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엔 성폭력 없다? 한심한 소리…

지난 아시안게임의 북한 여성응원단(사진:연합)

한국에 와서 몇달 안 되었을 시절, 어느날 북한문학 전공 교수님이 “북한엔 성폭력 없지요?” 하고 확인에 가까운 질문을 해오셨다. 성폭력? 한국에 와서 몇번 들어본 말이긴 한데 아직은 귀에 생소했다. 하지만 그 뜻은 가늠이 되었다. 뒤에 붙은 ‘폭력’이라는 두 글자의 효과 탓이었다.

“예. 없습니다. 북한엔 생활총화제도가 엄격한데 그렇게 해서 배겨냅니까?” 대답을 하고 보니 성폭력이 없어 여자로써 몸을 순결하게 지킬 수 있는 사회에서 왔다는 자부심 같은 것이 나를 뿌듯하게 했다.

하지만 한국 정착 3년쯤 되었을 때 별안간 북한에서 내가 당했던 성폭력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그 소중한 자부심이 난데없이 날아가버렸다. 대학원 공부 3학기째라 성폭력의 구체적 형상이 인지되고 바닥에서 헤매던 나의 건강상태도 어느 정도 회복된 시점이었다.

운명도약을 원하는 여성을 기다리는 ‘블랙홀’

내가 평양 제2자연과학원(국방과학) 출판사에서 필사공(筆事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마침 <평양신문>에 첫 시를 발표하여 나는 출판사 직원들로부터 은근한 각광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사회에 첫발을 디디면서 시작된 노동당 입당 열병(熱病)을 그 해에도 앓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영광스러운 조선노동당원이 될 수 있을까?’

오랫동안 모색 끝에 찾은 생각이 당시 진행 중이던 주체사상탑 건설현장에 내 개인적으로 식량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만 1년 반 동안 점심 한 끼씩을 먹지 않고 모은 식량 50여kg분의 식량권을 당 조직에 바쳤다. 주체사상탑 건설현장에 나의 명의로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비서는 “그러지 말고 인민반 배급소에 수매한 뒤 그 영수증을 당 조직에 바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고 나에게 조언을 주었다. 당시 북한은 전당적으로 식량수매사업을 맹렬히 진행하는 중이었고 모든 당 일꾼들의 사업성과는 그의 휘하에 있는 기관 종업원들의 식량수매 양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초급당 비서의 속내를 깨달은 나는 곧장 밥공장으로 가서 50여kg의 양권(糧券)을 증기빵(찐빵)으로 전부 바꾸었다. 김이 솔솔 나는 밀가루 빵이 든 큰 여행가방을 양손에 들고 낑낑대며 걸어가 출판사 옆에 위치하고 있던 ‘주체사상탑 건설돌격대 강원도 여단지휘부’ 정치분과에 송두리째 바쳤다.

그곳 일꾼들은 나의 행동에 그렇게 감탄할 수가 없었다. 취사원을 불러 이밥에 푸짐한 고기국으로 나를 잘 대접하더니 빵을 담아갔던 가방에 우리 아버지가 해방 후로는 처음 맛보았다고 평가한 고급건어물을 가득히 담아주었다. 뿐만 아니라 나의 주체사상탑 건설지원 사실을 제2자연과학출판사 당위원회에 통보까지 해주었다. 마땅한 정치적 평가를 해주라는 뜻이었다.

입당을 원하는 여성을 기다리는 검은 그림자

일이 이렇게 되자 출판사 초급당 비서는 어차피 나를 입당 대상으로 지목한 듯했다. 나는 드디어 초급당 비서의 부름을 받았다. 세포비서의 인솔하에 초급당 비서의 방에 들어섰다. 창가에 어둠이 짙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정상 퇴근시간이 밤 10시였던 시절이어서 특별한 기미도 느끼지 못했다. 마침 정전까지 되어 초급당 비서의 방은 사람 형체나 알아볼 수 있을 지경으로 어스름했다.

세포비서는 초급당비서에게 “최진이 동무를 데려왔습니다”라고 보고하고는 전기불이 나가버리자 서 있기가 뭣했던지 “저는 돌아가겠습니다”하고 자리를 피했다. 당황한 초급당 비서는 “으응, 그러오” 하고 무의식적으로 승인해버렸다. 그는 혼자 말처럼 “불이 왜 갔나?” 하며 밖으로 나가더니 2분도 못되어 다시 들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긴장되었다. 그가 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너 요즘 어떻게 살아?”라는 초급당 비서 특유의 혀짧은 말소리와 함께 그의 손길이 내 잔등가를 머뭇거렸다. 온 출판사에 소문날 정도로 힘들었던 내 가정형편에 대해 일절 아랑곳없던 사람이 갑자기 관심을 보여오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가 안 잡혔다.

이윽고 그는 내가 확실한 결단을 내리고 마땅한 대처를 취할 수밖에 없는 행동을 가해왔다. 다시 이어지는 떨리는 음성과 함께 그의 커다랗고 힘있는 손이 내 가슴을 압박해온 것이었다. “으악!”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나는 출입문을 박차고 당비서의 방을 뛰쳐나갔다.

나의 그 모습은 초급당 비서를 몰아낼 계획 중에 있던 부사장에게 발견되었고 결국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초급당 비서를 해임시키는 결정적 단서로 이용되었다. 초급당 비서는 출판사의 예쁜 처녀들을 그런 식으로 범하고는 입당시켜주곤 했다고 하였다.

출판사 편집부 필사공, 이른바 화이트칼라였던 나의 직종은 한 울타리 내의 인쇄공장 노동자, 즉 블루칼라 직으로 하강되었고 그 사건은 나의 입당 욕망에 종지부를 찍었다.

여성의 체념 조장하는 남성위주 사회문화

내가 지방에 살던 중학교 4학년 1학기 시험기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혁명역사과목 담당교원(결혼남성)이 당신의 집에 재시험 대상자들(학급 간부들인데 성적이 약한 과목을 재시험 보아 우등생으로 만들어주려는 학교측의 의도가 있었음)을 몇 불러놓고 시험을 치르도록 했다. 이때도 전기가 가서 촛불을 켜놓았었는데 그 혁명역사 선생이 내 친구 옆에 붙어 앉아 모범답안지를 앞에 펼쳐주고는 그 친구의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덩치 큰 우리 여학생들은 다음 혁명역사시간이 돌아오자 선생을 힐끗거리고 애매한 질문을 하고 킥킥거리는 것으로써 항의했다. 물론 그 주동자는 나였다. 설사 내가 아니라 해도 나는 학급장(반장)이었으니 그 책임은 전적으로 나의 것이었다.

혁명역사 선생의 나를 향한 눈매는 싸늘해지기 시작했고 그 눈길은 우리학급 담임이었던 여선생에게까지 전도되었다. 결국 내가 평양으로 이사올 때 나의 전학증명서에 “학습은 최우등생이다”는 한마디 말 외에 한 페이지 전부를 온갖 험담과 결함으로 내 생활을 평가해버린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그 전학증명서를 그대로 들고 평양시 학교에 입학하러 갔을 때 그 학교 행정부교장이 “이런 불량학생을 우리 학교에서는 도저히 받을 수 없다”고 선언했을 정도였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는 역시 혁명역사 담당이었던 남자총각 선생이 캠프에 가서 우리반 친구(당시 북한 학교에서 성별을 구분하여 학급을 구성하였으므로 필자의 학급은 전부 여자들이었음) 옆에 누워 자며 몸을 만진 사실이 사건화되어 교직에서 해임당한 일도 있었다.

“그것은 성폭력이었다”

북한에서 성폭력! 이는 운명의 도약을 원하는 여성들은 거의가 통과해야 하는 블랙홀이다. 나는 22살에 초급당 비서에게서 성폭력을 당한 후 10여 년이나 그 일을 두고 고민했다. 내가 당한 피해는 뒷전이었다. 혹시 생활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아니면 현실 대처능력이 미약해 한 인간(초급당 비서)의 운명에 흠집을 남긴 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 나의 고민거리였다. 그러다 답을 못 찾은 채 내 기억 속에서 그 일은 잊혀지게 되었다.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그 사건이 문뜩 떠올랐다. 초급당 비서의 행위는 ‘성폭력’이었으며 성폭력 범법자는 마땅한 제재를 받는 것이 정의라는 이치를 깨닫게 되는 순간, 내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30년 넘도록 가슴속에 남아 있던 그 알량한 ‘도덕적’ 짐이 완전히 벗겨진 데서 온 것이었다.

최진이 / 前조선작가동맹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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