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나온 이규보ㆍ이제현 작품집

조선초기 문단을 주름잡은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1420-1488)은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를 두고 “시가 굳세고 호방하기로는 동국(東國)에서 첫째 간다”고 했다.

조선중기 문단의 이단아 교산(蛟山) 허균(許筠.1569-1618)은 또 “문순공(文順公) 이규보의 시는 풍부하고 화려하며 호방하다”고 말했다.

무신이 정권을 농단하던 고려 중기를 살다간 그를 두고 흔히 고구려 건국주인 고주몽의 건국담을 노래한 ’동명왕편’(東明王篇)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거론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한 ’대표시’로 알려져 있으나, 민족이 있을 수 없는 그 시대에 민족의식 운운하는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또 이 시는 20대 ’애송이’ 시절에 지어졌다.

이는 그만큼 우리가 고려시대 500년을 통틀어 최대 문호라고 일컬어지는 이규보의 실상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좋은 보기가 될 것이다.

“그 옛날 쓰던 활은 벽 위에 걸려 있고 원수를 베던 칼도 칼집에 들어 있으니 아직도 나라 위한 붉은 마음 살아 있어 꿈에선 원수를 쏘아 없앤다네”(동명왕편)라고 노래한 이규보도 이규보이듯이 벼슬을 구하기 위해 힘있는 무신들에게 애걸복걸하는 모습도 이규보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농민의 참상을 목격하고는 “구슬 같이 희디흰 이밥과 고인 물 같이 맑은 술은 바로 농사꾼이 만든 것이라 그들이 먹는 것을 하늘인들 허물하랴”고 노래하기도 하면서 한편에서는 농민이야 굶어 죽건 말건 고주망태가 되도록 취하도록 마시면서 이태백 흉내를 내며 신선놀음을 일삼기도 했다.

“온 천하를 부채질하리라”는 웅지를 품었으나 정작 이런 그에게 세상을 웅략할 기회는 오지 않은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이규보가 선화(仙化)한 지 약 40년 뒤에 출현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 몰년(沒年)에서 볼 수 있듯 자칫하면 그가 그토록 충절을 바치고자 한 고려왕조가 역성 혁명에 무너지는 험한 꼴을 볼 뻔했다. 이런 고통스런 일은 대신 그의 수제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1328-1396)에게 넘어갔다.

이규보가 무신정권 치하에서 영욕이 점철된 삶을 살았다면 이제현은 고려왕조가 원나라 부마국으로 전락해 갖은 모욕을 겪던 그 시절에 나름대로 ’고려의 자존심’을 세우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말과 수레 오가는 함곡관 길에 / 몰아오는 먼지가 옷깃에 쌓이누나 / 이 세상 반쯤이나 두루 돌아다녔어도 / 마음은 물길 따라 고국으로만 향한다.”

중국 본토에서도 ’문학 상품’이 통하려면 중국 본토인들의 그것보다 더욱 중국 본토인적(的)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눈길이나마 줄 게 아닌가? 그래서 이제현은 약 500년 뒤에 출현하는 까마득한 후배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에게서 다음과 같은 칭송을 자아낸다.

“그의 시는 참으로 우리나라 2천 년 이래의 대가로서 화려하고 명랑하며 전아한 품이 우리나라 시의 딱딱하고 꺽꺽한 폐습을 깨끗이 벗어난다.”

한마디로 촌티가 나던 동국(東國)의 시 작품이 익재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에 대해서도 내 놓을 만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1983년 이후 북한에서 계속하고 있는 ’조선고전문학선집’ 시리즈를 남한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있는 도서출판 보리가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이어 이번에는 ’동명왕의 노래’와 ’묻노라 조물주에게’(이상 이규보 문학선), 그리고 ’길에서 띄우는 편지’(이제현 작품집)의 3권을 한꺼번에 선보였다. 각권 530-590쪽 안팎. 권당 2만5천원.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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