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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11일 (화요일)

[봄밤의 총기 도난사건 3부] 그 날의 밝혀진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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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총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총 이미지 / 사진=pixabay

그들은 감옥 안에서 모두 각자의 방으로 흩어져 취조를 당했다. 필요에 따라 엄마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혹은 형제와 부부를 서로 만나게 했다. 그들의 말에 확실한 증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한두 달이 지나자 감옥 안의 고문을 견디지 못해 네 사람의 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힘이 세고 드살이 세던(드세던) 여자도 보위부의 취조를 견디기 힘들어 온몸에 부종이 오고 말이 아니었다. 보위부의 계호원들은 악당과 같았다. 팔뚝 같은 나무 각자로 두들기다가 몽둥이가 끊어져 나가야 계획이 끝난다. 매일 그렇게 달려들고 그렇게 때린다. 네 사람은 들어올 때는 억척같은 몸들이었지만 나중엔 상할 때로 상해서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맞을 때마다 그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사람이 아닌 짐승의 소리였다.

잡힌 지 세 달이 되어오자 손 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여자와 아들들만 마주 세워 놓았다. 더는 견딜힘이 없이 약해진 여자가 거짓 증언을 하기 시작했다.

“맏아들이 대학에서 늦게 돌아오다 마지막 열차를 탔는데 총을 훔쳐 집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걸 내가 숨겨두었다가 국경에서 사람들을 불러내 그들을 통해 남조선(한국)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여자는 자백서에 그렇게 쓰고 지장까지 찍었다. 그들을 잡아들인 보위부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매일같이 쫓기는 신세인 국가보위부는 도(道) 보위부를 추궁했고, 도 보위부는 손 씨네 일가를 사건의 목표물로 찍어 가짜를 만들어서라도 문제를 풀어버릴 계획이었다. 보위부 입장에서는 증거를 남겨야 사건을 마무리 지을 수 있고, 더는 추궁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에 자백을 받기 위해 애썼다.

여자는 매일같이 맞던 고문에서 잠시 해방되었다. 증거를 만들어낸 보위부는 환성을 지르며 아들들의 자백까지 마저 받아내려고 급하게 서둘렀다. 아들들의 지장만 받아내면 사건은 마무리에 들어간다. 보위부는 아들들에게 엄마가 다 불었으니 맞지장을 찍으라고 강요하기 시작했다.

보위부는 여자와 아들들을 따로 따로 마주세우고 “네 엄마가 다 불었다. 봐라. 너의 엄마는 이미 지장을 찍었다. 명백한 증거자료다” 하고 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들들은 한결같이 거부했다. 여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매 맞아 검푸르고 누르께해진 얼굴에 풀어진 듯한 동공은 어디를 보는지 딱히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아들들과 마주섰는데 아들들을 보는 눈빛이 아니었고 허공을 더듬는 것 같았다. 계호원들은 계속 소리를 질러댔고 엄마가 보는 앞에서 아들들을 때리기 시작했다.

“총을 남조선에 넘겼다고 여기다가 지장만 찍으면 너희들은 살려주겠다.”

그들이 죽어도 하지 않았다고 뻗대자 회유가 시작되었다. 아들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안다. 둘 다 만기 군사복무 10년을 마친 제대군인들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없는 지옥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장을 찍으면 그들의 목숨은 끝이었다.

두 아들은 여자의 수의를 잡아 흔들며 소리를 질러댔다.

“엄마, 제발 정신 차려요. 우리가 언제 총을 훔쳤어요? 총이 없어진 날 저녁 엄마랑 우리랑 함께 집에 있었는데 무슨 소리를 합니까? 엄마 제발 정신 차려세요. 우리는 총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총을 훔치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이 엄마를 껴안고 흔들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여자는 끝내 혼절하고 말았다. 아들들은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끝내 지장을 찍지 않았다. 여자는 간신히 정신이 돌아오면 온전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지. 총을 훔치지 않았어. 보위원이 총을 훔쳤다고 하라고 했어. 이 종이는 가짜야. 이 사람들이 만든거야. 그래야 너희들이랑 나랑 살려준다고 했어’하고는 다음날 다시 만나면 또 총을 훔친 게 사실이라면서 정신없는 소리를 마구 지껄여댔다. 훗날 두 아들은 당시 심경에 대해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그 자리에서 피라도 토해서 아니라는 증언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천신만고 끝에 누명은 벗었지만… 


이런 일상은 매일같이 반복되었다. 자기 방에 돌아온 두 아들들은 한 평씩 밖에 안 되는 서로 다른 방에서 키 낮은 벽체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이발(이)로 손가락을 물어뜯었다. 뚝뚝 떨어지는 피로 콘크리트 벽체에 혈서를 쓰기 시작했다.

“나도, 엄마도, 아버지도, 형님도 총을 훔치지 않았다! 총이 없어진 날 우리 모두는 집에 있었다.”

보위원들은 그들이 쓴 혈서를 보고 콧방귀를 쳤다. 아무리 그들이 뻗대도 보위부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들들을 항복시키지 못한 보위부는 그들을 따로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서 마당에 끌고 나왔다. 그때 둘째아들이 소변이 마렵다고 하면서 보위부의 울타리 벽에 붙여 지은 변소에 들어가게 되었다. 호송원이 변소 앞에 지키고 섰다. 변소에 들어온 둘째는 작은 창문으로 뛰어올라서 밖으로 탈출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둘째는 경보 제대군인이었다. 훗날 둘째는 얼마나 몸이 상했으면 그 작은 개구멍 같은 창문으로 몸이 빠져 달아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얘기했다고 한다.

그는 달아나서 숨을 곳을 찾지 않았다. 그대로 총알같이 달려 체신소(우체국)로 찾아 들어갔다. 그는 전화로 평양에 있는 외삼촌을 불러냈다. 그는 지금의 사태를 울먹이며 말해주었다. 국가보위부에서 일하는 외삼촌은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외삼촌은 이 사태를 즉시 국가보위부에 알리고 차를 타고 함경북도 보위부로 내려왔다. 그는 미친것처럼 날뛰었다. 이 사태가 도 보위부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손 씨네 가족들이 감옥 안에서 다 죽은 뒤라면 외삼촌은 물론 온 집안이 다 그 죄를 뒤집어쓰고 풍지박산이 날 뻔했다.

그 덕으로 조카들의 목숨은 건질 수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도 보위부에서는 그들 부부만은 끝내 내놓지 않았다. 이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감옥에 갇힌 지 두 달 만에 손 씨는 고문을 견디지 못해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고 한다. 여자도 아들들이 나온 지 며칠 만에 감옥 안에서 옥사 당했다. 아들들이 여자와 마주섰을 때는 아버지인 손 씨가 죽은 상태였다. 여자도 며칠을 견딜 수 없는 몸 상태였다. 여자가 자백서에 손 지장을 찍어놓았을 때는 배에 복수가 차서 임산부처럼 불어나 있었고 정신이 들락날락하는 상태였다. 그때 여자는 이렇게 고생시키지 말고 차라리 나를 빨리 죽여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손 씨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끝내 건지지 못하고 보위부의 감방 안에서 시신도 건지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보위부에서 죽은 시신은 가족이 가져가지 못한다. 그들 부부는 무덤도 없이 사라졌다.

뒤에 남은 사람들의 운명


총을 잃어버린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병사의 아버지는 평양시내의 어느 구역 인민위원회의 간부라고 하고 엄마는 당 간부라는 말이 떠돌았다. 사람들은 잘 못 만난 세월 때문에 병사가 그렇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그 날 병사는 부대에서 떠날 때 옥수수 밥덩이 두 개와 돈 20원이 노자였다고 한다. 긴급한 통신을 가지고 300리나 되는 먼 길을 갔다가 그 자리에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얼마나 피곤했으랴, 얼마나 배가 고팠으랴, 얼마나 힘들었으랴. 얼마나 지쳤으면 달리는 열차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잠들었겠는가.

자식들을 군대에 내보낸 이 나라의 어머니, 아버지들은 자기의 아들처럼 가슴 아파했고 눈물을 머금었다. 끝내 병사는 살아남지 못했다. 군사재판에 넘겨지고 군 보위부 감옥 안에서 정신병자가 되어 자살하고 말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부모는 자기 직업에서 일을 했을까? 그들은 자식을 잘 못 키운 연대적 책임을 지고 직위에서 물러났다. 자식도 잃고 직업도 잃은 그들, 그들이 가야 할 종착점은 과연 어디일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지듯이 아프다.

감옥에 갇혔다가 나온 손 씨의 아들들도 운명이 길지 않았다. 빛도 없는 감옥 안에서 눅눅한 공기만을 마시며 잠도 제대로 못자고 먹을 것도 변변히 못 먹고 장작을 패듯 얻어맞은 그들은 그 어혈로 얼마 살지 못했다. 변소 뒷창문을 뛰어 넘어 기어이 누명을 벗고 목숨을 보존한 둘째는 감옥 안에서 얻은 병으로 나와서 1년을 못 넘기고 죽었다.

부모를 잃은 뒤 손 씨 형제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손 씨의 맏아들은 죽어가는 동생을 그대로 볼 수 없어 집을 팔고 약도 사고 먹을 것도 사들였지만 며칠을 가지 못했다. 북한에서 집을 판 돈을 떠먹자면(살자면) 한 달이면 족하다. 결국 감옥에서 나온 다음 해에 장가도 못가고 죽었다.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차디찬 방안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대학에 다니던 맏아들은 학업을 그만두고 여기저기 떠돌며 다녔는데 그도 결핵으로 시름시름 앓았다고 한다. 막내아들은 꽃제비가 되어 거리를 떠도는 신세가 됐다. 손 씨네 일가는 이렇게 풍지박산이 났다.

총 한 자루에 얽힌 비극적 운명이 참 많다. 손 씨네 일가 5명, 병사의 일가, 그리고 매일같이 볶인 주민들, 온 나라가 감옥이다.

탈북할 때까지 쓴 맹세문


슬픈, 우울, 남성 / 사진=pixabay

사라진 총은 우리에게 질긴 악연을 만들어주었다. 그 때부터 매일같이 보위부, 보안서는 아침 저녁으로 동네에 들어와서 총을 훔친 자가 있으면 지금이라도 스스로 내놓으면 용서 할 테니 제발 내놓아라, 또는 총을 훔친 자가 무서워서 어느 집 밭 같은 곳에 던지고 달아날 수 있으니 보면 제때에 신고해 달라고 선전사업을 하였고 그 뒤끝에 우리들에게 총을 훔치지 않았다는 맹세문을 매일 쓰게 했다.

매 세대가 쓰는 맹세문의 내용은 같지만 글을 쓴 방식은 서로 달랐다. 종이규격은 규정지어 주었는데 생활총화노트(A4용지 절반)규격이었다. 나는 그 때 맹세문을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절대로 총을 훔치지 않았다는 것을 맹세한다. 만약 누가 총을 우리집 근처에라도 던지고 갈 수도 있으니 어디선가에 총이 나타난다면 무조건 보위부에 알리겠다. 또한 주민들 사이에서도 이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으면 보위부에 알리겠다. 당에서 하는 일들에 의견을 부리지 않겠으며 또한 마약을 절대로 하지 않겠으며, 비사회주의 요소들인 남조선 방송들과 외국도서들도 보지 않겠다는 것을 맹세한다.”

처음에는 맹세문을 매일 새로운 종이에 쓰게 했지만 주민들도 지겨웠고 그 숱한 종이장을 걷어가는 보위부도 시끄러웠던지 새로운 규정을 내놓았다. 새로 만든 규정은 맹세문을 다시 쓰게 하고 주민들이 그 맹세문을 매일 아침 들여다보고 하루일과를 시작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인민반 장부책을 하나 만들어서 오늘도 맹세문대로 살겠다는 것을 다짐하고 자기 이름 옆에 사인하는 형식을 택했다. 그렇게 5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그 총은 여전히 찾지 못했다. 내가 북한을 떠나는 날까지도 그 질긴 총 찾기 운동은 여전히 벌어졌으며, 패잔병 같은 군인들이 뒤진 산을 또 뒤지며 오르내렸다. 총을 훔친 자가 어느 결에 와서 산에 버리고 갈수 있다는 생각으로 찾는다고 했다.

* 편집자주 :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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