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 재일조선인 인권침해 사례 면밀한 조사 필요”

▲ 1959년 12월, 1차 북송선이 출항하던 당시의 모습./사진=재일본조선인 총련합회 중앙 교육 문화부가 기획하고 재일본 조선 문학 예술가 동맹 영화부가 제작한 ‘총련시보 제 4호 영상’ 캡쳐.

“일본에서 살 땐 미래가 안 보였어.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지. 그런데 북한에 가면 무상으로 밥도 주고 집도 제공하고 대학교까지 보내준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었지.”
“통일이 곧 될 줄 알았지. 그때 이승만 정부가 위태위태했거든. 그래서 통일되기 전에 북조선에라도 가 있으려고 했지. 그때 우리 입장에선 위나 아래나 같은 조선이었어.”
“사회주의? 뭐랄까, 그게 매력적이었어. 북조선에 가서 사회주의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다고나 할까.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리석었지.”
“조선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위쪽이 잘 살아봤자 얼마나 잘 살았겠어.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그걸 알면서도 끝내 가겠다고 하시더라고. 새 조국건설에 이바지하겠다고.”
“조총련뿐만 아니라 일본 신문에서도 북한이 살기 좋은 데라고 하더라고. 총련에서 가지고 온 선전물을 보면 북조선 사람들이 다들 웃고 있었어. 정말 그곳에 가면 행복할 줄 알았지.”

이유는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지상낙원처럼 보였던 ‘북조선’에 가면 일본에서의 생활보다는 더 나을 것이란 ‘희망’을 품었다는 건 같았다. 북송(北送)을 원하는 재일조선인을 태운 소련 배 클리리온호(號)와 토보르스크호(號)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서 니카타(新潟)항을 출발했다.

북송사업이 시작된 지 반세기가 흘렀다. 일본적십자 본사의 외사부 자료를 바탕으로 한 장명수(張明秀)의 통계에 따르면, 1959년 12월부터 1984년까지 진행된 북송사업을 통해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조선인은 일본국적자(재일조선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도 상당수 포함돼 있다) 6730명을 합쳐 모두 9만 3339명에 달한다.

당시 많은 재일조선인들은 귀국 후의 생활과 교육, 직업을 보장해주겠다던 김일성의 약속과 지상낙원이라는 조선총련의 선전 그리고 향상된 북한경제를 소개한 일본의 대중매체를 믿고 북한을 조국으로 선택해 이주했다.

일본은 재일동포들을 한국으로 이주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로서는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의 이주를 전면 수용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국가기록원은 재일조선인의 북송에 대해 “자유세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대규모로 공산주의를 대안으로 선택한 최초의 사건”이자 “북한 심리전의 잠재적 위협이 남한에서 실제화 되었을 경우의 위험성을 잘 대변해 준 사건”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당초 북송사업은 기본적 인권(인도적 차원)에 따른 거주지 선택의 자유라는 국제적 통념에 입각, 일본정부의 추진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조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조선인의 끈질긴 호소”에 일본 정부와 적십자사가 ‘인도적 입장’으로 호응했다는 것.

그러나 비밀이 해제된 국제적십자사 문서를 보면, 당시 일본정부가 인도적 차원에서 북송을 승인해줬다고 주장해온 것과 달리 재일조선인 중 빈곤한 가정이 많아 ‘생활보호 재정 부담’이 가중되자, 북송사업에 더욱 적극적이고 주도적으로 협력·개입했음이 드러났다. 게다가 당시 일본정부는 북송되는 재일조선인들에게 일본에 재입국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사실도 숨긴 것으로 알려졌다.

2014년 2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를 내고 북송 재일조선인들의 귀국사업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1959년부터 9만 3,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거짓 약속을 통해 일본에서 북한으로 이주하도록 유인됐다. 그들이 도착한 후 몇 년 뒤, 그들은 두고 온 가족들과의 어떤 접촉도 거부당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북한에 있는 정치범수용소 또는 기타 구금시설에 처하게 됐으며, 이들 중에는 북한을 떠날 권리가 분명히 약속된 수천 명의 일본인들도 있었다.”

북송사업은 북한으로 간 재일조선인에 대한 ‘반(反)인도 범죄’로 귀결됐고, 이 범죄는 지금도 진행 중이란 설명이다. ‘반(反)인도 범죄’를 저지른 북한 당국과, 북한 당국과 연계해 조직적으로 북송사업을 뒷받침한 조총련에 “반(反)인도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또한, 북송에 적극 가담한 일본정부와 언론 그리고 이들 9만 3339명 재일조선인의 북송을 저지하지 못한 무기력했던 한국정부도 “도의적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 취재 과정서 만난 재일조선인·전문가들은 결국 북송사업이 북한으로 간 재일조선인에 대한 ‘반(反)인도 범죄’로 귀결되었고, 이 범죄는 지금도 진행 중이라고 증언했다./사진=국민통일방송 정은주 PD  

이와 관련 데일리NK는 지난 3월부터 4월 한 달여간 국민통일방송과 (사)통일아카데미와 함께 북송사업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한국과 일본 오사카·도쿄 등지에 거주하는 탈북민(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갔다가 이후 탈북하신 분), 前 조총련 관계자,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북송사업의 진행 과정▲북송사업에서의 북한 당국과 조총련의 연계▲(북송선을 탄)재일조선인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인권유린과 차별 실태 등을 조사했다.

북송 재일조선인들은 식민의 상처와 함께 ‘분단과 이산’이라는 현재 진행 중인 상흔을 갖고 있는 한반도의 구성원들이다. 1950~1980년대 당시 이들은 일본에선 ‘천덕꾸러기’, 남한에선 ‘빨갱이’ 그리고 북한에선 ‘째포·반쪽발이’로 불려야 했고, 심지어 동요계층 또는 적대계층으로 분류돼 집중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취재 기간 동안 만난 30여 명에 가까운 재일조선인들은 만약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그 배(북송선)를 타지 않을 것”이라면서 누군가 탄다고 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말릴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박두진 코리아국제연구소 소장은 북송사업이 ‘반(反)인도 범죄’로 귀결된 것과 관련, “이 문제의 주범은 북한 당국과 조총련이지만 일본 역시 공범자에 해당한다”면서 “북송선을 탔던 재일조선인 중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온 탈북자들도 있기 때문에 (일본 정부 입장에서 봤을 때도)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조총련의 핵심세력을 키워내는 조선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 정치경제학부 교수로 1968년 4월부터 1975년 3월까지 교편을 잡았던 그는 조총련과 북한의 실체를 깨닫게 되면서 교단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그는 “국제사회에서 ‘북한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한국에서도 북한인권법이 11년 만에 통과된 지금, 북송사업을 통해 ‘재일조선인’들이 입었던 피해와 북한에서 겪었던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관심과 진지한 실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 데일리NK는 지난 3월부터 4월 한 달여간 국민통일방송과 (사)통일아카데미와 함께 북송사업 실태조사를 진행했다. 한국과 일본 오사카·도쿄 등지에 거주하는 탈북민(북송선을 타고 북한에 갔다가 이후 탈북)·前 조총련 관계자·전문가들과 북송사업의 진행 과정,북송사업에서 북한 당국과 조총련의 연계,(북송선을 탄)재일조선인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인권유린·차별 실태 등을 조사했다./사진=국민통일방송 정은주 PD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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