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강제 끌려간 형 42년 만에 눈물의 상봉

남북 이산가족들이 20일 오후 3시 금강산 호텔에서 60여 년 만에 상봉했다. 전날 강원도 속초에 도착한 남측 상봉 대상자 82명과 동반가족 59명은 이날 오전 8시 20분 숙소를 떠나 오후 1시경 금강산에 도착했다. 상봉자들은 금강산 호텔에 여정을 푼 뒤 북측 가족 180명과 ‘단체상봉’을 시작으로 3일간의 짧은 일정을 시작했다.


남측 상봉 대상자 82명 중 어느 한 명이라도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하지 않은 이는 없다. 6·25 전쟁 당시 가족과 헤어진 이들이 대다수이지만 전시(戰時)와 전후(戰後)에 ‘북에 의해 강제 납북’돼 가족과 생이별한 이들도 82명 상봉자 중 5명이 포함됐다.


이들 가족은 부모·형제가 북한에 강제 납북됐지만, 이 같은 사실을 숨긴 채 기나긴 세월을 숨죽이며 살아와야 했다. 당시 사회적으로 가족 중 누군가 북에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 비난하고 때로 해코지를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42년 만에 북한에 강제 납북된 형 박양수 씨와 형수, 조카를 만나는 박양곤(52) 씨. 형 박양수(당시 15) 씨는 ‘오대양 61호’ 선원으로 1972년 12월 28일 서해에서 홍어잡이를 하던 중 북한에 강제 납북됐다. 당시 박 씨와 같이 납북되었던 선원 전욱표(68) 씨는 작년 북한을 탈출해 한국에 입국했다. 당시 납북된 오대양호 선원은 25명으로 이 중 일부는 북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박 씨는 “현재까지도 상상이 안 된다”면서 “그동안 겪었던 정신적 고충을 헤아려 줄 사람도 없고…자식을 먼 데 보내고 만나볼 기약으로 살다가 지병으로 양친 모두 돌아가셨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박 씨는 3남 1녀 중 막내로 이번에 만나는 형이 바로 위다. 


박 씨는 형과 헤어질 당시 상황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한숨) 내가 국민학교(초등학교) 졸업할 무렵, 12월 28일로 그때 벼락을 맞은 거죠”라며 “그때 당시 형님은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가정 형편상 중학교를 못갔다. 큰 형님이 중학교 졸업할 무렵이었고, 시골에서 생활이 다 그랬다. 맏형을 사람답게 만들면 그 밑의 동생들은 형이 거들어준다는 거였지”라고 회상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에 계신) 형님은 생업에 도움이 될까 하고 그 어린 나이에 배를 모르고 떠밀려서 배를 타러 간 거지, 그 당시 힘든 상황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면서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여건도 아니었고, 만나보러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형 박 씨가 납북된 후 가족들이 겪은 어려움에 대해 그는 “그때 당시 세월로 보면 상당한 정치적인 문제가 심했다. 그래서 학교 다니는 것 자체도 그렇고, 가족들이 외국으로 출국도 안됐다”면서 “생활 곤란을 많이 겪었다. 지금은 (큰)형님도 돌아가셨지만 그분도 생업을 하기 위해서 해외를 왕래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결국 저런(동생 납북) 문제가 발생돼서 더 이상 출국을 못했다”고 읍소했다.


박 씨는 형과 세 살 차이다. 여느 집안이면 많은 추억도 간직할 수 있었지만, 너무 어린 시절 형과 헤어졌고, 어려운 가정 환경 때문에 형과의 추억이 별로 없다는 점을 못내 아쉬워했다.


박 씨는 “농번기에는 일 거들기 바쁘고, 겨울철에는 땔감하러 다니느라 바쁘고…형님이랑 둘이 장난치고 놀 수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다”면서 “(한숨) 형님하고는 참, 내가 어릴 때 형님이랑 만났던 기억은 참 암울하고, 지금 그 기억 자체가 감감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일 자리가 마련돼서 형님을 만나게 되면 ‘과연 저분이 내 형님인가’ 싶을 정도의 기억만 남아있다. 어린 나이에 (형님이) 객지생활로 떠서 더 기억하기 힘들다”며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박 씨는 형님이 북에 생존해 있다는 것은 12, 13년 전에 북한에서 탈북해 한국에 입국한 사람을 통해 알았다. 하지만 경제적 능력과 생활고, 사회적 편견 때문에 생사확인을 할 수 없었다며 좀 더 일찍 찾지 못한 점을 못내 미안해했다.


그는 북에 있는 형님을 만나면 “고맙습니다. 얼굴을 뵙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라는 말 외에는 할 말이 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 씨는 의복과 생필품, 사진 외에 따로 선물은 준비하지 않았다며 아쉬워했다. 박 씨가 꺼낸 사진 한 장은 북측 형님 것이다. 하지만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 너무 흘러 낡아 어렴풋한 윤곽만 남아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972년 12월 납북된 ‘오대양 61호’ 선원 박양수 씨 모습(원안). 사진은 1974년 북한 묘향산에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 /사진=납북자가족모임 제공


박 씨와 같이 전쟁 중이 아닌 평시에 가족과 생이별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상봉자가 한 명 더 있다. 1974년 2월 15일 북한에 납북 당시 ‘수원 33호’ 선원이던 동생 최영철(당시 21, 현재 61)를 만나는 최선득(71) 씨. 


동생 최 씨는 1974년 2월 15일 ‘수원 33호’에 승선, 저인망어업으로 백령도 인근에서 홍어잡이에 나섰지만, 같이 조업 중이던 ‘수원 32호’와 함께 북측 함포 사격을 받고 납북됐다. 최 씨는 납북 후 북한에서 결혼해 자식을 두었으며 평안북도 피연군 농기계작업소 수리공으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 최영철 씨는 2008년 최성룡 납북자가족모임 대표가 ‘납북 어부 사진’이라며 공개한 31명의 납북 선원 사진에 있는 것이 확인됐고, 형 최 씨는 “사진은 신문을 통해 봤고 동생의 얼굴이 맞았다”고 확인했다.


4남 3녀 중 최영철 씨는 맏이, 이번에 만나는 동생은 넷째다. 최 씨는 동생과 헤어질 당시에 대해 “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올라가서 외양어선을 탄다고 했다”면서 “고등학교는 당시 생활로는 가기가 힘들어서 갈 생각을 못했는데, 딴에는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학교 갈 생각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최 씨는 “북에서 뭐 못먹고 그래서 보기 흉한 사람은 내보내지 않는다”라고 반문한 뒤 “동생이 어느 정도 잘 살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기대가 든다. 결혼도 하고 조카도 있을 것이니 조카들도 꼭 보고 싶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최 씨는 ‘동생을 만나면 가장 먼저 무슨 얘기를 해주고 싶냐’는 물음에 “동생을 만나면 그저 기쁘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면서 “동생 살아온 이야기, 우리 가족들이 살아왔던 이야기 다 해주고, 그럼 될 것 같다”고 짧게 답했다.  


최 씨는 동생과 조카들에게 줄 선물을 풀어 보였다. 최 씨가 준비한 가방에는 생필품과 의약품, 손목 시계, 제수씨에게 줄 스킨, 로션 등 화장품 세트도 준비했다. 특히 손목 시계에 대해, 태엽식을 준비했는데 ‘가족들이 디지털을 하자’, ‘배터리 교체식을 하자’ 서로 의견이 엇갈리다가 결국 “북한에 배터리가 어딨겠냐 싶어 태엽식으로 준비했는데 잘한 것 같다”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1974년 납북된 ‘수원 33호’ 선원 최영철 씨(원안). /사진=납북자가족모임 제공


최 씨는 10만 원 정도를 환전해 달러도 준비했다면서 “우리가 준비한 선물을 동생이 온전히 기쁘게 받았으면 좋겠는데 상봉 끝나고 평양 돌아가면 또 뺏어간다고 하고 그러니까 겁나서 준비 못하겠기도 하고 그러더라”고 말했다. 또한 최 씨는 셋째 동생 아들이 가족을 대표해 북에 있는 동생에게 줄 편지와 가족들의 사진, 납북된 최영철 씨의 사진 두 장도 준비해 동생에 줄 것이라며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이들과 달리 전시(戰時)에 북에 의해 강제 납치된 가족을 만나기 위해 금강산에 간 상봉자도 있다. 6·25 전쟁 당시 아버지가 북에 강제로 끌려갔다는 상봉자 최병관(67) 씨는 이번 상봉 행사에서 북에 있는 이복 동생을 만날 예정이다.


최 씨는 “아버지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해 전쟁 때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었다”면서 “살아계셨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운 마음이 생기더라. 지금껏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에서 재혼하신)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계셨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살아계실 때 만났으면…”이라며 눈물을 훔쳤다.


최 씨는 ‘이복동생을 만나면 무슨 얘기를 제일 먼저 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아버님이 언제 돌아가셨는지, 그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아픈데 없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모든 게 궁금하다”면서 “지금껏 제사는 안 지냈다”면서 앞으론 제날짜에 제사를 지낼 것이라고 말했다.


세 살 때 아버지와 헤어져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는 최남순(64) 씨는 20살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전까지 최 씨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숨겼다.


1992년 70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최 씨의 어머니는 재혼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최 씨는 “(어머니께서) 아버지 생신날 밥을 해서 뚜껑을 덮으면 뚜껑에 물기가 생겨 뚜껑 바깥으로 물이 떨어지면 (아버지가) 살아 있어서 그 눈물이 떨어진다며 위안을 삼으셨다”고 당시 기억을 설명했다.


최 할머니는 이번 상봉에서 이복 동생을 만날 예정이다. 최 할머니는 아버지가 납북됐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이복 동생까지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혈육의 정’은 무시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는 “(6·25 때) 돌아가신 게 아니어서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북에 동생 3남매가 있다”면서 “동생들을 만나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발자취를 더듬을 수 있고 아버지 모습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아 만나겠다고 하길 잘했다”며 웃음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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