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6자 새틀짜기’ 기싸움 팽팽

6자회담 조기재개 흐름을 타던 북핵국면에 아연 대치전선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북한이 평화협정 회담을 공식 제안한 것을 계기로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의 선후관계를 둘러싸고 북.미가 대립의 날을 세우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큰 틀에서 북한의 ’선(先)평화협정-후(後)비핵화’ 주장과 미국의 ’선(先)비핵화-후(後)평화협정’ 입장이 대립의 중심축이다.


북한이 11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조선반도 비핵화를 빠른 속도로 적극 추동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미국은 12일 백악관과 국무부 브리핑을 통해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비핵화 조치 이행이 우선”이라고 즉각 응수하고 나왔다.


북한의 평화협정 제안이 비핵화 논의를 지연시키거나 초점을 흐리려는 노림수라는 한국 정부의 인식과 궤를 같이하는 대목이다.


정부는 12일 외교통상부 김영선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6자회담이 재개되고 북한 비핵화 과정에 진전이 있으면 9.19 공동성명에 명기된 대로 직접 관련 당사국들이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평화체제 협상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이라고 발표했다.


사실 비핵화와 평화협정 논의의 ’선후’ 논란이 새삼스런 대립의 지점은 아니다. 북한은 2005년 7월 외무성 성명을 통해 “평화체제 수립은 비핵화 목표 달성을 위해 거쳐야할 노정”이라며 선(先) 평화협정론의 공론화를 시도하자 조시 부시 대통령은 2006년 9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은 바 있다.


양국의 이 같은 대립은 6자회담 재개라는 ’판’ 자체를 깨려는 것이 아니라 6자회담의 새틀짜기를 둘러싼 기싸움의 성격을 띠고 있다.


회담의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6자회담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의제와 논의 틀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협상고지의 선점여부를 가르는 중요한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우선 미국은 북한의 ’검증가능하고 비가역적인’ 핵폐기를 압박하는 방향으로 새틀짜기를 시도하고 있다. 북핵 논의의 ’태풍의 눈’으로 불리는 농축 우라늄 문제를 새로운 핵심의제로 추가하려는 움직임도 이런 맥락에서다. 북한 인권문제도 6자회담 맥락에 포함시킴으로써 대북 압박효과를 높이는 카드로 활용될 공산이 크다.


이에 대해 북한은 절대적 세불리에 놓인 비핵화 논의의 ’덫’에서 탈피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비핵화 논의보다 훨씬 복잡하고 지루한 평화협정 논의를 우선적 의제로 띄우는 것은 이런 의도라는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한 소식통은 “평화협정 논의와 비핵화 논의를 연계시켜 내용상으로는 비핵화 논의를 지연시키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주목할 대목은 북한이 ’이슈 선점’ 차원에서 평화협정 논의를 지속적으로 쟁점화할 가능성이 높은 점이다. 특히 조만간 6자회담 복귀에 대해 보다 전향적인 의사를 표명하는 방식으로 평화협정 우선의제화를 거듭 제기함으로써 ’5자 공조 틀’의 균열을 시도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특히 북.미간의 게임에는 ’우군 확보’가 중요한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적극적 공조를 이끌어내고 있고, 북한은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는데 총력전을 펼 가능성이 점쳐진다.


이와 맞물려 최진수 주중 북한대사가 12일 일본 교도통신 등과의 회견에서 평화협정 회담에 참여할 정전협정 당사자로 미국과 중국을 거론하면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표명한 것이 미묘한 기류를 형성하고 있다.


물론 외교가에서는 한국이 평화협정 논의에서 배제될 가능성을 낮게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지난 1997년부터 1999년 8월까지 남.북.미.중이 참여하는 평화체제 4자회담이 개최된 전례가 있는데다 2000년 북.미가 공동 발표한 조.미 공동코뮈니케와 2007년 10.4 선언에서 한국이 평화협정 논의의 당사자임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실제로 한국을 배제한 상태로 평화협정 논의가 진행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최 대사의 언급은 평화협정 우선논의에 제동을 걸고 있는 한국 정부의 움직임을 겨냥한 ’경고성 메시지’라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상황에 따라 한국의 정전협정 당사자 자격 논란을 제기하며 평화협정 논의에서 배제할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는 얘기다.


북.미간의 이 같은 대립국면은 표면적으로는 6자회담 재개 논의에 부정적 신호로 비쳐지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6자회담 재개의 시계가 빨리지고 있음을 방증하고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지난달초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방북 이후 대화가 중단됐던 양측은 6자회담 의제와 형식을 논의한다는 명분으로 접촉을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다.


한 소식통은 “연말 연초 닫혔던 뉴욕채널이 다시 가동돼 양국의 이견이 조율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북.미 양국이 ’우선순위’를 둘러싼 이견은 있지만 6자회담 재개시 평화체제를 논의한다는 큰 틀의 컨센서스를 형성해놓았다는 관측에 근거하고 있다.


보즈워스 대표가 지난달 10일 워싱턴 기자회견에서 “6자회담이 재개되면 비핵화와 새 평화체제.평화협정 등 전반적인 배열(sequencing)이 문제가 될 것”이라면서도 “모든 것들에 대한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이라는 분석이 있다.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낮아 보이지만 북.미간 추가 고위급 대화가 열릴 개연성도 배제할 수 만은 없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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