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간부들은 비상구가 없다”

▲ 구소련 체제전환 당시 모습

1980년대 말까지 공산주의의 몰락을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볼셰비키의 맹렬한 폭력을 통해 정권을 잡은 공산세력이 정권을 끝까지 무장으로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자연스러운 판단으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구소련 해체를 초래한 1991년 8월 쿠데타사건은 무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적어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희생됐던 소련 체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 이 사건에서 사망한 사람은 단 3명밖에 없었다.

다른 공산권 국가도 비슷했다. 공산당 지지자들은 무장으로 자기 체제를 지킬 것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루마니아를 제외하면 민주화 운동은 대체로 무혈적으로 이룩되었다.

1990년대 초에 들어와 공산주의 사상은 ‘자연사’ 했다고 할 수 있다. 수십 년 동안 약속했던 ‘유토피아’를 기다린 공산권 사람들은 자기 생활을 자본주의 사람들의 생활과 비교하면서 공산주의 약속에 대해 희망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1930~1950년대의 공산주의자들은 자기 사상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거나 스스로 희생될 의지가 있었는데, 1970년~1980년대에는 공산당원 중에서도 이러한 사람은 없었다.

구소련 간부들, 체제전환 뒤 자본가 변신 유리

그러면 공산 체제를 통제하고 이 체제에서 특혜를 받았던 간부 계층은 어떨까? 그 사람들은 왜 ‘반공혁명’을 반대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공산당 간부들도 자기 체제의 비효율성을 깨닫고 이에 대해 실망했다. 다른 이유는 그 사람들이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면 자기 이익을 보장받을 뿐 아니라 더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규모가 비슷한 회사를 운영한다고 할 경우 공산주의 체제의 ‘지배인’과 자본주의 체제의 ‘사장’ 중 누가 더 잘 살게 될까? 물론 자본주의 사장이 더 잘 살게 된다.

지배인은 낮은 월급으로 살아야 하고 뇌물 등 비합법적 방법으로 돈을 모을 수 있다고 해도 위험한 처지에 빠질 수 있다. 또 열심히 일해도 정치갈등과 암투 때문에 언제 물러날지 알 수 없다. 지배인은 자기 유산을 자식들에게 상속으로 남겨 줄 수도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간부 계층은 국가가 임명하는 ‘지배인’ 신분에서 자기 소유 재산을 마음대로 관리할 수 있는 ‘사장’이 될 것을 희망했다. 뜻밖에도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는 상황 하에서 이러한 변화가 가능해졌다. 공산주의 후기에서 간부만큼 자본가가 될 수 있는 조건이 좋은 사회 계층은 없었다.

국가소유 기업, 주인없는 무주공산

1990년대 시장화 과정에서 생긴 신흥 러시아 자본계급은 누구였나? 거의 다 간부 출신들이다. 공산당 간부들도 있고, 고위 군관들도 있다. 또 특무기관 출신도 있다. 하지만 국영 공장이나 회사 경영자 출신들이 제일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다른 공산권 국가들도 대체로 비슷하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유화를 실시할 때 회사나 공장의 소유권을 불하받기 제일 쉬웠던 사람들이 공산주의 시절 공장을 경영했던 간부들이었다.

1990년대 초는 구소련 간부들이 국가소유의 재산을 대규모로 훔치는 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들이 국가재산을 사유화 하는, 즉 훔치는 방법도 다양했다.

주식화 과정에서 주식을 헐값에 구매하는 방법도 있었고 ‘노동단체’의 이름으로 소유권, 경영권을 잡은 후 자기 소유로 바꾸기도 했다. 국영회사 산하에 ‘독립채산제 회사’로 위장한 개인 회사를 만들고, 값이 있는 시설들을 개인회사에 헐값으로 ‘판매’한 다음, 완전히 독립 개인회사로 전환하는 방법도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간부 출신들은 특권을 유지했을 뿐 아니라 더 강화했다. 한 미국 사회학자는 “그들의 승리는 확실하다. 2001년 구소련 특권층 출신들은 10년 전 간부생활보다 저개발국이 된 러시아에서 더 유복하게, 더 안전하게 살고 있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변화를 환영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소련의 간부들이 자본가로 바뀔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평화스러운 몰락’에 기여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 간부들은 자신의 특권을 무장으로 지키기보다 오래 전부터 믿지 않던 공산주의 사상을 내던지고 다른 편으로 넘어간 것을 더 합리적인 전략으로 판단했기 때문에 구공산권 국가들은 폭력혁명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북한 간부들, 남한 부담스러워 할 것

그러면 앞으로 북한의 경우는 어떻게 될까?

문제는 북한의 간부들이 이러한 기회를 맞을 경우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 데 있다. 김정일과 간부들은 시장개혁이 독일식 흡수 통일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남한에 의해 흡수가 되면 현재 북한에서 간부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동유럽의 경우처럼 자기 재산과 실권을 가질 기회가 없어질 것이다.

흡수통일 이후 북한에서 시장경제를 건설할 세력은 하루아침에 ‘민주주의자’로 바뀌게 되는 노동당 간부들이 아니라 남한의 ‘삼성’이나 ‘현대’ 경영자들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북한 간부들은 자기 통제 하에 있는 국영공장들을 훔친다고 해도 자본과 경험이 훨씬 많은 남한 기업과 경쟁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북한 간부들, 특히 보위부나 군 간부들은 재산만 걱정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신변문제까지 걱정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1979년 캄푸치아의 ‘붉은 크메르’ 몰락 이후 가장 참혹한 공산주의 독재로 볼 수 있는 김정일 정권은 셀 수 없는 많은 죄를 저질렀다. 지은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 조사할 수도 없을 것이고 죄의 일부만 노출되어도 감옥에 가거나 사형되는 것까지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김정일 체제 하의 북한 간부들은 ‘비상구’가 없다. 남한이라는 존재로 인해 흡수통일의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소련 체제전환의 경우처럼 자본가로 변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의 자유마저 박탈당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개혁이나 자유화를 피하고 자기 체제를 끝까지 지킬 의지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스스로를 자본가로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지금 일반 주민들은 더 오래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안드레이 란코프/ 객원칼럼니스트(국민대 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 -주요 저서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