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ARF 탈퇴협박과 ‘김정일 길들이기’

▲ 회담장에 들어서는 북한 백남순 외상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ARF(아세안지역안보포럼)가 28일 밤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는 의장성명을 채택하고 공식 폐막됐다.

북한 백남순 외무상은 이날 오전 리트리트(편하게 토론하는 회의)에서 “제재 모자를 쓰고는 6자회담에 들어가지 못한다”며 “우리에 대한 비난성명이 나올 경우 (ARF에) 계속 남아있을지 고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처음부터 “미국이 먼저 금융제재를 풀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남순 참석은 김정일의 ‘대외 시위용’

북한이 ARF 탈퇴협박을 함으로써 백남순 외무상이 왜 애초에 이번 회의에 참석하게 됐는지도 궁금증이 풀리게 됐다.

이번 ARF는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이어 열린 회의이기 때문에 북한이 참석할 경우 핵과 미사일, 6자회담 복귀에 대한 회원국들의 우려와 촉구가 쏟아질 것은 뻔했다. 북한 역시 이를 몰랐을 리 없다. ARF는 회원국에 대한 특별한 규제조항이 없기 때문에 불참해도 그만이다. 또 회의 결과에 대한 성명도 문자 그대로 ‘성명’일뿐 유엔 안보리 결의처럼 구속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막말로 회원국들이 모여 ‘잡담’이나 하고 돌아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도 백남순 외상이 굳이 병든 노구를 이끌고 참석한 이유는, 아무래도 김정일의 직접 지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미사일 발사와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이은 외교무대인 만큼, 거기에 가서 미국이 금융조치를 해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더 세게 나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시위하고 돌아오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시위를 하려면 나름의 ‘충격’도 필요하니까 ARF 탈퇴협박까지 한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이번 북한의 ARF 참석은 ‘벼랑 끝 전술’의 연장선에 있으며 ‘대미 강경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김정일의 대외 시위용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 의미

이번 ARF에서의 관심은 유엔 안보리 결의후 북-중관계 변화의 일단을 지켜보는 것이었다.

28일 오후 3시 10분에 열린 ‘장관급 10자회담'(6자회담 5개국+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에도 북한은 끝내 불참했다.

중국의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은 이 회담에 북한을 참석시키기 위해 백남순 외무상을 마지막으로 설득하느라 30여분 가량 늦게 회의장에 합류했다고 외신은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10자회동을 제의한 당사국이 중국이었다고 한다. 중국은 8자회동에서 북한이 제외됐으니, 10자회동으로 넓히면서 북한을 참석시켜 11자 회동으로 가면 자연스럽게 북한의 ‘체면’도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리자오싱 외교부장과 백남순 외무상이 별도로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알 수 없다. 리 부장이 어차피 말을 듣지 않을 북한이니까 그냥 의례적으로 찾아갔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6자회담 복귀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7일 신문에 일제히 보도된, 리자오싱 부장이 백남순 외무상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백 외무상은 리 부장을 계속 바라보고 있는데 리 부장은 ‘의식적으로’ 외면하는 모습이다. 이를 보면 유엔 안보리 결의를 계기로 중국의 ‘북한 다루기’에 일정한 변화가 온 것으로 보인다. ‘설득과 지원’이라는 당근만 아니라 ‘화도 내겠다’는 의지가 있고 나름대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것이다.

금융조치 문제는 접점 찾기 어려워

이렇게 볼 때 이번 ARF의 결과는 1)북한이 외톨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 2)북-중관계의 변화를 좀더 확인할 수 있었으며 3)북한의 역내 평화 위협에 대한 아세안 국가들의 우려를 확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김정일의 입장에서는 1)금융제재 해제가 6자회담 복귀 조건임을 미국과 6자회담 관련국에게 재확인시키고 2)재차 강경자세를 보여줌으로써 벼랑끝 전술을 고조시키며 3)금융제재 해제가 안되면 ‘우리 갈길 간다’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날 리트리트 회의에서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북한은 조건없이, 유보없이 (6자회담에)들어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유엔 안보리 결의에는 ‘엄중한 의무(serious obligation)’가 담겨있다”고 발언했다. 즉 금융제재 해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의 위조달러 제조에 따른 미국의 금융조치는 지난해 9월 중순부터 벌써 10개월째에 접어들었다. 북한은 지난해 말부터 금융조치 해제를 들고나왔다. 그러나 미국은 불법자금에 대한 금융조치는 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 대목에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김정일이 금융조치에 대한 미국의 입장을 과연 제대로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미국의 금융조치는 본질적으로 ‘법적’ 문제다. 따라서 설사 부시 대통령이 김정일을 위해 금융조치를 풀어주고 싶어도 ‘법적’ 문제인 만큼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법을 어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조폭’은 학자들 말 안들어

요는 김정일이 이 대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다. 김정일은 ‘도대체 부시란 자는 미국의 수령이면서 부하들에게 그깟 금융조치 하나 풀라고 명령하지 못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북한은 ‘장군님의 지시’가 법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김정일에게 법이란 애초에 주민들을 다스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 ‘장군님'(수령의 대리인)인 자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일은 속으로 부시의 성의 부족(?)을 계속 탓하고 있을지 모른다.

김정일이 계속 先 금융조치 해제를 요구하는 한 미국이 양보하고 싶어도 양보할 길이 없다. 마찬가지로 김정일은 민주주의 세계의 법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계속 무식하게 나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금융조치를 둘러싼 미-북 갈등은 접점이 없는 평행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 1차 핵위기나 대포동 1호 미사일 사태 때와는 갈등의 성격이 달라졌다.

그러나 국제사회가 김정일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한다면 민주주의 세계의 ‘법치주의’가 ‘장군님의 땡깡’ 앞에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데, 이것이 도대체 말이나 되겠는가.

지금 금융조치를 둘러싼 미-북간의 대립은 본질상 민주주의 세계의 법치주의와 김정일의 땡깡주의가 대립해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향후 누군가 금융조치에 대한 ‘융통성’ 운운하면서 미-북 양자대화를 촉구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대역죄를 짓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6자회담 5개국이 진정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김정일의 땡깡주의의 목줄을 꺾으면서 6자회담장으로 몰아내는 것이다. 김정일이 지하 핵실험을 해도 무시해버리고 미사일을 재발사하면 격추시키며 또 다른 도발을 일으키려 한다면 한미동맹과 다자협의로 사전에 무력화 시키면 된다. 또 적어도 그런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은 지난 50여년동안 한미간 대북 억지력을 바탕으로 튼튼한 안보체계를 구축해 왔고, 이 울타리를 배경으로 고도성장이 가능했다.

또 현재의 중국은 북한의 전쟁도발을 묵인할 수 없게 되어 있고, 무엇보다 김정일은 오로지 개인의 안위가 중요할 뿐이지 전쟁이 중요한 게 아니다. 금융조치 해제 요구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제자금’을 돌려달라는 게 아니라, 김정일이 ‘내 돈 돌려다오’를 고집하고 있을 뿐이다.

지금 5개국이 해야 할 일은 힘을 합쳐 ‘조폭’ 김정일에게 더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폭’은 학자들 말은 듣지 않는다. 오직 더 강력한 힘 앞에 고개를 숙일 뿐이다.

손광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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