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에서 통일의 대강(大綱)에 대한 6·15 공동선언과 2007년 노무현-김정일 회담에서 그 이행방안을 담은 10·4 선언은 통일에 대한 남북의 합의를 담았다. 그러나 한국의 자유민주주의와 북한의 전체주의 간의 국가연합, 연방 등을 통한 평화적 통일이란 본질적으로 자유민주주의의 포기에 있다는 점에서 6·15-10·4 선언에 의한 통일론은 결정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다.
즉 이 통일론은 경제적으로 북한정권을 지탱해주고, 한반도의 통일논의에서 북한의 수령체제가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어 주며, 가능하다면 좌파정권 하에서 남북 국가연합과 연방제를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고 인민민주주의와 수렴 가능한 정치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에 있다. [좌편향 교과서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을 극렬하게 반대하고, 한국의 좌파 정당의 강령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사라진 이유이다.]
사실상 6·15 선언과 10·4 선언의 이행을 부정한 이명박 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도 이 두 선언에 기반한 통일의 원칙이나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6·15-10·4 선언이 자유민주주의 통일로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과거 정권의 통일정책을 단절하지 않고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두 선언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였고, 이점은 나중에 화근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
다른 한편 한국정부가 공식적으로 국회의 동의를 받은 통일론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론’이 유일하지만, 이런 오래된 통일론들은 사실상 분단관리론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즉, 우파 정권의 경우 공식적인 통일론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없고, 남북 간의 이상적(理想的) 우호관계를 전제로 하는 6·15 선언과 10·4 선언을 공식적으로 부정하고 당연히 지향해야 할 자유민주주의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치고 나가지도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역시 분명하다. 북한에 대하여 강경정책을 쓴 적이 없는 이명박 정부조차 남북 좌파의 합작에 의한 선동·왜곡으로 대북강경노선파로 분류되고 있기에, 여론에 민감한 우파 정부는 한국주도와 북한정권의 붕괴를 전제로 하는 통일론을 한국 좌파의 친북적 성향과 우세한 여론 주도 능력에 눌려 공식적으로 천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점은 박근혜 정부의 통일부 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 햇볕주의자인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어정쩡한 태도가 통일부에서 통일정책이 사라지게 만든 원인이다.
좌파의 경우 종교적 교리와 흡사한 6·15-10·4 통일론을 갖고 있지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통일’이라는 말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운 우파의 경우는 차라리 민간 부분의 통일논의가 정부보다 더 활발하고 생산적이다. 우파의 통일론은 일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통일 후의 정치·경제체제로 삼고 있지만, 통일의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다. 그 핵심은 ‘선통일·후통합’과 ‘선통합·후통일’에 대한 논의, 통일의 의미에 대하여 ‘북한주민의 해방과 인권·복리 증진 우선’과 ‘한국이 부담하거나 획득할 수 있는 통일비용과 통일편익’간에 논쟁이 있다.
마지막으로 북핵문제의 완전한 해결은 오로지 통일만으로 가능하다는 주장이 근자에 대두되고 있다. 다행히 우파의 통일론에서 발견되는 이런 차이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하나의 ‘마스터 플랜’으로 조정·통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중요한 점은 우파 정부 하에서는 민간 부분의 통일론과 통일운동이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정부와 민간 부분의 상이한 통일론과 통일운동이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소지가 좌파의 교조적 통일론보다 더 많다.
2014년 1월 6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통일대박론’을 언급하면서 순식간에 한국 사회에 통일 열망을 불러 일으켰다. 이어 박 대통령이 통일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설치할 것을 천명하고, 사회 각계각층의 통일전문가들이 통일의 원칙, 방법 등을 제시하도록 만들겠다고 했다. 또한 3월 말 독일을 국빈 방문하면서 ‘통일독트린’을 발표할 것이라고 한다.
비록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이 통일을 지나치게 경제적 관점에서만 본다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한국 사회에 만연한 ‘통일거부론’을 불식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통일로 가는 구체적 방법은 제시되고 있지 않다. 작년 말 장성택의 처형 이후 급격히 대두된 ‘북한급변사태론’이 박 대통령의 ‘통일준비론’의 계기일 수는 있어도, 그 이후 3개월간 북한정권의 빠른 안정화를 볼 때 박 대통령이 실제로 북한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할 조짐을 확인하였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심상치 않는 징조를 보이는 정보와 첩보가 많다(조태열 외교부 차관)’며 장기적 전망에서 북한급변사태를 언급하는 정도일 뿐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통일위원회나 박 대통령의 통일독트린을 통해서 완전히 새로운 통일론이 제시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왜냐하면 통일의 원칙이나 과정을 제시하는 통일위원회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고 통일의 비전에 대해서 통합되기 어려운 좌와 우가 통일위원회에 같이 동석하리라는 점, 그리고 이미 박근혜 대통령의 ‘한반도 선진화프로세스’에는 통일에 대한 장기적 전망이 있기 때문이다.
짐작하건대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한국이 북한에 많은 지원을 하면서 남북이 서로 신뢰를 쌓아감으로써 조국의 통일을 앞당기자’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통일의 희망’으로 북핵을 제거하고 북한 경제를 재건하여 통일에 이를 수 있다고 보는 사람은, 아마도 박 대통령 자신을 포함해서 이 지구상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통일대박론과 통일위원회와 통일독트린을 통한 평화통일에 대한 박 대통령의 강한 의지표명은 실제 앞으로 닥칠 한반도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원려(遠慮)의 포석이라고 보인다.
북한이 어떤 평화통일을 원하는지는 사실 왕재산 재판에서 이미 드러났다. 북한 통전부는 간첩단 왕재산에게 2011년 2월과 5월 민노당이 주축이 되는 통합진보당의 강령을 김일성이 1945년 10월 북한의 여러 정파를 흡수하기 위하여 내세운 ‘진보적 민주주의’와 그 주요 내용으로 채울 것을 지령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점은 한국 좌파가 연대를 하여 정권을 잡으면 한국의 정체를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의 중간 정도 되는 정치 체제, 예를 들어 진보적 민주주의를 내세워 한국사회를 북한과 비가역적으로 묶어버리는 전략이다. 실제로 이것이 민주당과 통진당의 야권연대가 시도한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의 통일정책이었다.
통일이란 원래 하나의 공동체가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엇이 지속적으로 남고, 무엇이 사라져야 하는가는 통일의 의미와 전체 과정을 결정하는 관건이다. 물론 우리는 통일의 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남아야 하고, 수령주의 전체주의와 망가진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사라져야 한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인류의 역사에서 선험적으로(a priori) 그 정당성이 입증될 수 있는 유일한 정치체제이고, 경험적으로도(a posteriori) 이미 인간의 자유를 보장하는 유일한 체제임이 증명되었다. 시장경제는 현재 세계화된 지구촌에서 한 국가가 생존하려면 반드시 지향해야 할 경제체제이다. 이 두 체제 이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바꿔 말해 북한의 현 수령체제가 사라져야 바른 통일의 과정이 시작되고 또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간의 기능주의적 통일방안에 대한 현란한 수식(修飾)은 모두 분단관리론의 차원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 실제 통일의 과정에서는 허식(虛飾)에 불과할 뿐이다.
언론의 통일에 대한 여론 조사에 빠지지 않는 것이 ‘흡수통일 대 합의통일’ 간의 선택이다. 먼저 흡수통일이란 독일 통일과정의 초반기에 몇몇 좌파인사들이 쓴 표현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흡수통일’이란 표현은 사용하지 않고, ‘편입에 의한 통일’이라고 부른다. 동독이 스스로 국가해산을 하고 통일협상을 통해 서독의 헌법체제로 편입함으로써 독일 통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 통일에 대하여 흡수통일이란 표현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통일의 과정이 아니라 오로지 통일 후의 체제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고 한국의 좌파는 흡수통일이란 표현을 도입하여 독일통일이 서독이 일방적으로 동독을 강제로 병합한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통일을 흡수통일이라 비판한 것이다.
문제는 이점을 한국의 주요 우파 인사들도 무조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통일이란 원래 존속하는 체제가 있고 사라져야만 하는 체제가 있다는 점에서 대부분 흡수통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합의통일이란 통일의 과정에서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인 합의를 통해서 통일에 이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독일통일은 흡수통일이자 합의통일이다. 문제는 한국에서 합의통일을 단순히 통일의 과정이 아니라, 북한의 김씨 정권과의 합의를 전제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의미하는 흡수통일은 일방적이고 비평화적이며, 김씨 정권과의 합의를 통한 통일은 평화적일 것이라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흡수통일은 나쁜 것, 합의 통일은 좋은 것이라는 잘못된 통념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한국의 우파는 합의를 통한 평화적 방법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의 흡수통일을 지향함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왜냐하면 김씨 정권과 합의통일의 유일한 결과는 자유민주주의의 포기에 의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의 김씨 정권이 사라져야 한다. 김정은 정권의 붕괴가 북한급변사태를 의미한다면 이점은 평화통일의 필요조건이다. 문제는 한국이 북핵으로 인해 북한의 급변사태를 무한정 기다리고 있을 수가 없다는 점이다. 만일 북한이 제4차 핵실험과 새로운 ICBM 발사에 성공한다면, 아마도 우라늄을 원료로 하는 핵탄두 소형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은 한반도의 군사균형을 크게 흔들어 놓을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이 핵을 보유한 북한으로부터 겁박당하면서 통일을 당할 가능성은 분명 존재하며, 어쩌면 결코 낮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에서 통일이란 ‘Blue Korea 대 Red Korea’ 간에 생존을 건 마지막 경주가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지면 한국은 ‘북한에 급변사태가 발생하면 그때 상황을 봐서 통일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통일의 기회를 놓쳤음을 의미한다.
북한의 급변사태는 북한이 시작하고 한국이 만들어야 한다. 북한이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급변사태의 원인 제공은 북한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이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북한이 핵무기로 한국의 안보 전체를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그 급변사태의 뇌관은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새로운 ICBM의 발사다. 양자 모두 UN 안보리의 제재사항으로 북한이 해서는 안 되는 행위다.
즉, 한국은 북한의 4차 핵실험이나 ICBM 철거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철거의 핵심은 UN을 통하여 북한을 경제적으로 완전하게 제재하고, 남북경협 전면 중지, 북한의 외교적 고립, 그리고 중국의 북한지원 중단이 될 것이다. 이때 중국이 북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지 않을 경우, 한국으로서는 중국의 국가이익에 반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독일 통일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북한 정권의 철거를 놓고 중국과의 밀고 당기기는 피할 수 없는 통일필수 과목이다. 만일 중국이 북한에 자국민과 기업의 보호를 명분으로 군사적 개입을 감행하려한다면 중국은 소정방(蘇定方)의 기억을 되살려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