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핵신고 협상서 ‘UEP 우회’ 배경

“2002년 10월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 같다.”

북한과 미국이 지난 8일 싱가포르 핵 프로그램 신고 협상에서 그간 쟁점이 돼온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과 핵확산 의혹에 대해 `간접시인’을 통한 낮은 단계의 잠정합의를 도출한 것으로 알려진 데 대해 서울의 한 고위 소식통은 이렇게 평가했다.

미국과 북한이 이른바 ‘HEU(고농축우라늄) 파동’을 거치며 제2차 핵위기를 야기했던 5년여전의 악몽에서 탈출하기 위해 `정치적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5년여 전인 2002년 10월4일 평양을 방문한 미국 대표단은 북한에 ‘HEU프로그램 정보’를 들이대며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했고 이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우리가 HEU 계획을 갖고 있는 게 뭐가 나쁘다는 건가. 우리는 HEU 계획을 추진할 권리가 있고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도 만들게 돼있다”고 맞받았다.

미국은 강석주 제1부상의 말을 근거로 10월17일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북한은 미국의 발표 직후부터 오늘날까지 이를 부인하고 있다.

HEU는 우라늄을 아주 높은 단계로 농축한 물질로, 핵폭탄의 원료로 쓰일 수 있다.

북한은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에 따라 모든 핵 프로그램과 시설을 동결하기로 했고 미국은 그 대가로 경수로 2기를 북한 땅 신포에 지어주고 있던 상황에서 HEU 프로그램 문제가 불거져나온 것이다.

미국은 1994년 제네바 합의로 간신히 북한의 플루토늄 핵무기 진행을 막았는데 북한이 그보다 위력이 강한 우라늄 핵무기를 은밀히 만들고 있었음을 시인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북 측은 이후 이를 전면 부인해왔다.

미국이 진실이라면 북한은 한편으로는 협상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몰래 또다른 핵무기를 만들거나 만드려고 노력해온 파렴치범이 되고 만다.

반대로 미국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마치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다며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막상 무기의 존재를 입증하지 못한 것처럼 북한에 ‘우라늄 핵폭탄 프로그램’의 누명을 씌운 셈이다.

진실게임의 특성상 한쪽은 진실을, 다른 쪽은 거짓을 말하고 있을 것으로 외교가는 보았다. 그리고 2003년 4월의 북.미.중 3자회담과 8월 출범한 6자회담은 ‘우라늄 진실게임’을 풀기 위한 외교공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제네바 합의는 휴지조각이 되고 경수로 사업도 중단됐다. 또 HEU라는 말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제는 UEP라는 말이 나온다. 고농축을 의미하는 H(Highly)가 빠지고 우라늄농축프로그램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북.미 양측이 공개적으로 그 내용을 밝히지 않아 구체적인 사안은 확인할 수 없지만 싱가포르 회담에서 양측은 UEP와 시리아 핵 협력 의혹에 대해 과거 1972년 미.중 간에 체결했던 상하이 공동성명 방식에 따라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 양해각서에 ‘간접시인’ 방식으로 처리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2002년 10월 2차 북핵위기와 직결되는 우라늄농축문제와 관련, ‘북한이 우라늄 농축활동과 핵확산 활동에 개입했다는 것이 미국의 이해사항’임을 적시하고 북한이 이에 대해 ‘반박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인식하고 있다(acknowledge)’는 표현을 양해각서에 담은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던 미국이 ‘진실을 고백하라’고 추궁하는 대신 ‘간접시인’ 방식으로 우라늄농축문제를 우회적으로 넘어가는 매우 낮은 단계의 합의를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이 같은 협상태도 변화의 배경에는 대선을 비롯한 자국의 내부 사정이 놓여 있다는 게 외교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무엇보다 내년 봄이면 민주당이든 현 집권 공화당이든 미국에 신정권이 들어서며 신정권의 속성상 부시 행정부에서 일어났던 부정적인 유산을 재평가하는 작업이 전개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이라크 전쟁에 대한 미국내 부정적 여론을 감안하면 부시 행정부가 벌인 이른바 ‘악의 축’과의 전쟁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벌어질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이라크 전쟁 뿐 아니라 제네바 합의를 파탄시킨 ‘HEU 파동’도 재론될 가능성이 높다고 외교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벌써부터 일부 전문가들은 ‘HEU 파동은 작은 증거를 부풀린 당시 네오콘의 음모였다’거나 ‘부시 행정부가 오판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결국 내년에 출범할 미국의 신정권에 의해 ‘HEU 음모론’ 등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그에 연루된 사람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런 점을 의식해 기왕에 진행되는 핵협상에서 미국이 적어도 ‘HEU 의심’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간접시인’이라는 방식으로 협상을 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시각이 외교가에 존재하고 있다.

물론 미국내 일부 세력은 싱가포르 협상 내용에 불만을 피력하며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는데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미국 의회내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를 비롯한 미국내 협상파들은 ‘HEU 파문’에서 자유로운 인사들이다. 비록 HEU의 진실은 안개에 가려져 있지만 이들이 과거 HEU 파문을 우회적으로나마 해결하려는 데 대해 외교가에서는 우호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기도 하다.

서울의 고위소식통은 “외교라는 게 불확실한 것을 더욱 불확실하게 하기도 하지만 곤경에 처한 상황을 유연하게 하는 역할도 한다”면서 “2002년 10월의 악령에서 벗어나고 북한핵의 실질적 위협인 플루토늄 물질을 제거하는 본래 의미의 북핵 협상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연합

소셜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