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ㆍ중 공동 고고발굴 관련 문건 주요 내용

연합뉴스가 단독 입수한 한 중국 고고학자의 1963-1965년 북·중 공동의 고고 조사 및 발굴 관련 문건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중국 당·정의 기본 태도, 발굴대 구성, 발굴과정, 발굴 자료 해석을 둘러싼 양측 간의 첨예한 의견 대립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어 흥미롭다.

특히 저우언라이(周恩來) 당시 중국 총리의 고조선의 기원 관련 발언은 설훈 전 의원이 입수해 2004년 8월 공개한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 면담 때의 다소 애매한 언급보다 훨씬 분명한 메시지를 북한측에 전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3년 간의 공동 발굴을 통해 얻은 유물은 도기 조각 등을 제외하고 모두 5천여점에 이르렀고 중국은 북한의 계속되는 요구에 따라 중국측은 1965년 8월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민속학연구소에 진품과 복제품 일부를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 공동 발굴의 시대적 배경 = 1950년대 말과 1960년대 초, 중국 당·정이 니키타 흐루시초프 수상의 구 소련 공단당 지도부와 첨예하게 대립, 신문 등을 통해 소련을 비판하고 있을 때 북한 당·정이 이에 적극 맞장구를 쳐줌으로써 양국 관계가 매우 긴밀해진 것이 공동 발굴 성사의 큰 배경이다.

문건에 따르면, 북한은 당시 소련에서 출판된 ’세계통사’가 “조선은 자기네 역사도 없고 , 자기네 문화도 없다”는 식으로 멸시하고 일본 ’군국주의’가 대북 공격을 강화한데 자극 받아 중국에 여러 차례 동북지방에서 고고 발굴을 하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최용건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중국에 공동 발굴을 요청하면서 했다는 말을 보면 북한은 자신들이 국제사회에 작은 민족, 작은 나라, 자기의 역사와 문화가 없는 나라 등으로 멸시당하고 있다는 강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북한의 요청에 대해 북·중 양국의 당간, 국가간, 인민간 친선관계를 더욱 강화하고 밀접하게 한다는 취지에서 고고 발굴분야 협력을 하기로 하고 이와 관련이 있는 고위 지도자의 승인을 받았다는 것이다.

◇ 저우언라이 ’고조선은 중국 동북지방 기원설’ 일축 = 설훈 전 의원이 공개한 대화록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발해 유적과 출토 문물의 예를 들면서 “조선 민족이 조선반도 뿐만 아니라 요하(遼河), 송화강(松河江) 유역에서도 오래 살았다는 것이 증명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조선 민족이 더 오래 전에도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조선 민족의) 일부가 아시아 남부에서 표류해 왔다고도 하나 이것은 별개 문제다”라고 고조선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채 다소 애매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지나갔다.

그러나 연합뉴스가 입수한 문건을 보면, 숫자의 발음과 음식 및 생활 습관의 유사성 등을 들면서 고조선이 중국 동북지방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푸젠(福建)에서 기원했다는 견해를 확실하게 밝힌 것으로 돼 있다.

저우언라이의 이같은 발언이 공동 발굴작업 개시 직전인 1963년 6월28일 조선과학원 대표단 면담 때 했던 발언 내용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최용건의 공동 발굴 요청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 공동 고고 발굴단 구성 및 발굴 과정 = 문건에 따르면, 북.중 양국 고고학자 등이 동등하게 참여하는 2개의 발굴단을 구성, 1963년 9월1일부터 10월31일까지 만 2개월 동안 북한측이 선정한 지역을 대상으로 각각 작업을 진행했다.

제1 발굴단은 랴오닝(遼寧)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동부지역 등에 분포된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유적지와 고분, 고성(古城) 유적지 등을 위주로 조사작업을 벌였고, 제2 발굴단은 지린(吉林)성, 헤이룽장성, 랴오닝성 환런(桓仁)현 등지에서 고구려 및 발해 시대의 유적지 등 에 중점을 두고 조사를 진행했다.

1차 작업을 마친 양국 발굴단원들은 11월에 베이징으로 가 북한측 발굴단원 전원과 중국측 발굴단 단장 및 부단장 등이 저우언라이와 면담했다.

북한측이 첫해의 발굴 조사에 이어 눙안(農安), 부위(夫餘) 등에 대한 고고 조사를 요청함에 따라 중국측은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인 1964년 4월8-20일 발굴단원들을 현지에 대한 조사 준비를 했으나 북한측의 사정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제1 발굴단은 1964년 5월16-7월17일 산둥(山東)성 뤼순(旅順).다롄(大連)지역에서 쌍타자 유적지, 루상(樓上)묘지, 강상(崗上)묘지 등 5개 유적지를 발굴했고 제2 발굴단은 5월14-7월19일과 8월24-10월30일 기간에는 지린(吉林)성 둔화(敦化)현 육정산(六頂山)묘지와 헤이룽장성 닝안(寧安)현의 발해 상경용천부 유적지를 발굴했다.

1965년 5월28-6월7일 사이 제1 발굴단의 선양(瀋陽)시 일대 유적지 발굴로 공동 작업은 대충 마무리됐고 중국측은 이해 7월 하순 발굴보고서 초고를 완성, 인쇄한 후 양측이 내부 토론용으로 나눠 가졌다.

◇ 발굴 자료에 대한 의견 차이 현격 = 문건 작성자는 양측이 발굴 자료에 대한 연구 과정에서 현격한 의견 차이를 드러냈다고 밝혔다.

첫째, 북한측에서는 다롄시에서 발견된 청동 단검이 대표하는 문화 유존(遺存)은 고조선이라며 요하 유역 동쪽과 송화강 남쪽 지역이 바로 고조선의 국가 발원지라고 주장했으나 중국측은 청동 단검이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는 점을 내세워 이를 반박했다.

이를 둘러싼 양측의 격론이 이어지면서 합의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이 부분은 결국 보고서 초고에 포함되지 못했다.

둘째, 20여개의 육정산 고분에서 발굴된 묘지 구축 방식과 장례 도구, 장례 풍속 및 상경용천부 외곽 성벽의 구조 등에서도 이견이 두드러져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하는 북한측은 여러 가지로 육정산 고분이 고구려의 장례 풍속을 반영했음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측은 육정산의 발해 초기 왕실 및 귀족 고분에서 확인된 묘지 구축 방식과 목관, 화장 등의 특징이 속말 말갈족 고유의 장례 풍속이라고 주장했고 북한도 나중에는 목관, 목곽 등이 고구려 장례 풍속이 아님을 시인했다는 것이다./베이징=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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