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관계정상화…햇살 들까

북한과 미국이 5일부터 ’2.13합의’에 따른 관계정상화 실무그룹 회의를 개최, 역사적인 수교 논의의 첫 걸음에 나서 결과가 주목된다.

북미 관계정상화는 미국의 오랜 군사적 위협을 제거하고 김정일 체제를 지키며 국제무대에 정상국가로 진입하는 동시에 국제금융체제와 협력을 통해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오랜 숙원이었다.

더욱이 사회주의 체제인 중국과 베트남 모두 대미관계 정상화를 통해 경제개혁을 실현하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미관계 정상화는 체제 고수와 경제발전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최대 외교과제이자 국가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은 동구권 붕괴 직후부터 김정일 위원장의 지시에 따라 북미 관계정상화에 목을 매고 그 실현에 안간힘을 썼지만 번번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양국은 1993년 1차 핵위기 이후 근 15년간 적대관계를 종식시키고 관계정상화를 위한 공동성명 등을 수 차례 채택했지만 전부 휴지조각에 그치고 말았다.

93년 3월 북한의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선언 후 3개월만에 ’조.미공동성명’을 발표, 미국이 북한에 대해 핵무기를 포함한 무력 사용.위협을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자주권 존중 및 내정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이 성명의 원칙은 이듬해 8월 채택된 ’조.미 합의성명’에 되풀이됐으며, 같은해 10월 채택된 제네바 기본합의문은 양국관계 개선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합의문 2조는 합의 3개월내 통신.금융거래 및 무역.투자제한 완화, 양국 수도에 연락사무소 개설, 상호 관심사에 대한 진전에 따라 양국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하는 등 정치.경제관계의 완전 정상화문제를 담았다.

그러나 후속 의정서의 합의가 미뤄지고 98년 북한의 미사일 실험, 금창리 핵의혹 시설이 불거진데다 여소야대 국면에 처한 클린턴 행정부의 한계 등으로 관계정상화는 한발짝도 내딛지 못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화해무드가 고조되는 가운데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그해 10월 김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면서 다시한번 관계정상화에 나섰고 양국은 적대관계 종식을 선언하는 공동코뮈니케를 발표했다.

이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방북하고 클린턴 대통령의 방북 추진을 협의하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2002년 부시 행정부 출범과 2차 핵위기 사태로 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여전히 대미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

김정일 위원장은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2005년 6.17면담에서 “클린턴 대통령 때부터 미국에 대해 좋게 생각하고 있고,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등 4차 6자회담을 앞두고 북미관계 정상화가 핵문제 해결의 관건임을 강조했다.

마침내 9.19공동성명이 탄생, “상호주권을 존중하기로 승낙하고 상호 평화적으로 공존하며…그들의 관계를 정상화하는 조치를 취하기로 함”으로써 양국관계 정상화는 다시 희망의 빛을 보는 듯 싶었다.

하지만 성명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방코델타아시아(BDA) 북한계좌 동결로 양국은 다시 첨예하게 대립했고 이것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강행으로 이어졌다.

북한 핵실험과 더불어 공화당의 중간선거 패배, 이라크 전쟁 실패 책임론이 거세지면서 수세에 몰린 부시 행정부는 압박 일변도의 대북정책에서 돌아섰고, 이제 북한은 또다시 부시 행정부 집권기간 감히 꿈꿀 수 없었던 관계정상화 실현의 호기를 맞게 됐다.

임원혁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을 적성국 교역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는 문제는 페리 프로세스가 종료된 99년 다뤄진바 있어 그리 어려운 사안이 아닌 반면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는 일본인 납치문제 등과 연결돼 있어 다소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좌절을 거듭해온 북미 관계정상화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던 부시 행정부에서 실현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