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관대첩비 귀향의 의미

1905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된 지 100년만에 남한으로 귀환한 북관대첩비가 마침내 3.1절인 1일, 이곳 개성에서 북한에 인도됨으로써 귀향했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지 1세기 가량이 지난 뒤인 1709년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가 임란에서 왜군을 격퇴한 공로를 기려 그의 의거 장소인 함경도 길주에 건립됐다.

그런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와중인 1905년 일본군 눈에 띄어 일본에 반출된 뒤 그 행방이 묘연하다가 1978년 재일사학자 최서면 박사에 의해 야스쿠니신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후 줄기찬 반환운동이 전개됐다.

그 결과 지난해 10월20일, 10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원적지인 북한으로 인도되기에 이르렀다.

이번 일은 남북교류사, 특히 해외 소재 한국문화재 반환과 관련된 분야에서 새로운 장을 장식하는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첫째, 일본으로부터의 반환이 그렇고, 둘째, 그렇게 돌아온 문화유산이 남한이라는 통로를 거쳐 원적지인 북한에 인도됐기 때문이다.

이 중 해외 소재 문화재 반환은 우리의 요구에는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나 드물지 않은 선례가 있었고, 지금도 경매시장 구입 등의 방식을 통해 일어나고 있다.

반환 운동을 상징하고 있는 일이 외규장각 반환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간 300건 남짓한 우리의 고문서를 돌려받기 위한 운동이 1993년 이후 프랑스를 상대로 줄기차게 전개되고 있다.

문제는 일본 소재 한국의 문화유산이다. 일본에 가 있는 우리의 문화재라고 하면 그 모두가 ‘약탈’ 혹은 ‘무단반출’로 나가 있다는 생각이 강한 편이지만, 다른 방식을 통한 소위 ‘합법적’ 반출도 많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개중 상당수는 선물 공여나 구매 등의 방식을 통해 나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반환 운동 대상이 되는 것은 식민통치기를 전후한 시점에 폭력이라는 방식을 통해 강제로 반출되거나 전리품 등의 방식으로 획득해 간 문화유산들로 한정된다. 이 중 극히 일부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즈음해 반환되기도 했다.

문화재를 반환하라는 우리의 요구에 일본정부로서도 곤혹스런 대목이 없지는 않다. 국가라든가 그에 준하는 공공기관 소유물을 제외한 개인 소장 문화재는 일본 정부로서도 어찌할 수 없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쿄박물관을 비롯한 일본 국공립 박물관에는 조선총독부로 대표되는 국가권력이 개입해 강제로 반출해간 한국문화재가 다수 소장돼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북관대첩비 반환이 특히 의미를 갖는 것은 이런 사정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소장하고 있던 기관은 야스쿠니신사라는 종교법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의 문화유산이 우여곡절 끝에 돌아오게 된 데는 말할 것도 없이 민간 차원의 줄기찬 운동이라는 밑거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운동에는 일본측 민간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북관대첩비 반환은 남북한이 합작한 첫 성과물이라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어 마땅하다. 주도적인 역할을 우리 정부가 했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북한측과 합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북관대첩비 원적지가 북한이라는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 정부가 섣불리 반환을 요구한다면, 나아가 그런 방식을 통해 독자적으로 돌려받는다면 그것은 또 다른 차원의 ‘외교분쟁’, 즉 남북한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남북한 당국은 반환이 결정되기 이전에 이미 반환은 남한이 주도적으로 추진하고, 그렇게 돌려받은 북관대첩비는 적절한 시점을 택해 북한에 인도한다는데 합의했던 것이다.

남북한 당국은 원적지인 함경도 길주에 복원될 북관대첩비 일대에 대한 관광화 방안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돌덩어리 하나에 이처럼 많은 사연과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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