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회담과 제네바 ‘비공개 양해각서’

북한과 미국이 시한(작년 12월31일)을 3개월 이상 넘겨가며 힘겨루기를 해왔던 핵 프로그램 신고협상에서 접점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가는 미국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가 `같은 얘기할 것이면 만나지 않겠다’고 공언하며 북측의 결정을 촉구해온 상황에서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 외무성 부상이 싱가포르로 건너가 8일 힐 차관보와 회담한다는 점에서 일단 좋은 결과를 예상하고 있다.

북핵 현안에 정통한 정부 고위소식통은 6일 북.미가 이처럼 좋은 결과를 예상케하는 회동을 갖게 된 데에는 과거의 경험이 중요한 단초가 됐다고 전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례는 제1차 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북한과 미국이 1994년 10월21일 체결한 제네바 북.미 기본합의문과 ‘비공개 양해각서’를 꼽을 수 있다.

당시 양측은 ▲북한의 흑연감속 원자로 및 관련시설을 경수로 원자로 발전소로 대체하기 위해 협력하고 ▲양측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하며 ▲핵이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함께 노력하고 ▲국제적 핵비확산 체제강화를 위해 함께 노력한다는 내용의 4개항에 합의하고 기본합의문을 공개했다.

기본합의문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해 ‘agreed framework'(합의의 틀)이라는 형식으로 돼있었다. 당시에도 매우 생소한 형식의 외교문서로 화제가 됐었다.

그런데 당시 발표에서는 빠진 내용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비공개 양해각서’로, 양측은 이후에도 공개적으로 그 존재를 시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거의 대부분 공개돼 사실상 ‘비밀성’의 의미는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많은 전문가들이 전하는 비공개 양해각서는 ‘미국과 북한간의 ‘합의의 틀’과 관련해 쌍방은 이 합의의 틀에 담겨진 사항들의 이행에 참고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양해사항과 정의에 합의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경수로사업은 각각 약 1천㎿/E의 발전용량을 갖는 2기의 원자로로 구성되고 제2호 원자로의 구성은 제1호 원자로 준공후 약 1년 내지 2년안에 이뤄지는 것을 양해하며 ▲평화적 핵협력을 위한 쌍무협정을 체결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중유 제공 스케줄과 규모도 포함됐다.

특히 제네바 합의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제1호 경수로의 핵심부품 인도가 시작되면 북한으로부터 사용후 연료의 최종처리를 위한 국외반출을 개시한다’는 내용도 비공개 양해각서에 담겨있었다.

정부 소식통은 “북한의 입장을 고려할 때 밖으로 공개하기 어려운 미묘한 내용을 비공개 양해각서에 담았으며 이는 대외에 공개된 기본합의문의 상세한 부분을 규정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면서 “건설적 모호성을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 외교는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북한이 이미 대외적으로 공개의사를 분명히하고 실제로 지난해 11월 중국에 제출하려던 신고서에 담겼던 30kg에 달하는 플루토늄과 영변 핵시설의 세부 내역 등은 ‘공개되는 문서'(성명 또는 합의문)에 포함시키고 우라늄농축과 핵협력 항목 등 미묘한 부분은 비공개 양해각서(또는 비밀합의록)에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에도 중요하고 핵심적인 신고내용은 비공개 양해각서에 담기게 되는 셈이다.

비공개 양해각서라고 하지만 우라늄농축과 핵 협력 내용에 대해서는 이른바 ‘간접시인’ 방식을 활용할 전망이다.

`간접시인’은 미국이 자신의 이해사항을 기술한 뒤 북한이 이를 적절한 표현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중국이 1972년 미.중 간에 체결된 `상하이 공동성명’을 참고해 제안한 아이디어인 것으로 전해졌다.

상하이 성명에는 “미국은 대만 해협 양안의 모든 중국인이 하나의 중국만이 존재하고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한다는 것을 접수한다. 미국 정부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 도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있다.

`접수(acknowledge)’하며 ‘도전하지 않는다(does not challenge)’는 완곡한 표현으로, 미국이 `하나의 중국’을 주장하는 중국 측 의견을 수용한 것이다.

외교 소식통은 “미 의회가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를 의결하려면 상하이 공동성명에서 사용된 `도전하지 않는다’는 것보다는 훨씬 분명한 표현이 들어가야 한다는 점을 북한도 잘 알고 있으며 이 같은 방향으로 거의 의견접근이 이뤄졌다”고 전했다.

우라늄농축프로그램과 시리아 핵협력 의혹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이뤄지면 양측은 비공개 양해각서를 만들어 각자 보관한다. 그리고 6자회담 참가국들에게는 정식 회담 등의 기회를 이용해 구두로 설명하면서 그 존재를 확인하게 될 전망이다.

한 소식통은 “구두로 설명하더라도 외교무대에서 이뤄지는 것인 만큼 큰 의미가 있는 외교행위”라면서 “다만 비공개 양해각서에 대해 북한은 침묵을 지키며 그 존재와 내용을 공식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건설적 모호성”이라고 말했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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