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존 메릴 동북아국장은 18일(현지시간) 북한 내부 정세에 대해 “매우 느리지만,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에 변화를 일으키는 개혁이 하향식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메릴 국장은 워싱턴 시내 윌라드 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와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공동주최 세미나에서 “국무부나 INR을 대표한 게 아니라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이같이 말했다.
그는 “북한 지도부는 너무 급격한 변화의 위험을 예민하게 의식해” 주기적으로 외부세계와 접촉 통제를 강화하는 조치를 취하지만 “이러한 강력한 사회통제 메커니즘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느리긴 하더라도 계속 경제개혁을 추진해나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같은 진단과 분석은 최근 북한 내부의 이상동향을 근거로 한때 일부 외신에 홍수를 이뤘던 북한 김정일(金正日) 권력 이상설이나 붕괴 임박설, 개혁 후퇴설 등을 간접 반박한 셈이다.
북한 내부 정세를 어떻게 인식하느냐는, 핵문제를 포함해 전반적인 대북 정책 방향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메릴 국장의 인식이 미 행정부 내부에서 얼마나 공유된 것인지 주목된다.
그는 이날 개성공단에 관한 얘기 중 “개성에서 열린 남북대화에 큰 돌파구가 없다는 언론보도를 봤으나, 중요한 것은 10개월 이상 중단됐던 남북대화가 재개된 점”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다음은 메릴 국장의 분야별 북한 내부 정세 진단 요지.
▲정치 = 오늘날의 북한은 20~30년전의 북한이 아니다는 변화의 시각에서 북한을 봐야 한다.
내각을 보면, 박봉주 총리의 활동이 돋보인다. 전임자들보다 자주 김정일(金正日)을 수행하는 장면이 북한 언론에 나타나고, 혼자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북한 군, 당, 내각의 권력서열 변화를 읽어내기는 어렵지만, 박봉주 총리 아래서 경제 각료의 서열이 다소 올라갔다.
올 가을 노동당 창당 기념일을 앞두고, 이를 계기로 후계관련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일부 있으나, 나는 아직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북한 언론 보도를 보면 김정일이 (김일성의 유훈정치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정치적 위상(persona)을 확립하려는 움직임이 다소 분명하게 나타난다. 북한 언론은 점점 더 많은 일을 김정일의 업적이라고 선전하고, 아버지에게로 돌리지 않는다.
▲경제 = 북한의 경제는 제2경제위원회가 관장하는 군사경제를 비롯해, 과거로부터 이어온 사회주의 경제, 새로운 시장경제 등 다중 경제체제다.
이들 경제는 그러나 수직적으로 병존하는 상황이며, 각 부분 경제간 수평적인 교류는 없다.
북한은 상당한 인플레난을 겪고 있는 것 같다. 비공식 환율이 지난 수년간 1달러당 250원대에서 2000원대가 됐다.
북한은 외국인 투자와 기술을 절박하게 원하고 있다. 국가의 주 수입원이었던 제조업의 붕괴로 국가재정에 여력이 없다. 최근 공중보건 분야에서 한방을 부쩍 강조하고 있는 것도 서양 의학에 들일 재정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 경제는 매우 심각하고 암울한 상태다. 수다한 난국을 지나오면서 (회복을 위한) 탄력과 힘이 남아 있는지 의문스럽다.
북한 경제는 대외 의존적인데, 외부의 지원 제공자들이 지친 상태다. 북한 경제의 진전과 변화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부 진전과 변화 있음을 부인할 수 없으나 매우 느리다.
북한은 2002년 7월 경제개혁 조치를 취했다. 그에 앞서 내가 이를 전망했을 때 외부 관측통들은 회의적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개혁조치가 취해졌음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개혁조치가 하향식이라는 데 초점을 맞춰 보고 있다.
임금, 가격체계, 화폐, 배급체제 등에 대한 개혁 조치로 주민 개인들의 행태 변화가 일어났다. 가판대가 평양 등 주요 도시에 등장했다. 가판대가 개인 자본인지 어떤 조직의 경제활동 도구인지는 불확실한데, 후자일 것으로 생각되나, 주목할 경제활동인 것은 사실이다.
북한의 한국과 중국에 대한 수출이 늘고 있으나, 해산물, 농산물, 원료가 주된 수출품이며 공장 생산품은 별로 없다. 이는 제조업 분야의 실업 상황을 시사해준다.
북한의 경제개혁 조치가 산업생산을 증가시키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개성공단은 매우 흥미로운 양상이다.
북한 언론에 따르면 농업분야에서도 개혁조치가 취해지는 것 같다.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가족기반 농업체제 방향으로 제도구조적 변화가 이뤄지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가족책임 소농 시스템을 닮았다. 그러나 아직 생산량이 크게 늘었다는 징후는 없다.
▲사회 = 인권문제는 여전히 큰 문제다. 좀 덜 가혹한 새 형법이 도입됐으나 실제 준수되는지는 모른다.
북한 정권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경제 개혁이 주민들 사이에 사고방식과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오지만, 대신 승자와 패자를 낳음으로써 사회적 차별이 첨예화하고 있다. 특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격차는 불이익을 당한 계층의 분노를 키울 수도 있다.
분명히 북한은 폐쇄사회이나, 밀봉된 사회는 아니다. 외부에서 정보가 유입되고 있고 최근엔 유입량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 결과 북한 정권은 이를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접촉 차단 조치를 강화하거나, 언론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부르주아 생활방식을 비판하고 있다.
북한은 시간이 잊혀진 땅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다.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