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 읽은 ‘수용소의 노래’ 발췌 공개

▲수용소의 노래<도서출판 시대정신>

지난 13일 미국 조지 부시 대통령은 ‘북한민주화운동본부’ 강철환 대표를 만나 40분 동안 북한인권 실상과 북한문제 해결의 방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시 대통령이 강 대표를 만난 이유는 강 대표가 쓴 <평양의 어항>이라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꼭 저자를 만나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고 합니다.

부시 대통령과 강 대표의 면담 사실이 전해진 후 DailyNK에는 “<수용소의 노래>가 어떤 내용이냐”는 문의가 빗발치고 있습니다.

DailyNK는 지난 5월 29일자 보도를 통해 <수용소의 노래>가 쓰여진 계기와 과정, 대략의 내용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 관련기사 :

부시가 감동한 그 책, 한글판 있었네

DailyNK는 <수용소의 노래>를 펴낸 도서출판 ‘시대정신’의 협조를 얻어 국내 언론 최초로 <수용소의 노래> 일부 내용을 발췌, 공개합니다.

DailyNK는 세계 인류 모두가 <수용소의 노래>를 읽어 보았으면 하고 희망합니다.

<수용소의 노래>라는 책 한 권으로 북한의 현실을 다 전할 수는 없지만, 북한 동포들이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북한의 현실은 책에 나와 있는 것보다 훨씬 끔찍합니다. 우리는 책을 통해 북한을 가늠하며 ‘간접체험’을 할 뿐이지만, 북녘 2천 3백만 동포에게는 ‘오늘의 고통’입니다.

※ DailyNK가 공개하는 <수용소의 노래> 발췌본을 배포하는 행위는 “적극 환영합니다”. 북한의 현실을 널리 알릴 수 있도록 합시다. 단, 언론에서 인용시 ‘DailyNK.com 제공’을 반드시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 <수용소의 노래>를 친구에게, 자식에게, 조카에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하여 자유와 민주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도록 합시다.

※ 발췌하는 내용은 <수용소의 노래>의 전반부 가운데 일부입니다.

■ 도서구입 문의 : 02-732-8650, 02-723-6711~2

 

수용소의 노래 (발췌본)

 

  ▶ 수용소의 노래 발췌본 파일 내려받기 (아래아 한글)◀

● 개정판 머리말

1990년대 후반 북한은 수백만의 아사자를 냈습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었다고 합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기에 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그 참혹함 속에서도 인민들의 반항조차 일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더 충격적인 일입니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포가 있기에 굶어죽으면서도 김정일에게 원망조차 하지 못했을까?

남한에서 단 백 명이라도 먹지 못해 굶어죽었다는 기사가 나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 그 정권은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는 히틀러 시대에서나 볼 수 있는 수용소가 전국 곳곳에 만들어져 있어 인민들을 공포에 떨게 하고 저항정신을 말살하고 있습니다.

만약 남한에 북한과 같은 정치범수용소가 있어 민주화운동을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근태 장관과 같은 사람들이 가족과 함께 수감돼 수십 년을 강제노역과 고문으로 죽어 없어졌다고 한다면 과연 국민들이 용납할 수 있을까? 아무리 박정희 독재정권이 제멋대로 했다고 해도 가족까지 모두 죽이는 수용소가 설치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래도 남쪽은 훨씬 자유롭고 살 만한 세상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북한 인민들이 기아보다 더 무섭고 굶어죽으면서까지 반항할 수 없게 만든 수용소는 과히 히틀러의 아우슈비츠와도 비교할 만 합니다. 북한에선 수용소를 보통 ‘관리소’라고 부릅니다. 최근 북한에서 온 고위탈북자들의 말에 의하면 정치범수용소 수감자가 20만 명에서 30만 명으로 더 증가했다고 합니다.

정치범수용소가 생긴 지 이제 40년을 넘었습니다. 그 동안 그 안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될지 생각하기도 끔직한 일입니다.

남한에서는 지금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이 사회의 전면에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북한 사람들이 왜 싸우지 않는지 의아하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래도 좀 나은 편에 속한다고 봅니다. 북한인권문제는 아직 시기상조라느니, 남북교류에 장애가 되고 북한이 반발하기 때문에, 기타 등등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김대중 정부 이후 북한인권이란 말은 아예 공식석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됐습니다. 유엔에서 결의한 대북인권결의안에 3번이나 불참 또는 기권한 것이 바로 대한민국 정부요. 과거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북한의 현실입니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 이하 민주화운동세력들이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그 운명이 어떻게 됐을까? 본인은 물론 3대가 멸족 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 쟁쟁했던 북한의 부주석 최창익, 남로당 총수였던 박헌영, 고위간부들인 박금철, 김두봉 등 反김일성세력은 그 10촌까지 북한 땅에선 보이지 않습니다.

600백만 명의 유태인들이 독가스실에서 무참히 죽어가면서도 나치독일에 반항하지 못했던 이치와 오늘의 북한현실은 너무나 똑같습니다. 광기가 세상을 지배하고, 독재자의 우상화가 절정에 달하면 지성은 말살되고 인민은 노예가 된다는 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남한의 민주화도 북한보다 더 나은 환경이 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북한 사람들 보다 뛰어나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인권문제에 대해 냉소적인 남한 사람들을 보면 분노가 치미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김정일의 만행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과거 민주화운동에 몸담았던 지성인이라면 김정일에게 분노하고, 과거 남한의 군사정권으로 향했던 화살이 김정일 정권으로 이어져야 정상일 것입니다. 이렇듯 김정일의 만행에 침묵하는 것은 지성의 말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용소란 본인뿐 아니라 가족까지 모두 수감돼 평생을 노예처럼 살다가 사라져야 하는 끔직한 곳이기에 북한 주민들은 그 말만 들어도 부들부들 떨게 되고 수령 독재는 공포에 의해 유지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저의 수용소 경험을 담은 수기인 『평양의 수족관』(Aquariums of Pyongyang)을 읽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느낀 것은 하느님이 살아 계신다는 확신입니다.

너무나도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독재자의 총칼 앞에 죽어나가고 있어도, 우리형제인 남한 국민들조차 외면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 속에 절망하고 있을 때, 북한의 인권에 대해 미국의 대통령이 그토록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이 이제야 눈을 감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으며, 억울하게 죽어간 수십만의 정치범들의 투쟁정신이 머지않아 우리 민족 앞에 떳떳하게 기억될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핵문제보다 더 중요한 북한의 인권문제, 미국과 한국, 아니 전 세계의 양심 있는 사람이라면 더 이상 김정일의 인간학살을 중지시키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합니다.

저는 사실 부시 대통령보다 노무현 대통령이 탈북자들이 쓴 피눈물 나는 수기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돕고자 하는 인민은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김정일에게 퍼다 주며 달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북한 인민들이 침묵 속에서 학살됐는지 알아야 합니다. 지난 수년간의 햇볕정책이 그 햇볕을 김정일에게만 비추고 절대다수의 인민은 여전히 동토 속에 갇혀있다면 북한 인민을 구하는 길이 과연 무엇인가를 다시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모르는 한 그 어떤 훌륭한 대북정책도 나올 수 없으며, 북한 인민의 불행이 계속되는 한 결국 남한 국민들도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독재의 잔악성을 따진다면 남한의 역대 독재정권은 김정일의 발바닥에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정권과는 피 흘리며 싸운 사람들이 김정일에 대해서는 무비판으로 일관하고 마치 까마귀가 백로로 변할 듯 김정일에게 잘해주면 스스로 변화할 것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은 이제 그만둬야 할 때가 됐다고 봅니다.

더 많은 국민들이 탈북자들의 수기를 읽고 우리 형제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2005년 6월
강철환

● 초판 머리말

이제 대한민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속담이 있습니다. 최근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오는 탈북형제들을 만날때면 그들도 나도 서로에게 이질감을 느낄 만큼 변해버린 내 모습에 새삼 놀라곤 합니다.

북한 때를 말끔히 벗고 남한 사람처럼 보인다는 말이 참 우습기도 하고 한없이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나는 이 땅에서 호강하고 북한 형제들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얼마나 많은 혜택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느끼게 합니다. 저주받은 땅 북한, 그 속의 지옥인 요덕수용소 생활을 할 때는 내가 이런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될지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함께 생활했던 수용소 학생들 수천 명 가운데 저 혼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땅에 올 때 품고 왔던 단 하나의 소망은 바로 함께 했던 친구들과 지금도 수용소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곳의 실상을 폭로하고 국제사회로 하여금 더 이상 북한 땅에 수용소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이 땅에 와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했는가? 내 본분을 잊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가? 스스로 반성해 봅니다. 이 땅에 와서 누리는 풍요만큼이나 나를 외롭게 했던 것은 나의 생각과 소망에 대해 북한을 경험했던 이산가족들 외에는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같은 또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아예 북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관심 있는 사람들은 전부 김 부자 정권을 추종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앞에 눈앞이 캄캄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수기를 읽고 충격을 받아 북한의 현실을 다시 보게됐다는 많은 젊은 학생들이 생겨나면서부터 저는 새로운 희망을 가져 봅니다.

과거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다시 일어서고 있습니다. 끔찍한 수령독재체제 하에서 무참히 죽어 가는 우리 형제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가슴아파하는 남한의 젊은 학생들을 만날 때면 눈물이 나게 고마움을 느낍니다.

남북은 5천년 역사를 함께 살아온 형제입니다. 어쩌다 짐승만도 못한 독재자를 만나서 세계 제일의 빈곤국가로 전락한 동토의 땅을,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의 땅을 남쪽의 우리 형제가 발벗고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북녘 형제들의 아픔을 알아주겠습니까? 지금 남한 국민과 언론은 외국인보다 더 북한에 무관심해졌고 현실을 왜곡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외국인이 제출한 유엔인권결의안에 남한 형제들은 불참이라는 대응으로 북녘 형제를 외면했습니다. 통일 후 북녘의 형제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그들이 남녘의 형제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심각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줌도 안되는 독재권력과 불쌍한 우리 형제들을 구분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의 현실을 알지 못하거나 외면한다면 역사 앞에 또한번의 불행한 과오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10년 간의 수용소 체험을 통해 그곳에서 자행되는 반인륜적인 인간말살의 현장을 표현해보고자 했습니다. 저의 체험을 통해 남녘의 형제들이 북한의 현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으로 저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10년 전 저의 수기가 문고판으로 다시 발간돼 북한을 알리는 귀중한 자료로 쓰이도록 인정해주신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한기홍 대표님과 식구들, 그리고 북한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03년 5월
강철환

“더 많은 국민들이 탈북자들의 수기를 읽고
우리 형제들의 아픔을 함께 하는 날이 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프롤로그

「사격 준비」
지휘관이 소리쳤다. 총구가 나를 향해 일제히 겨누어졌다. 나는 말뚝에 묶인 채 온몸을 뒤틀며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허사였다.
「반역자 강철환을 향하여 쏴!」
탕 탕 탕
「아, 안 돼, 난 도망친 게 아니야. 이대로 죽을 순 없어.」
나는 심장 부위가 뻥 뚫려나간 것처럼 써늘해지는 것을 느끼면서 있는 대로 힘껏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제대로 말이 되어 나와주지도 않았다.
<아, 나는 죽었구나. 이젠 모든 게 끝난 거야. 살아나가려고 10년 넘게 그렇게 참고 고생해왔는데……. 난 이렇게 허무하게 죽었구나.>
모여 있던 사람들이 쓰러져 있는 내게 다가와 수군거렸다.
<난 도망친 게 아니라고요. 살려주세요>
나는 울며 그들을 붙잡고 하소연해보려 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았다.
그들은 나를 번쩍 들어올리더니 입석천 깊은 물에 던져버렸다.
「아! 아!」

꼬끼오.
어디선가 아주 먼 곳에서 닭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잠시 후 그 소리는 좀더 크고 가깝게 내 귓전에 다가들었다.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 꿈이었구나. 꿈이었다.
나는 맥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뒤척였다. 십 년 넘게 계속되는 생활이면 이젠 그만 이골이 나기도 했으련만, 새벽 기상은 언제나 이렇게 힘이 들었다.
<딱 5분만 더 자자.>
피곤에 지친 몸이 유혹하였다. 꿈 탓인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이 땀만 축축이 배어났다.
<그래도 일어나야지. 그까짓 것 더 잔다고 나이질 것도 아니고, 괜히 새벽부터 보위원 새끼한테 얻어터지면 하루종일 기분만 잡치니까.>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꺼풀을 거친 손으로 비비며 반쯤 몸을 일으켰다. 엊그제 땔나무를 도끼로 패어서 쌓아놓다가 나무무지가 무너져 내려앉는 바람에 깔렸던 다리가 아직도 욱신욱신 쑤셨다.
습관대로 눈을 감은 채 머리맡을 더듬으며 옷을 찾다가 무심코 고개를 든 나는 깜짝 놀랐다. 창 밖이 벌써 훤하게 밝아 있지 않은가!
<응?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너무 깊이 잠이 들었었나? 그렇다고 종소리를 못 들었을 리는 없는데…….>
사람들이 다 나올 때까지 집집을 돌며 시끄럽게 때려대는 종소리를 못 들었을 정도라면 내가 어지간히도 깊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할머니하고 미호는 어디 갔나? 왜, 깨우지도 않고……. 밖에선 난리가 났겠구나.>
화들짝 놀라 바깥으로 나갈 차비부터 하려던 나는 무의식중에 멈칫했다. 옆에 사람이 누워 있었던 것이다.
<이건 누구야?>
얼결에 내려다보니 삼촌이 곤하게 자고 있었다. 그 옆에는 아버지가 잠결에도 위가 아픈지 인상을 쓰며 잠들어 있었고, 잠든 할머니와 미호의 작은 몸집이 가련할 만큼 가볍게 보였다.
<아, 여긴 수용소가 아니잖아! 그래, 맞았어. 여긴 수용소가 아니지.>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웠다.
<그 지긋지긋한 죽음의 수용소. 아, 지옥 같은…… 아니, 지옥이었어. 난 이제 거기서 빠져나온 거야, 이제 난 살았어. 살아난 거라고!>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설마…… 꿈은 아니겠지?>
나는 내 팔을 힘껏 꼬집었다.
아팠다!
<아하, 봐. 꿈이 아니잖아. 정말, 정말 난 그 지옥에서 살아 나온 거라고!>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선 아직도 의심쩍은 마음이 남아 있었다.
<정말 꿈이 아니지? 정말?>
아직도 뜨듯하게 온기가 있는 방바닥과 눈에 설은 이불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나는 기지개를 펴보았다. 힘껏! 그리고 뭔가 소리라도 외치고 싶었다.
도대체 이게 얼마 만인가? 십 년 넘게 기지개는커녕 소리도 한번 질러보지 못했던 수용소 생활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아침시간에 누워 있을 수 있는 여유라고는 단 한번 상상조차 해본 적도 없었다.
나는 다시 잠든 삼촌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깡마르고 까맣게 탄 볼이 움푹 패여 있었다. 아버지는 너무나 말라 이불 밖으로 드러난 앙상한 두 어깨는 마치 미라가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폭삭 늙어버린 할머니와 미호, 그들의 잠든 모습이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살아서 그 수용소를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러면서 문득 내가 또 뭔가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정말 이제 나는 자유의 몸이란 말인가? 다시는 그 끔찍한 수용소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는 것인가.>
지옥 같은 수용소를 생각하니 갑자기 이가 뿌드득 갈리고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그런 곳에서 내가 십 년을 넘게 살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적처럼 느껴졌다.
나는 이것이 꿈이 아님을 확인하고는 이불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면 느긋하게 어제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았다. 내 머릿속에선 아직도 어제의 일과 지금의 상황이 정리되지 않고 오락가락하여 혼미스러웠다.
「철환아! 이 녀석 어지간히 치진 모양이구먼. 이제 그만 일어나라우.」
「가엾은 것…… 쯧쯧, 놔두라마. 조금이라도 더 자게 그냥 내버려 둬. 언제 잠이나 실컷 자본 적이 있언?」
「어제 보위원이 오늘 배치가 있으니까 여덟 시까지는 행정위원회 강당에 모이라고 했어요.」삼촌과 할머니가 주고받는 말소리에 나는 잠을 깨었다. 새벽녘에 다시 든 잠이 꽤나 달콤했다.
어느새 아버지와 미호까지 다 일어나 있었다. 아버지의 위통이 또 말썽을 부리는지 미호가 아버지의 가슴을 쓸어드리고 있었다.
나도 급히 일어나 비닐론 솜이불을 개어 한쪽 구석에 포개놓았다.
방안에는 벼룩이 우글우글하였다. 이불은 여기저기가 찢어져 너덜거렸다. 방바닥도 장판이 뜯어져 군데군데 흙바닥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래도 창문이 있고 장판을 해놓은 방에서 이불을 덮고 잤다는 사실이 아무래도 꿈만 같고 신기하였다. 이처럼 내 눈앞에 있는 색다른 환경이 바로 내가 이제까지 살던 수용소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작업반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어째 뭔가가 빠진 듯하고 할 일을 다 안한 것 같은 묘한 기분이었다. 공연히 서성이는 나를 삼촌이 재촉하였다.
「철환아, 빨리 하라. 곧 행정위원회 강당에 가야 해.」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아버지를 남겨놓고 나와 미호는 삼촌을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햇살이 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눈이 부셨다. 수용소에서도 이런 햇살이 비추었던가. 바깥 세상에는 마치 해가 두 개쯤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걸으면서도 시종 눈이 시어서 제대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찬란하고 신선하고 새로웠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휴우> 하고 내뿜었다. 바깥세상의 공기는 차면서도 달았다. 나는 십 년 동안이나 쌓인 증오와 굴욕의 그 모든 것을 토해내듯이 다시 한번 크게 심호흡을 하였다.
수용소 안이나 여기나 지리적으로는 다 거기가 거긴데, 피부와 와 닿는 이곳 바람은 그래도 수용소 안보다는 덜 매서운 것 같이 느껴졌다.
「저 눈 이젠 안 치워도 되겠구나.」
미호가 여관 앞마당에 수북한 눈을 보더니 진저리치며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지긋지긋하던 눈치우기를 떠올리고 있던 참이었다.
「삼촌, 이제 우린 어떻게 되는 거가?」
「가보면 알겠지.」
「어서 가자.」
삼촌이 걸음을 재촉하였다.
우리보다 몇 걸음 앞서서, 어제 우리와 함께 출소한 오사카 본부의 조총련 간부를 지냈던 현 씨네 가족들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걸음을 빨리 해서 그들에게 다가갔다.
「간밤엔 잘 잤어요?」
그의 맏아들 현룡이가 삼촌에게 말을 붙였다. 그의 어머니도 미소를 지으며 우리와 운인사를 하였다. 나는 또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침인사와 미소……. 수용소 안에선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가슴 한복판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는 해도, 극한 상황에서 벗어났다는 안도감과 여유는 숨길 수 없었다.
그러다가도 순간순간 나는 갑자기 긴장이 되곤 했다.
「반동새끼들, 꾀쓰지 말고 빨리빨리 움직이라.」
어디선가 작업반 보위원이 달려와 내 등을 몽둥이로 내리칠 것만 같았다.
나는 수리로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일 나가는 마을사람들 몇이 보일 뿐, 눈 덮인 마을은 평화스럽기만 하였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권총을 찬 군복차림의 보위원의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수용소에선 사방에 널려 있는 게 다 보위원들이었다. 그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없었다. 헌데도 분명 어디선가 몰래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는 보위원의 칼날 같은 눈초리가 있을 것만 같았다.
수용소 밖인 여기는 정말 그 몸서리치게 무서운 보위원들은 없는 것일까? 입만 벌리면 온갖 욕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손에 든 몽둥이는 화풀이의 도구로 심심하면 아무나 닥치는 대로 두드려 패던 보위원들. 그들은 피골이 상접한 몸에 누더기를 걸친 수용소 사람들 위에 제왕처럼 군림하였었다.
또 그들은 마치 훈련받은 감시견처럼 온종일 수용소 사람들을 감시하느라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인간의 부드러운 눈빛이 아니라 날카로운 바늘 끝 같았다. 그들과 눈만 마주쳐도 사람들은 온 몸이 찔린 듯 아팠었다.
그런데 지금 여기에 그들이 없다니, 정말 없는 것일까?
나는 실감도 안 나고 의심도 생겨 긴가민가하여 주위를 자꾸 둘러보았다. 마치 이번에는 내 쪽에서 그런 보위원들의 쏘는 눈초리가 된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는 마치 뱀을 만난 듯 전신이 굳어버렸다. 저만치서 눈 덮인 길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순간 <아, 보위원이로구나> 하고 숨을 죽였다. 몸을 뒤로 돌이킬 수도,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릴 수도 없었다. 도망간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점점 내게로 가까이 다가오는 보위원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를 다시 잡으러 오는 것일까 아니면 내게 무엇을 물어보려고 오는 것일까.> 나는 잠시 잊었던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쓰러질 듯 현기증이 일었고 등과 이마에 진땀이 솟았다. 삼촌을 올려다보았다. 그도 역시 공포에 질린 표정이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점점 가까이 온 그 사람은 분명 색깔만 다를 뿐 수용소의 보위원들과 똑같은 복장을 한 보위원임이 분명한데도 그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우리를 힐끗 쳐다보기만 하고 지나치는 것이었다. 우리는 습관대로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혀 절을 했다. 그러나 그는 우리에게 뒷모습만 보인 채로 묵묵히 길을 꺾어 걸어가고 있었다.
<아! 아니었구나.>
나는 무의식중에 멈추었던 숨을 크게 내뿜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그가 간 길을 힐끗힐끗 돌아보았다. 그가 가던 길을 다시 되돌아오는 기색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다리가 후들거려 더 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먹을 꼭 쥔 손바닥에는 땀이 촉촉이 배어 있었다.
요덕군의 군소재지인 마을은 제법 큰 편이었다.
계곡을 따라 띄엄띄엄 엉성한 판잣집이 부락을 이루고 있던 수용소와는 딴판으로, 가옥들은 모두가 반듯반듯하고 단정하였다. 규격에 맞는 블록 벽돌들이 고르게 쌓여서 지어진 집들은 아무리 작아도 내 눈에는 호화주택으로 보였다. 그런 집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보니 비로소 <이곳이 사람 사는 곳이구나> 싶었다. 길 건너편 쪽에는 우리 가족이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 평양에서 살던 것과 같은 아파트 건물도 두 동이나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들 김정일 생일을 맞아 횟가루를 희게 칠하였고 청소도 깨끗하게 해놓은 상태였다.
미호도 나처럼 얼떨떨해 가지고 여기저기 사방을 둘러보느라 여념이 없었다.
우리가 하룻밤을 묵은 여관에서 행정위원회까지는 기껏해야 200여 미터에 불과했지만, 사회에서 맞는 첫 아침 첫 외출길은 내가 분명 <새 세상>에 와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해주기에 충분했다.
갑자기 뒤쪽이 왁자해지더니 귀에 설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다보니 인민학교 어린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서 처음 들어보는 노래를 부르며 아스팔트길을 따라 학교로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 속에서 문득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회상하였다.

(중략)

요덕 정치범 수용소

(중략)

우리 가족이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끌려온 곳은 함경남도 남쪽에 위치해 있는 <요덕(耀德)군>이라는 산간오지였다. 사방이 해발 1500 미터가 넘는 험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침이 늦고 저녁이 일찍 찾아오는 곳이다. 북으로는 1724 미터의 백산과 1883미터의 모도산이 우뚝 솟아있고, 서로는 1517미터의 덕산과 1548 미터의 병풍산이 자리잡고 있다. 또 동으로는 1250 미터의 채봉령과 남으로 1152 미터의 매등산이 가로질러 있다. 이러한 심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입석천을 이루고, 계곡을 따라 흘러서 용흥강으로 이어진다. 용흥강은 원산과 호도반도 사이로 빠져나가는 강이다. 우리가 수용된 곳은 입석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었다.
요덕군에는 20여 개 리(남한의 면 단위와 같음)가 있는데 이중 구읍리, 입석리, 용평리, 평전리, 대숙리 등 다섯 개 리가 수용소 구역으로 요덕군 전체 면적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이 수용소의 정식 명칭이 <조선 인민경비대 2915부대>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칭 <15호 관리소> 라고 부른다.
이곳이 바로 정치범 수용소이다(북한에서는 수용소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다).
북한은 지주, 친일파, 종교인, 해방전쟁(6.25사변) 당시 치안대에 가담한 사람과,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해 가는 과정과 김정일 세습체제를 굳혀 가는 과정에서 숙청된 이른바 반당종파 분자로 분류된 사람들을 중범자로 취급하고 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당사자와 그 가족들을 사회와 완전히 격리시킨다. 당사자는 평안남도 동신이나 개천에 있는 국가보위부 교화소에 수용하지만, 그 가족들은 용평리와 평전리 지구의 완전통제구역에 수용하는 것이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오지 못하고 종신 수용되는 곳이 완전통제구역이다. 이 용평 평전지구에만도 3만4000명 정도의 정치범들과 가족이 수용되어 있다 한다.
구읍리, 입석리, 대숙리 지구는 혁명화 대상자들을 수용하는 구역이다. 여기에는 해외로 도주하려던 자, 체제를 비판한자, 외국에 나갔다가 들어와 보고들은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전파한 자와 그 가족들, 그리고 귀국자(북송교포), 의거자(월북자) 등이 수용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당사자만 들어온 사람들은 독신중대에 그리고 일가족이 들어온 사람들은 가족세대 구역에 구분하여 별도로 수용된다. 가족세대 구역도 원주민(북한출신) 마을과 귀국자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 가족이 수용된 곳은 귀국자 마을이었다.
혁명화 구역에는 독신자가 1,300여 명, 원주민 가족세대가 9,300명, 그리고 귀국자 가족세대가 5,900여 명이 수용되어 있다.
그래서 요덕군에 있는 15호 관리소 전체에는 모두 5만여 명이 수용되어 있는 셈이다.
이 지역은 이러한 용도와 걸맞게 경비도 삼엄하다. 수용소 전 지역의 경계선에는 산을 따라 높이 3~4미터 정도의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다. 지대가 얕은 곳에는 2~3미터의 담장이 있고 그 위에는 전기 철조망이 쳐져 있다. 또 고산지대에는 철조망 주변 곳곳에 함정을 파놓았다. 그 함정 바닥에는 참나무를 뾰족하게 깎은 참나무 창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철조망을 따라 1킬로미터 간격으로 망루로 된 감시초소가 있다. 그 망루에는 감시원이 항상 기관총을 거총 하고 눈을 번뜩이며 지키고 있다. 그 외에도 군견 두 마리를 끌고 수시로 외곽순찰을 하고, 가끔은 뜻하지 않은 곳에 매복조를 두기도 한다. 수용소의 경비는 이렇듯 물샐틈없이 주야 24시간을 독수리 눈처럼 지키고 있는 것이다.
15호 관리소를 경비하는 인민경비대 인원은 1,000여 명이며, 이에 대한 관장은 국가보위부 7국에서 맡아 하고 있다.
우리 가족의 15호 관리소 생활은 땔나무 해오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아버지를 따라 하루종일 산에 가서 서툰 도끼질을 하면서 혹시 어머니가 오지나 않았을까 궁금하여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손을 멈추고 집 쪽을 바라보았지만, 어머니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죄인의 자식들

수용소 안에도 학교는 있었다. 인민학교는 학제가 사회와 같은 4학년이었으나 고등중학교는 5년제였다(사회에서는 6년제임).

(중략)

한번은 어느 학생이 옆 사람과 소곤소곤 잡담을 하다가 선생에게 발각되었다. 량 선생은 그 학생을 겨냥하여 있는 힘을 다해 흑판 지우개를 던졌다. 그 아이는 얼떨결에 날아오는 흑판 지우개를 반사적으로 날쌔게 피했다. 그 바람에 지우개는 그 아이를 빗나갔다. 대신 바로 뒤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학생의 머리에 정통으로 맞고 바닥에 떨어졌다. 지우개를 맞은 학생의 머리와 얼굴은 분필가루를 뒤집어쓰고 하얗게 되었다. 그 모양을 본 학생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죽여 킥킥대고 웃었다. 그러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량 선생은 잡담하던 학생에게 달려가더니 박달나무 지휘봉으로 머리고 등이고 닥치는 대로 후려갈겼다. 마치 생물체가 아닌 물건을 두들기는 것 같았다. 그 학생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웅크리고 죽은 듯이 맞고만 있었다. 나는 저러다 죽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이 되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엿보았다.
「자기 계획도 제대로 못해내는 놈이…… 자유주의(몰래 작업이나 수업에 짜지고 자기 일을 하거나 노는 것)나 하는 주제에 어디서 함부로 지우개를 피해, 개새끼! 이제 다시 한번만 더 피했단 봐라. 그때는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게 해놓을 테니.」
선생은 분이 풀릴 때까지 실컷 두들겨 패고 나서야 매를 거두어들이더니 욕설을 퍼붓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참으로 목숨은 질긴 것 같았다. 그렇게 얻어맞고도 아이는 여기저기 흐르는 피를 닦으며 꿈틀거렸다.
세시간 수업을 하는 동안 서너 명이 더 선생에게 지적을 받고 매를 맞았다. 모든 수업은 그야말로 공포분위기 속에서 침도 못 삼킬 만큼 긴장된 채 진행되었다.
넷째 시간에는 각 조별로 오후에 할 일에 대한 과제가 주어졌다.
1조는 토끼풀 해오고, 2조는 박하 밭에 인분을 주고, 3도는 학교 뒷산에 돌을 쌓고……하는 식으로 과제를 주고 바로 점심시간으로 들어갔다.
나는 학교 뒷산에 돌을 쌓는 조에 속했다. 이 일은 학교 뒷산을 깎아내 평지를 만들기 위해 흙을 퍼 나르는 작업이었다. 흙을 파내 50미터 아래에 있는 입석천에 버리고 냇가에서 돌을 주워 와야 했다. 그 돌은 깎아낸 흙벽 부분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쌓는 데 쓰였다.
나에게 주어진 일은 흙을 퍼담아 냇가에 내다버리는 것이었다. 생전 이런 일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되어 쩔쩔 매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하는 것을 곁눈질해가며 겨우겨우 흉내내듯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할당량 30킬로그램 정도의 흙이 담긴 짐통을 지고 냇가로 가서 흙을 버리고 오는 것이었다. 열 살짜리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 30킬로그램은 여간 힘겨운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한번도 아니고 30번이나 왕복해야 했다. 그것은 엄청난 무리였다. 그러나 감히 아무도 불평을 할 수는 없었다. 곱게 자라 이런 일은 처음 해보는 나는 너무나 급작스럽게 닥친 변화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처음 열 번 정도는 그런 대로 이를 악물고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회가 거듭될수록 어깨는 허물이 벗겨져 쓰라렸고 다리는 휘청거리고 후들후들 떨려서 몸을 가누기조차 힘이 들었다.
감독과 선생들은 눈에 불을 켜고 감시를 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손을 놓고 있는 학생이 있으면 가차없이 몽둥이가 날아갔다.
새로 온 다른 학급 학생 하나가 짐통 무게에 못 이겨 비틀거리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 아이는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기진맥진하여 다시 쓰러졌다. 그의 입술은 깨지고 손에서도 피가 흘렀다.
「이 새끼, 어디서 농땡이질이야.」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선생이 곧 때릴 것같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다가왔다.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또 피가 터지도록 맞는 꼴을 보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이놈의 새끼, 새로 들어온 놈의 새끼로구나. 처음 들어온 놈은 어쩔 수 없구만.」
선생은 그 아이를 잡아 일으켜 세우고 욕만 하고 말았다.
「야, 이 새끼한테는 흙을 좀 적게 담으라!」
다행히 선생은 때리지는 않고 흙을 퍼담는 학생을 보고 지시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찜통은커녕 맨몸으로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며 계속 비틀거렸다. 이제는 선생도 어쩔 수 없는지 감독을 보고 「이 새끼는 나무 옆에 잠깐 눕혀 놓았다가 회복되면 다시 일을 시키라!」고 지시하였다.
그 애가 나무 그늘에 누워 쉬고 있자 그 옆을 지나는 아이들마다 욕질을 해댔다.
「저 새끼 어디서 꾀병을 쓰고 야단이가. 야, 이 새끼야 빨리 일어나 일하지 못하갔어! 이 씨팔놈, 누군 힘 안 드는 줄 알아?」
어떤 아이들은 일부러 그 옆을 지나치면서 그 아이를 발로 걷어차기도 하였다. 이곳에서는 아이들이고 어른이고 악다구니 밖에는 남지 않은 것 같았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조원 중에 한사람이라도 쓰러지거나 빠지게 되면 그가 할 작업량을 나머지 조원들이 떠맡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제 작업량도 힘에 겨운데 남의 일을 떠맡는다는 것은 정말 죽기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몸이 약해 쓰러진 사람은 마땅히 남에게 동정을 받게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저주와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일을 시작한 지 두어 시간쯤 지났을 때, 혁명역사 담당인 박태수 교원이 달려왔다. 그는 우리들의 작업을 중지시키고 모두 운동장에 집합하라고 소리쳤다. 모두 무슨 일이 났나 하고 수군거리면서도 한참 힘들던 터에 잘 되었다는 표정이었다. 어쨌든 운동장에 모여 있는 동안만큼은 일을 안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운동장으로 내려가면서 보니 교단 앞에 학생 여섯 명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벌써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모두 얼굴이 퍼렇게 멍들고 퉁퉁 부어 울고 있었다. 학생들이 운동장에 다 모이자 박태수 교원은 서슬이 시퍼래 가지고 교단으로 뛰어올라가더니 고래고래 악을 썼다.
「이 새끼들은 고의적으로 작업장을 이탈해 학교 뒷산에 가서 가래(추자목(楸子木)이라고도 하고 열매를 추자(楸子)라 한다)를 따먹었다. 다른 동무들은 열심히 일을 할 때 이 새끼들은 자유주의를 한 놈들이다. 오늘 내가 이놈들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갔다.」
박태수 선생은 자신이 이 아이들을 적발해낸 것이 자랑스럽다는 듯 나온 배를 앞으로 더 내밀면서 소리쳤다. 그리고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아이들에게 두 손을 곧게 펴고 높이 들라고 지시했다. 높이 쳐든 여섯 아이의 손은 모두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손뿐만이 아니라 입 언저리도 토인들처럼 까맣게 되어 있었다. 채 익지 않은 가래를 손으로 발겨먹다 보면 그 색소 때문에 까맣게 되는 것이다. 그 색소가 얼마나 지독한지 살에 묻어 배어들면 아무리 닦아내려고 해도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 여섯 아이는 아마 배가 고파서 몰래 산에 올라가 가래를 따먹다가 박태수 교원에게 발각된 모양이었다.
「두 손 든 상태에서 그대로 허리를 굽힌다!」
박태수 교원은 교단에서 뛰어내리더니 허리를 덜 굽힌 아이의 엉덩이를 발길로 걷어찼다.
「완전히 구부려, 새끼야!」
「손바닥을 땅에 대!」
「오른쪽 발을 들어!」
「체중을 두 손바닥에 실어야 한다. 만일 손바닥을 땅에 건성 올려놓는 놈의 새끼는 따끔한 본때를 보여줄 테니 요령주의(꾀를 부리는 것)할 생각은 하지 말라! 그럼 오른쪽 발을 내린다. 체중은 그대로 손에 싣고.」
「이제부터는 두 손바닥을 땅에 댄 채 뒷걸음질을 한다. 손바닥에 묻은 까만 진이 지워질 때까지 하는 거다. 자, 실시!」
이곳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 모양이었다. 박태수 선생의 능숙하고 체계적이면서도 기계적인 지시를 보면서 나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운동장을 반 바퀴도 돌기 전에 여서 아이의 손바닥은 다 벗겨지고 흙에 조금씩 피가 묻어나기 시작하였다. 나는 속이 메슥메슥하여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여서 아이들은 울면서 애걸하였다.
「선생님, 잘못했습네다. 용서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허리를 굽혀 온 체중을 바닥에 실은 채 운동장을 쓸고 도니 그 여린 손바닥이 견딜 일인가 말이다. 그러나 박태수 선생의 얼굴에는 자그만 동요의 빛도 없었다. 나는 그 여섯 아이들을 보며 현기증이 났다. 토할 것처럼 속이 막 뒤틀렸다.
드디어 한 학생이 손이 쓰라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박태수 교원은 그 아이의 얼굴을 발로 걷어차고 손바닥을 다시 땅에 대게 하고는 그의 손을 자신의 구둣발로 마구 짓이겨댔다. 여학생들 속에서는 간간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그곳에 모여 이 광경을 보던 모든 학생들은 사시나무 떨 듯 몸을 떨었다. 겁에 질리기도 했겠지만 박 선생의 야만적이고 잔악스러운 행동에 증오심이 끓어올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었으리라.
마침내 여섯 아이의 손끝이 모두 터지고 피가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이제 죽으면 죽었지 더는 못하겠다는 듯이 모두 울면서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박태수 교원은 그 정도로는 만족스럽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입가에 야릇한 웃음을 띠며 「일어섯!」하고 뒷걸음질을 중지시켰다. 그리고는 손바닥 검열을 시작하였다. 손끝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지만 손바닥 가운데에는 아직도 가래의 검은 빛이 보였다. 운동장에 모인 모든 학생들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들 손에 땀을 쥐고 박 선생의 다음 처분을 기다렸다.
「나는 한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가래 진이 다 벗겨질 때까지 한다고 분명히 말을 했다. 자, 다시 시작한다. 준비!」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지시가 떨어졌다. 학생들은 잠시 술렁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순간적이었다. 그저 속수무책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몸만 떨고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여섯 아이들은 엉엉 울면서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치켜올리고 손바닥만을 땅에 댄 채 가시 운동장을 돌았다. 그렇게 한 바퀴 다 돌고 나서야 박 선생은 「이제 그만!」하고 야수와 같은 기합을 끝냈다.
「오늘은 처음이니까 이 정도로 용서하지만, 또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면 그땐 정말 재미없어! 모두들 보았지? 너희들도 이 새끼들처럼 당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자유주의를 해봐!」
박 선생은 학생들에게 겁을 잔뜩 주고 나서 감독을 따로 불렀다. 그리고는 이 아이들에게는 다른 아이들보다 세시간 더 일을 더 시키고 나서 집에 보내라고 지시하였다.
우리는 작업장으로 다시 돌아와 일을 계속하였다. 약 한시간 가량 쉬긴 했지만 집합 전에 너무 힘을 쓴 탓인지, 또는 보지 못할 것을 참고 보아서인지 몇 번 왕복하지 못하고 맥이 빠지고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나는 다른 조원에게 부담을 주는 것도 싫고 또 그들의 손가락질과 눈총을 받는 것도 싫었다.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이겨내려고 했지만 속도가 점점 처치기 시작하였다. 딴 아이들이 두 번 다녀오는 사이에 아는 한번밖에 다녀오지 못하였다. 그러자 옆에 지나가던 아이가 「야, 이 새끼야, 너도 꾀병 부리려고 그러니?」하며 나를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휘청거리던 나는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뭐, 이 새끼가…….」
나는 화가 있는 대로 치밀어 그 아이에게 달려들어 싸워보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마음뿐 너무 지쳤는지 목소리조차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씩씩거리며 주저앉아서 그를 올려다보기만 하였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하루해가 다 가고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작업을 마무리짓고 다시 운동장에 모였다.
교장이 교단 위로 올라갔다.
「오늘 작업에서는 4학년 김철만, 중학교 1학년 한성형, 2학년 맹철수가 아주 열성적으로 일을 하였다. 지금 부른 학생들은 앞으로 나오라.」
일을 잘한 몇 사람을 앞으로 불러내더니 박수를 쳐주라고 하였다.
「오늘은 첫날이라 자기 책임량을 다하지 못한 놈도 집에 보내지만 내일부터는 어림도 없다. 자기 책임량을 다 마쳐야지만 집에 갈 수가 있다. 알갔나? 이제부터 집으로 돌아갈 텐데 집으로 돌아갈 대는 작업반 별로 줄을 서서 노래를 씩씩하게 부르며 가야 한다. 만일 줄과 발을 맞추지 못하거나 노랫소리가 작으면 다시 불러 운동장에서 연습을 시키고 보낼 것이다. 알갔나?」
교장의 훈시가 한바탕 끝났다.
담임교원을 학급 학생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지시했다.
「내일은 혁명역사 연구실 모임을 한다. 반드시 연구록 책과 연구실에 들어갈 때 신을 양말을 한 켤레씩 준비해 와야 한다. 알갔나? 신고 오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생활 첫날이 끝났다. 미호도 학교생활 하루만에 완전히 겁에 질려 있다.
「오빠, 내일부터 학교 안 다니면 안 되는가?」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미호와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앞으로 학교에 다닐 일을 걱정했다.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와 삼촌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노구를 이끌고 낮 동안 산에 가서 산나물을 캐고 나무도 해놓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와 삼촌도 돌아왔다. 그들은 지친 몸에도 땔나무를 들고 들어왔다.
「에구구, 빈 몸난 해도 힘이 들 텐데 이거까지 해오느라구…….」
안쓰러워 하시는 할머니 앞에서 삼촌은 「모두 이곳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야요」하고 담담하게 말하였다.
식구들은 모두 지쳐서 할머니가 지어주신 밥을 대충 먹고는 그대로 잠자리에 들었다.
할머니만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면서 잠에 곯아떨어진 어린 손주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게걸병

(중략)

수용소에서는 입쌀(흰쌀)이란 건 구경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실정을 파악한 할머니께선 올 때 가지고 온 얼마간의 식량을 아끼고 아껴 그래도 보름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집안에 아무것도 없는 이상은 배급되는 옥수수쌀에 의존할 수밖엔 별 도리가 없게 되었다. 옥수수쌀이란 것은 말만 <쌀>자가 붙어 있지 옥수수 낱알을 굵게 빻아놓은 것을 말한다. 이곳에서는 식량으로 하루 350그램의 옥수수쌀이 배급된다. 이 옥수수쌀은 통상 줄여서 <옥쌀>이라고도 불렀다. 잘 익지도 않을뿐더러 웬만큼 익혀도 까끌까끌한 맛이 없어지지 않는다. 또 소화시키기에도 아주 힘이 든다.
수용소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이 옥쌀밥을 먹고는 설사병을 만나게 된다. 지독한 설사병에 걸린 사람은 심지어 6개월씩 설사를 계속 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먹는 옥쌀을 몽땅 다 소화를 시킨다 해도 영양실조에 걸리는 판국인데 설사로 다 쏟아내기까지 하니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도 수용소에 들어온 지 3주일만에 이 설사병을 만났다. 할머니의 헌신적인 간호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렇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수용소 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시기가 바로 처음 1년 간이다. 이 기간을 무사히 견뎌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된다고도 볼 수 있다.
우선 처음에 아무 영문도 모르는 채 수용소로 끌려온 사람들은 그 정신적 충격을 견뎌내기가 무척 힘이 들다. 게다가 식량이라고는 매일같이 소화도 안되고 영양도 없는 옥쌀만 먹어야 한다. 그리고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중노동에 시달린다. 또 집안이고 옷이고 머리고 간에 이와 빈대, 벼룩 등이 득시글거리게 된다. 이런 생활을 계속하다 보면 영양결핍과 불결한 환경이 초래하는 전염병을 피할 도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병으로는 펠라그라와 폐결핵, 위장병, 치질, 늑막염, 동상 그리고 정신병이 있다.
이 가운데 펠라그라는 제일 잘 걸리는 병으로 이것은 영양 부족에서 오는 일종의 피부병이다(pellagra : 비타민B군의 하나인 나이아신의 함량이 적어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 나라에선 발생률이 높다. 지중해 연안과 미국에 유행하였으나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불 수 있음.
손발. 목. 얼굴 등의 홍반(紅斑). 신경장애. 위장장애를 일으키기도 함).
수용소에서 옥쌀만 먹는 사람들에게 이 병은 공포의 대상이다. 대부분의 수용소인들이 다 이병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용소 안에서는 이 병을 <개병(개를 먹어야 낫는다고 함)>이라고도 부른다. 이 병에 걸리면 첫 증상이 손부터 시작하여 얼굴에 이르기까지 마른버짐이 심하게 핀 것처럼 피부가 거칠어지고 껍질이 벗겨진다. 노인들은 특히 손톱이 뒤로 젖혀지는 증상을 보인다.
또 못 먹어서 생기는 병이니 만큼 사람이 게걸스러워진다. 먹을 것을 탐내는 정도의 통상적인 게걸스러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 먹을 수 잇는 것은 뭐든지 닥치는 대로 입에다 처넣는 병적인 증상이다. 개구리나 뱀, 나무열매뿐 아니라 쥐까지도 남아나지 않는다. 살아남기 위한 주음과의 처절한 싸움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게걸병>이라고도 부른다.
영양실조 현상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아버지가 자식 몫의 밥까지 먹어치우고도 눈만 끔벅거리고 앉아 있다. 눈에는 계속 먹을 것에 대한 환상만 나타난다.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형태만 사람이지 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짐승과 진배없다.
이러한 증세가 더 악화되면 그때는 아무런 음식도 입에 대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죽고 만다. 그러다가도 어떻게 운이 좋게 살아나는 사람도 이따금씩 있지만, 이미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폐인이 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났다고 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어떤 사람은 정신이 완전히 휙 돌아서 미쳐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정신이상이 된 사람들은 따로 모아서 격리 수용하도록 되어 있다. 정신병자를 격리 수용하는 곳은 1작업반과 마주 바라다 보이는 강 건너편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수용소 사람들은 이곳을 <17호>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모두 300여명 정도의 정신이상자가 수용되어 있다. 이 17호 건물은 정신병자들이 탈출하거나 난동을 부려 때려부술까 봐 유일하게 철판을 용접하여 지은 것이다. 또 정신병자들에게는 다른 사람들과 쉽게 구별이 될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흰옷을 입혀 놓았다.
그러나 정신병자라고 해서 노동에서 제외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는 호박구덩이를 파게 한다든가 밭을 매게 한다든가 하는 단순노동을 전담시켰다.
정신병자들은 명령이나 말로는 통제를 하기가 몹시 힘이 들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정신병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상밥-중밥-하밥>이라는 제도를 만들었다. 일을 잘하거나 말을 잘 듣는 사람에게는 밥사발 위로 밥이 올라오도록 퍼주는 <상밥>을 주고, 보통인 사람에게는 밥사발과 수평 되는 높이까지 밥을 퍼주는 <중밥>을 주고, 일을 못하거나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에게는 밥사발에서 패이게 밥을 퍼주는 <하밥>을 준다.
누구나 배고파하는 이곳에서 정신병자를 통제하는 데에는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한다.
정신병동 주변에는 항상 무장한 경비대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잇다. 또 환자들이 밖에서 일을 할 때에도 무장군인들이 지키고 서 있다. 이 무장군인들이 하는 일은 지키고 서 있다가 갑자기 발작을 하거나 일에 태만 하는 사람을 총탁(총개머리판)으로 사정없이 내리치며 구타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단 <17호>에 들어간 사람들은 거의가 살아 나오지 못하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고 된다.
심한 영양실조와 혹독한 노동에서 오는 육체적 부담은 수용자들에게 펠라그라뿐 아니라 많은 질병을 가져다준다. 특히 수용소에는 폐결핵과 간염을 앓는 사람이 많다. 그 중에는 각혈을 하는 등 심한 개방성 결핵을 앓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 사람들은 깊은 골짜기 속에 있는 결핵병동에 따로 격리 수용된다.
이 결핵병동이라는 곳은 어떤 의료시설이 있거나 약을 투여하는 곳이 아니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는 걸 예방하려고 그냥 격리만 시켜놓은 것이다. 그곳에서 기적적으로 병이 낫게 되면 참으로 다행이지만, 거의 대부분 이 병동에 들어온 사람들은 결국 죽고 만다. 이 병동에는 약 200여 명의 사람들이 격리 수용되어 있다.
이외에도 수용소 사람들이 많이 걸리는 병에 간염이 있다. 간염에 걸리면 초기에는 얼굴에 노란 꽃이 피어난다. 그러다가 증상이 점점 악화되면 몸은 바싹 마르면서 배만 임신부처럼 불룩하게 튀어나온다. 배에 물이 차기 때문이라고 한다.
간염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수용소 아이들의 대부분은 기아와 질병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그러면서도 눈망울은 툭 불거져 나와 있고 배도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이 처음엔 영 사람 같아 보이지 않았다.
이 수용소 안에는 정신병동과 결핵요양소 말고도 사람은 격리 수용하는 곳이 또 한군데 있다. 바로 <구류장>이라는 곳이다.
구류장은 물론 아픈 사람을 수용하는 곳이 아니다. 말 그대로 수용소의 규정을 어긴 사람, 물건을 훔친 사람, 은밀히 연애를 한 사람, 그리고 보위원 또는 감독의 지시에 불복한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구류>시키는 곳이다.
<구류장>에 갇힌 사람들 중에는 밭에 있는 옥수수나 콩을 훔치다가 발각된 경우가 가장 많다. 결국 배고픔이 유죄인 것이다. 또는 보위원이나 감독에게 미운 털이 박혀 들어간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한 달간 구류장 신세를 지고 나오게 된다.
이 구류장은 보위원 사택마을의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구류장 안은 철창으로 된 좁은 감방이 복도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그 가운데 복도로 간수가 계속 왔다갔다하면서 감시를 한다.
일단 이곳에 들어온 사람은 아침 5시에 기상한 이후부터 밤 12시 취침하기 전까지 계속을 무릎을 꿇고 안장 있어야 한다. 단지 무릎을 펼 수 있는 시간은 식사시간과 대소변을 볼 때뿐이다.
만일 간수의 허락 없이 무릎을 펴거나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다가 발각되면 무지막지하게 매를 맞는다. 오랜 시간을 꼼짝없이 무릎 꿇고 앉아 있다보면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게 된다. 피가 통하지 않는 다리는 쿡쿡 쑤셔오고, 허리는 끊어질 듯이 아프다. 그 고통이 매맞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차라리 매맞는 것을 각오하고 몸을 움직이기도 한다.
이처럼 아무런 운동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생활을 한 달씩이나 하고 나면 아무리 건강했던 사람이라도 폐인이 되다시피 한다. 구류기간이 끝나고 혼자서 걸어나오는 사람이 아직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오는 사람은 아주 양호한 편이고, 대부분은 다 들것에 실려서 나오게 된다.
따라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기아와 질병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한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같이 무자비한 체벌을 받지 않도록 처신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평토해치운다

(중략)

수용소 안에는 우리 가족처럼 죄 지은 장본인을 제외한 가족만 들어온 경우도 있었지만, 죄 지은 장본인만 들어와 <독신자 합숙소>에서 무리생활(집단생활)을 하는 사람도 꽤 많았다. 그런가 하면 장본인은 물론 그의 가족도 함께 생활하는 집안도 있었다.
우리같이 장본인이 함께 있지 않은 집안에서는 장본인이 아무리 원망스럽고 저주스럽더라도 그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장본인과 가족이 함께 사는 집에서는 큰소리와 싸움과 욕설이 끊이지 않았다. 집안을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다른 가족들까지 다 고생을 시키는 장본인은 영락없이 밸풀이(화풀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집안이 많은 원주민(북송교포와 구별하여 북한 태생들을 이렇게 부름) 마을에서는 <000네 집에서는 자식들이 아버지를 때렸다더라> <000의 엄마는 남편을 굶겨 죽였다더라> 는 소문이 심심지 않게 들러왔다. 이런 경우에는 죄를 지은 장본인이 죽으면 다른 가족들은 바로 사회로 나갈 수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싸움이 나면 자식이 아버지에게 또는 부인이 남편에게 <빨리 죽어달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옥의 형국과 같은 이곳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치고 멍들대로 멍든 몸과 마음은 선량한 사람들도 마음에 독을 품게 만들었다. 가족들로부터 독설을 듣는 그 장본인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예심(조사 받는 과정)을 거치면서 모진 고문을 받았기 때문에 몸 한구석 어디 멀쩡한 데가 없다. 따라서 그렇게 허약해진 사람들은 결국 이곳 생활을 오래 견디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들은 우선 그 허약한 몸으로 이곳에서 할당해주는 중노동을 견디지 못한다. 이미 병들어 있는 몸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뒤떨어진다. 그렇게 되면 설상가상으로 보위원이나 감독의 구타가 가해지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가 몇 차례 반복되고 나면 살 수가 없을 지경이 되고 만다. 거기에다가 온 식구들의 눈총과 구박까지 한 몸에 받고 나면 쓰라린 자책과 자괴(自愧)에 시달리게 되고, 얼마 못 가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 중에는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간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나와 짝인 배정철이가 이틀동안 결석을 했다. 이틀 전 우리가 화목(땔나무) 작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담임교원에게 급하게 불려간 뒤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이틀 뒤, 정철이가 학교에 나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아는 척을 하였으나 정철이는 갑자기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통 말이 없었고, 초점 없는 눈에서는 이따금씩 눈물만 흘러내렸다. 그리고 가끔씩 무어라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자세히 들어보니 「아버지, 아버지」하는 것이었다.
「야, 무슨 일이가? 너희 집에 무슨 일이 생견?」
나는 그와 각별히 친하게 지내던 터라 궁금하여 아무도 없는 틈을 이용해 그에게 물었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왜? 무슨 일루다?」
「자살하셨어.」
「뭐? 그럼 그게 너의 아버지였구나.」
얼마 전 삼촌에게서 어떤 귀국자 한사람이 림산골에 들어가 나무에 목을 대 자살했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정철이 아버지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의 아버지 배영삼 씨는 자신 때문에 다른 가족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유서를 써놓고 림산골에 들어가 자살한 것이었다.

정철아, 못난 아버지는 먼저 간다. 너희 어린것들을 두고 눈이 제대로 감길지 모르겠다. 너희들은 나를 너무나 무책임한 애비라고 탓할지 모르겠지만, 이 애비로서는 어쩔 수가 없구나. 아무런 죄를 지은 것도 없으면서 자식들로부터 원망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지 너는 모를 게다. 너희들이 나로 인해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을 더 이상 눈뜨고 보지 못하겠구나. 내가 살아서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망정 짐이 된다면 더 살아 무엇하겠니. 부디 어머니 잘 모셔라.
– 못난 애비가

그가 죽음을 결심했을 때는 분명 자신이 일본에서 가족을 이끌고 북조선으로 온 것에 대한 후회도 컸을 것이다. 또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북조선 체제에 대하여도 할 말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제를 비판하는 말은 일언반구도 유서에 쓰지 않았다 한다. 그것은 아마 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라고 우리 아버지는 말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가보니 우리 식구들을 집에 가두고 시신도 보여주질 않았어. 다음날 보위원 새끼가 와서 온 부락사람들을 모아놓고 <배영삼은 조국과 민족을 등지고 자살한 민족반역자>라고 말을 했어. 그리고 그 새끼 말이 우리 가족은 모두가 민족반역자래. 그래서 남은 가족들은 몇 년 더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거야.」
정철이는 옷소매로 눈물을 문지르며 계속해서 「개새끼, 개새끼」하고 욕을 했다.
그의 말대로 이곳에서는 자살한 사람은 물론 가족도 민족반역자로 낙인찍히게 되고, 수용기간도 5년 더 연장시킨다. 이렇게 보위부가 별별 수단을 다 써가며 자살을 막으려 하지만, 자살건수는 줄어들지 않았다. 한 달에 몇 건씩은 꼭 자살사건이 발생하였다. 자살은 통상 목을 매지만, 양잿물을 먹는 사람도 많았다.
자살한 사람의 시신은 가족에게 알리지도 않고 그 현장에서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가지고 간다. 그리고는 인부들을 시켜 사람들이 다니는 길을 파게 하고 시신을 묻는다. 봉분은 물론 없다. 그곳은 다시 예전처럼 평평하게 길을 만든다. 그 이유는 아무도 묘를 찾을 수 없게 하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이것을 <평토해치운다>고 말한다. 즉 자살한 사람은 모두 평토해치운다. 하지만 시신매장에 동원된 인부들이 모두 같은 처지에 있는 수용소 노역자이기 때문에 그중 어느 한사람이 보위원 몰래 가족에게 알려주는 것이 통례이다.
만일 매장 장소를 가족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이 보위원에게 발각되는 날에는 그 인부는 남아날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그 가족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길을 밟고 지나가면서 발 밑에 있을 고인의 명복을 비는 수밖에 없다.
이렇게 평토해치우는 경우는 자살자 외에도 사형 당한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토끼사 증축사고

정철이 아버지 자살사건이 있은 지 며칠이 지났다. 웬일인지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특별히 하루를 쉬라면서 선심을 썼다. 왜 쉬라고 하는지 영문은 몰랐지만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었다.
나와 미호는 온종일 정신 없이 잠만 잤다. 독신자 셋이 탈출을 하다가 잡혔는데 그 사람들을 오늘 사형에 처한다는 말을 잠결에 들었으나 눈이 미처 떨어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깊은 잠에 빠져버렸다.
실컷 자고 깨어 보니 시간은 어느새 오후 3시나 되어 있었다.
할머니는 벌써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해다 놓으신 터였다.
「할머니, 누가 도망가다 잡혔다며?」
「그렇다는구나. 나는 잠자는 줄 알았더니.」
「그럼 그 사람들은 어떻게 돼?」
「사형시킨다고 어디로 모이라고 해서 네 애비랑 삼촌도 모두들 거기 갔단다.」
「어딘데?」
「2반 작업반 앞에 있는 강가라든가 그랬는데 잘 모르겠다.」
「할머니, 나도 가볼까?」
「아서라. 어딜 간다구 그래. 아이들은 못 가게 되어 있어. 그게 무슨 좋은 구경이라구.」
나는 호기심이 동했으나 할머니가 극구 제지하는 바람에 그만두기로 하였다. 대신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잠을 잤다.
아버지와 삼촌은 저녁 8시 반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삼촌, 도망가려던 그 사람들 어떻게 됐어?」
「…….」
나는 아버지와 삼촌에게 몇 번이나 물었으나 모두들 침통한 표정만 지을 뿐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 이튿날.
학교에 나가니 아이들이 수군대며 온통 어제 있었던 총살형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중 사형장면을 몰래 보았다는 아이가 있어서 우리는 모두 그 아이 둘레에 모여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만 들어도 몸서리가 쳐졌다.

어제 오전 11시쯤 입석리 2작업반 근처 강변에 있는 사형 집행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 앞에서 군복차림의 관리소장이 종이를 펴들고 뭔가를 열심히 읽었다. 소장 뒤편에는 사람 키 만한 말뚝이 세 개 박혀 있었다. 사람들이 몇 천 명은 될 정도로 많이 모여 있었지만, 소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입석천의 물소리 외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소장의 말이 끝나자 세 남자가 보위원들에 의해서 끌려나왔다. 보위원 둘이 양옆에서 한사람씩 부축하고 있었으나 제 발로 걷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질질 끌려왔다. 얼마나 얻어맞고 시달렸는지 이미 반죽음을 당한 것 같아 보였다.
입석천 뚝 밑에 박아놓은 나무기둥에 탈주자들을 세우고 밧줄로 묶었다.
탈주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실성을 했는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그래도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곧이어 「사격준비!」하는 지휘관의 구령이 떨어졌다.
「쏴!」
「탕―탕―탕―.」
지휘관의 손이 내려지자 아홉 자루의 총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그러자 세 사람의 머리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마에서는 선홍색 피와 흰 골이 쏟아져 나왔다.
「다시 사격준비! 쏴!」
「탕, 탕, 탕」
이번에는 세 사람 모두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사격준비! 쏴!」
마지막 총소리가 나자 세 명의 탈주자는 나무토막처럼 그 앞에 깔려 있던 거적 위로 쓰러졌다.
지휘관은 탈주자의 시신을 하나씩 발로 젖힌 다음 마지막 보고를 하는 것이었다.
「민족반역자 ○○○, ×××, △△△를 인민의 이름으로 처형했습니다.」
보고가 끝나자 보위원과 경비병들이 재빨리 시신을 거적에 둘둘 말더니 빈 트럭에 던져 올린 다음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형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는 아이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다른 아이들은 자기들이 곧 사형 당할 입장이라도 된 것처럼 숨도 크게 쉬지 못했다. 그 아이 역시 몇 번씩이나 중간 중간에 생침을 삼키고 이야기를 잇지 못하였다.
나 역시 생전처음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는 터라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총알이 들어간 자리는 보이지 않지만, 총알 나온 자리는 한 뼘 넘는 구멍이 난대.」
「그런데서 총 쏘는 군인들은 특등사수라서 세 발 모두 한 구명에 맞는대. 그래서 뚫린 구멍이 크다더라.」
속이 뒤집히며 어찔어찔 현기증이 나던 나는 그 말에 온몸에 비늘처럼 소름이 돋았다. 나는 도저히 더 이상 그 자리에 버티고 있을 수가 없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하루종일 그 아이의 이야기가 귓전을 때리고 머릿속을 맴돌면서 어린 나를 괴롭혔다.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자꾸 처형장면이 떠올랐다.
<총알을 아홉 발씩이나 맞으면 얼마나 아플까?>
<총알을 맞을 때 머리가 더 아플까 아니면 가슴이 더 아플까?>

(중략)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중략)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쥐 한 마리를 잡는 행운을 누렸다. 쥐도 워낙 노리는 사람이 많아서 한 마리 잡으려면 며칠씩 잠도 못 자면서 공을 들여야 했다. 쥐를 잡아 가죽을 벗겼다. 쥐 고기는 불에 구워먹으면 특요리에 해당되는 별미였다. 그 가죽은 물에 깨끗이 빨아서 그늘에 말렸다. 비록 손바닥보다 좀 작긴 하지만 털이 있는 가죽이라서 헤진 무릎에 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쥐 가죽은 생각보다 질기지 못하여 곧 찢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 쥐 가죽을 신발에 깔창으로 깔아보았다. 안성맞춤이었다. 털이 있어서 쑥보다도 보드랍고 촉감도 나쁘지 않았다. 쥐 고기는 수용소 사람들을 영양실조에서 구해주는 유일한 고기였기 때문에 흔하지가 않았다. 수용소 안에서는 이처럼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수용소에는 쓰레기통이나 쓰레기 소각장 같은 것이 없다. 그 이야긴 곧 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찌꺼기가 남는 법도 없고, 버릴 옷도 없으며, 못쓰는 종이 한 장이 없기 때문이다.
수용소 사람들에게 있어서 겨울은 이처럼 잔인하기만 한 계절이었다.

(이후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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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구입 문의 : 02-732-8650, 02-723-6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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