하고 있지 않다면, 그래도 수령님 덕으로 행복하다고 말할지 의문이다. 안타깝게도 황석영씨는 감시하는 자들과 체계는 보지 못하고, 감시당하는 사람들의 행복에 겨운 듯한 거짓 웃음만을 본 것이다. 하지만 황석영씨의 책 제목처럼, 정말 북한에는 ‘사람이 살고’ 있다. 우리와 똑같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그들이 거짓 웃음이 아니라 진정한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도록, 이제는 우리가 본격적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북한과 북한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일상생활 속에서는 나태함과 안일함으로 일관했던 나에게 반성과 새로운 다짐의 계기점이 되었던 금강산에서의 12박 13일은 잊고 싶지 않다. 내가 만났던 아련한 금강산의 북한사람들, 그리고 그들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북한 동포들과 함께 웃을 날을 그리며 글을 마친다. /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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