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문제가 답보상태에 빠질수록 더욱 주목 받는 나라가 있으니 바로 중국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절묘한 수사로 중국과 북한의 특수성을 전세계에 알린 노회한 국가원로들이 포진해 있는 국가, 그 중국을 둘러싸고 요즘처럼 구구분분 해석이 다양해지는 때는 일찍이 없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하는가? 누구의 해석이 맞는가? 동북아에서 북한은 계속해서 중국의 ‘입술’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최근 중국의 대북입장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첫째, 중국변화론. 북중 관계가 혈맹이 아니라 보통국가 관계로 변하고 있다는 낙관적(?) 전망이 주를 이룬다. 둘째, 시기상조론. 북한은 여전히 중국의 ‘전략적 자산’이란 지위에 있다는 현상유지적 시각이다. 이 중간에 놓인 조심스런 입장이 중국의 대북인식은 변하고 있으나 지금은 그 변곡점의 정점에 있으며 향후 북한의 행동에 따라 그 방향성이 바뀔 것이라는 동태적 관점이다.
무엇이 옳은가?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중국변화론으로 나아가는 동태적 관점이 현실적 시각이지 싶다. 국가의 이해관계란 영구불변의 철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드러난 현상에 대한 해석 중 무엇이 맞을까라는 정답 찾기가 아니라 이 배후에 있는 매커니즘과 원인과 그 방향성에 대한 근원적 이해일 것이다. 그 바탕엔 동북아시아라는 특수한 맥락에서 중국이 역사적으로 누리고 있는 지역적 시대적 특징에서 잉태된 정치적 위상이 한 몫 한다. 세계사적인 깊은 통찰을 요구하는 지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최근 20년간 경제적으로 G2의 위치에까지 급부상한 국가가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공산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체제. 강력한 이웃들과 맞닿아있는 지리적 공간에서 6억 인구를 가진 그 큰 땅덩어리의 중국 자신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해야 하는 절박함. 중국이 아니라면 결코 가질 수 없는 이런 특별한 행간 속에서 중국의 대북 영향력은 피어 오른다.
따라서 중국 전문가들은 중국의 대내외 정책을 크게 4가지 키워드(4C)로 정리하곤 한다. 첫째, China(중화). 둘째, Communist Party(공산당). 셋째, Commerce(무역). 넷째, Control(통제). 오랜 세월 아시아를 지배한 이념은 ‘중화사상’이었다. 중국의 것이 ‘최고’라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동아시아에 만연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그 ‘중화사상’의 현대적 변용일 따름이다. 그들은 진작에 중국대륙에게 민주주의란 맞지 않는 옷이란 결론을 내렸다. 중국 정부가 반부패 전쟁을 공식화한 것은 투명한 제도개선이 목적이 아니라 공산통치의 효율화를 담보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일 뿐이다.
동시에 일당독재의 비민주적 정치체제가 영속하기 위해선 배 고픈 인민의 아픔을 해결해줘야 했다. 중국은 경제적으로는 이미 그 어느 곳보다 더 자본주의적이다. 그들의 주된 돈벌이는 세계와의 교역이다. 자원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깃발을 꽂고자 한다. 빈곤에서 비롯된 혼란이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 이미 50년 전 집단 아사자를 기록한 대약진 운동과 문화혁명이란 비싼 수업료를 통해 뼈저리게 배운 그들이다.
심지어 역사를 고쳐서라도 자신의 안위와 정당성을 공고히 하려는 유일한 나라이다. 그만큼 자원과 상황에 대한 통제욕구가 강력하다. 한마디로 중국은 환경과 시간을 통제하며 전세계 교역을 통해 경제를 키워나가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형태인 중국식 공산독재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는 필사적 노력을 한다. 이것이 중국이 지키고자 하는 제1의 국가이익이다. 중국은 이에 반하는 모든 외부의 행동에 반대할 것이다.
한때는 중국의 입술이라던 북한이 지금 중국이 안고 있는 치명적 이익을 건들고 있는 셈이다. 북핵문제가 확산되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이 중국의 4C가 돼버린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될 판이다. 바로 이 지점에 중국이 통제·발휘하고자 하는 영향력의 크기가 있다.
그렇다면 한중, 북중, 미중 관계에서 중국은 누구 편일까? 아니, 냉정한 국제관계에서 누가 누구의 편이라는 인식이 맞긴 하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더라도 중국은 이미 자기 자신의 편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어느 전문가의 중국 들여다보기가 가장 정확한 것일까? 중국의 국가이익적 입장에서 중국의 대외 행간을 읽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중국은 오직 자기필요에 의해 한국도, 미국도, 일본과도 친해질 수 있다. 물론 어느 나라도 이런 (이기적) 선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렇더라도 유독 중국은 자신의 이익에 경직돼 있을 수 밖에 없는 독재국가란 점이 동북아시아 세력구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이다. 국가로 대표되는 사회(조직)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비도덕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진작에 규명됐다. (‘도적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라인홀트 니버, 1932)
지난 30년 간 대외적으로 천명된 중국의 대외정책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패권의 추억이다. 등소평의 중국은 재능을 숨기고 힘을 키우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중국이었다. 20년의 절치부심 끝에 후진타오는 필요하면 나선다는 ‘유소작위(有所作爲)’로 발전시켰다.
5세대 지도자라는 시진핑은 2010년 10월 3대 발전론을 제시했다. 안으로는 과학, 조화를 통한 협력발전을, 밖으로는 평화, 개방을 통한 협력발전을 지향하겠다는 공표였다. 앞선 선배 지도자들의 표어를 모두 함축한 종합완결판이 아닐 수 없다. 축적된 자신감의 결과다.
국가적 난제는 가장 많되 힘은 떨어져 한 켠으론 가장 불행한 국가주석이 될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을 받고 있는 현재의 시진핑이지만, 중국은 언제나 개인기보다는 지도자 그룹의 집단지성에 기대해 급격한 개혁이 적다 하더라도 1980년 대 이후 실패의 가능성은 현격히 줄었다. 그저 희망뿐인(wishful thinking), 어설프고 섣부른 ‘중국 읽기’는 개인적 차원에서야 어리석은 독법(讀法) 정도일 테지만, 국가적으로는 어리석음을 넘어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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