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핵무기를 포기할 수 있을까?

흔히들 묻는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가능성이 있냐고. 묻는 이들조차 실은 답을 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다고.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북한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면 하나의 질문만이 남게 된다. 그럼 북한의 핵 위협에 우린 어떻게 해야 하냐고. 이에 대해선 답이 엇갈린다.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북한과의 화해와 협력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냐는 질문은 애초에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Yes’나 ‘No’를 듣기 위함이 아니라 핵 위협에 ‘어떻게’ 대처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묻는 고차원의 질문이었던 것이다.


미국이 갖고 있는 세계 최고수준의 핵 무기에는 별반 위협을 느끼지 않는데, 아직은 조악한 북한의 핵에는 왜 민감해지는 걸까?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북한이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어쩌면 이 ‘당연하다’는 직관을 분석해 봐야 상황이 명료해지지 않을까? 핵 무기 자체에 내재된 위험도는 사실 객관적인 것이다. 그것이 질 낮은 핵이든 고품질의 핵이든 위험이란 측면에서는 등가적이다. 핵 위험 자체는 상수와 다름없다. 그런데 그러한 위험을 위협으로 ‘인식’하는 것은 대단히 주관적이다. 그리고 (상대방과의) ‘관계’에 종속적이다.


그러면 핵 위협에 대한 질문은 인식과 관계의 문제로 치환된다. 남북관계가 더없이 좋다면 북핵에 내재된 위험도와 위협의 인식수준은 상대적으로 낮아질 것이다. 그럼 남북관계는 어떻게 해야 좋아질까? 달라도 너무 다른 체제와 친해지는 것이 어디 간단한 일인가? 북한이 원하는 대로만 해주는 것이 화해이고 협력일리는 만무하다. DJ정부시절 ‘형님론’으로 대국민 설득이 이뤄지기까지 했다. 좀 잘 사는 형님이 못 사는 동생네 형편 좀 들어주면 어떠냐는 것이 골자이다. 그러나 그 동생(북)은 형(남) 몰래 핵 무기를 개발했다는 원죄가 있다. 애초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무기를 만들어 생긴 위협을, 새삼 관계개선을 통해 그 위협이 완화될 수 있다는 처방은 근본적 처방이 아니라 대증요법(對症療法)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잘잘못만을 따지는 것은 난세를 극복할 현명한 처세는 못되는 법.


상황을 분석해 해결의 방향을 찾는 일은 그래서 포기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신뢰프로세스’라는 원칙 제시는 발상의 전환인 셈이다. YS정부 이후, 실종됐던 통일정책의 복원이라는 함의도 있다. 그 자리를 대신했던 대북정책을 제자리로 돌리겠다는 이해가 깔려 있다. 실상 공은 북한에 있다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핵 위험이 객관적인 상수로 남아있는 한 핵 위협은 결코 제로가 될 수 없다. 그리고 전 세계 핵 비확산 규범은 평화적 핵 이용 외의 그 어떤 핵 개발도 용납하지 못한다. 물론, 비확산 체제 자체가 흠도 많고 완전치 않지만 말이다.


핵 위협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의 문제는 북한은 변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변하지 않는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 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지도자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할까? 역사적 제도주의라는 것이 있다. 간단히 말해 사건 자체 보다 사건이 일어난 맥락을 들여다 보고, 사건과 사람의 행태와 흐름을 ‘경로의존성’이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풀어내고자 하는 일군의 지적 노력을 일컫는다. 여기에 북한을 ‘대입’해 보면 어떨까? 북한의 제도와 정책도 경로의존적일까?


그렇다면 경로의존적일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매개변수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북한사회처럼 인간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는 무엇이 그 체제의 지표가 될까? 바로 ‘이념’이다. 북한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지배(지도)이념이야말로 북한의 삶과 정체성을 규정한다. 따라서 지도자의 의지도 이념에 종속된다. 이념을 뛰어넘는 (정치적)의지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이런 체제가 기존의 제도(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를 바꾸는 계기는 전쟁이나 경제난 같은 제도 바깥의 변수가 경로를 이탈할 동인이라는 것이 역사적 제도주의가 내리는 진단이다.


오늘날 북한은 핵을 추구하던 김정일 시대에서 사실상 핵을 보유한 김정은 정권으로 바뀌었다. 핵이 제도 안으로 내재화됐다.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노선’은 이 점을 공식화한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북한이 핵을 포기하기란 더욱 요원한 일이다. 현재의 북한은 완전한 핵 확산, 곧 수직적 확산의 경로에 들어서 있다. 수직적 확산이란 핵탄두의 경량화, 소형화의 완성과 다름없다. 시간과 비용의 문제일 따름이다. 북핵 불용이라는 과제를 달성하기 위한 현실적 처방은 이 시간과 비용을 더디고, 늘리게 만드는 길 밖에 없다.


그러려면 북핵의 위험성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모순이 있다. 앞서 설명한대로 핵 위협의 인식은 상대방과의 관계성에 반비례한 것인데, 핵 위협의 인식 수준을 높여야 한다니 앞뒤가 안 맞는 말 아닌가? 이런 모순이야 말로 핵 문제의 역설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결국 관계개선형 정책이든, 핵 위협 인식증가형 정책이든 양자는 제로-섬(zero-sum) 상태에 놓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북핵 대응 전략의 곤란함은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한다. 쉽사리 이러지도, 저러지도 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교착상태(stalemate).


북미 양자협상이건, 6자회담이건 최근 20년 간 북한 핵의 역사는 과감한 ‘당근'(유인책)을 통한 핵 의지의 무마 시도가 실패였다라는 교훈을 남겼다. 다시 이 실패한 협상경로로 들어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시도한다면 그건 진정성 없는, 다른 의도를 목표로 한 정치적 포장일 뿐이다. 북한이 걸어온 이 견고한 경로의존의 길은 어떤 종착지에 다다를 것인가? 선택지가 별로 없는 남한으로서는 모순임을 알지만 이 방법, 저 방도를 쓸 도리 밖에 없다. ‘한반도신뢰프로세스’는 그 고육지책의 산물이 아닐까? 적어도 MB정부의 대북정책의 기조였던 ‘비핵개방3000’이 갖는 조건적이고 단기적이며 결과중심적 사고관을 걷어냈다. ‘신뢰’라는 두리뭉술하며 쉽게 가늠하기 어렵지만 분명히 포착되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한반도 통일정책으로 북한을 설득(?)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애초의 질문으로 되돌아간다. 북한은 핵을 포기할까? 아니다. 그러나 핵을 포기할 만한 역사적 조건과 현실적 맥락을 만들어주려는 시도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북한의 공식적 이념에 가시화될 때에야 비로소 조금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봐야한다. 적어도 북한과 한 번의 이례적 사건이나 한탕주의적 관계호전으로 상황을 낙관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는다면, 지난 20년간 북핵 ‘실패사’가 남긴 교훈을 통해 뭔가 ‘개선’이 있었다고 훗날의 역사는 기록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