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위사에 밀리던 김영룡, 의문의 죽음

▲ 구 소련의 민주화시위

국가보위부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인해, 80년대에 이르러 북한내부에는 정권에 도전할만한 세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지방주의, 봉건주의 잔재도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극히 쇠약해졌다. 반대파들을 수용소에 처넣고 출신성분이 나쁜 사람들은 탄광, 광산으로 추방해 북한 정권은 가장 안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었다.

문제는 밖에서 들어오는 ‘자유화 바람’이었다.

김정일은 1992년 11월 보위부를 방문해 “당, 행정업무에 간참(간섭과 참견)하지 말고, 간첩만 잡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소련과 동구라파 나라들이 다 망했다. 우리가 지금 해이되면 내일은 쓴맛을 본다. 사회주의가 망하면 가장 첫 번째 숙청대상은 당과 보위기관 일꾼들이다”며 주민들의 동향과 동태를 감시하고 국경을 철저히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1990년대 들어 소련 및 동구권이 붕괴되고, 1992년 한중(韓中)수교는 북한의 촉각을 극도로 긴장시켰다. 변화하는 국제정세의 흐름을 타고 평양과 청진, 신의주를 비롯한 북한 주요도시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반대하는 삐라사건과 낙서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보위부는 수령의 권위와 위신을 보장하는 사(私)조직으로 더욱 철저히 전락하기 시작했다.

보위부, 정보기관들끼리의 치열한 경쟁에 밀려

우선 ‘보위기관 현대화’ 방침에 따라 김정일과 직통전화 ∙ 직접보고 체계를 세우고, 보위통신체계 단독운영, 수령의 권위를 해치는 요소들을 적발할 수 있는 지문감식기, 필적감식기를 해외에서 구입했다.

다음으로 국가안전보위부는 ‘30번’ ‘40번’ 숙청작업에 돌입했다. 보위기관 비밀대호(암호) 가운데 ‘30번’은 소련의 주구(첩자)이고, ‘40번’은 중국 주구를 이른다. 과거에 북한에서는 소련과 중국을 드나드는 일이 모든 사람의 부러움을 받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젠 정세가 변해 칼도마 위에 올라 서게 된 것이다.

1960년대부터 북한은 군사대학 재학생과 졸업생들 중 머리가 총명한 사람들을 선발하여 소련에 있는 ‘푸룬제 군사아카데미’에 보내 국방과학과 군사장비에 정통한 엘리트들을 교육시켰다. 30, 40번 숙청사업의 첫 번째 대상은 그 유학생들이었다.

유학생들이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에 매수되어 소련의 간첩이 된 후, 미 CIA와 결탁한 KGB의 지시에 따라 북한 수뇌부를 없애고 군사반란을 획책했다는 것이 숙청의 원인이었다.

아카데미출신 유학생들은 귀국하여 이미 군부의 요직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국가안전보위부의 권한 밖의 대상이었다. 때문에 단서가 발견되면 인민군 보위사령부와 협력 수사해야 하나, 정보기관들 사이의 경쟁적인 충성심과 자기기관 본위주의 때문에 협력이 안되고 수사가 답보상태에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인민군 보위국(국장 원응희, 2004년 사망)은 1993년 초 소련유학생출신 11명 숙청으로 시작하여 과거 소련에 유학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조사, 체포, 처형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어갔다. 이로 인해 인민군 보위국은 단번에 보위사령부로 승격되었다. 더욱이 1995년 6월에 있은 ‘6군단사건’과 97년 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사건을 진압하여 김정일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어 갔다.

중장에서 대장으로 승진한 원응희 보위사령관은 1997년 ‘최룡해 사로청사건’을 처리하며 북한 제1의 무소불위(無所不爲) 세력으로 등장했다.

한편 사회치안, 행정기관 단속에 치중했던 사회안전부는 1997년 10월 당중앙위 전 농업비서 서관히, 전 부부장 이창선, 피창린 등의 과거경력을 들추어내 반당 반혁명 간첩으로 몰아 처형하면서 서서히 수면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극도의 빈궁에 빠진 주민들은 눈만 뜨면 “오늘은 누가 간첩, 내일은 누가 반동”이라는 공포에 질려 갈팡질팡했고, 권력을 틀어쥔 충성분자들은 경쟁적으로 사람잡이를 단행했다. 이러한 권력다툼 속에 경쟁력이 떨어진 국가안전보위부는 자기의 기능을 빼앗기고, 서서히 사회의 뒤뜰로 소외되기 시작했다.

▲ 국가안전보위부 김영룡 제1부부장

김정일 동기생 김영룡이 제1 부부장 맡아

이진수의 사망으로 국가보위부의 위상은 나날이 위축되었고, 국가안전보위부장 자리는 아직까지 공석으로 남아 있다. 보위부내에서는 김정일이 국가보위부장을 겸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은 당위에 올라서려 했던 전력(前歷)이 있는 국가보위부의 세력확장을 견제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당중앙위 계응태(공안담당비서)를 비롯한 보위부 간부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김정일에게 보위부장의 필요성에 대해 제의를 했지만, 그때마다 김정일은 “왜 보위부장이 꼭 필요한가?”라고 그 제의를 일축했다. 사실 김정일은 국가보위부를 자신의 사조직으로 만들어 놓고, 그 밑에 제1 부부장 편제를 두고 관리했다.

제1 부부장 김영룡은 1942년생으로, 김정일과 동년배이자 김일성종합대학을 함께 졸업한 동기생이다. 김일성종합대학 출신간부 등용원칙에 따라 김영룡은 체계적인 수순을 밟아 1983년에 국가보위부 부부장의 직책을 수행, 1991년부터 국가안전보위부 제 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김정일과 김영룡은 각별한 사이로 알려졌다. 1993년 북한에서는 ‘장군님의 숭고한 당조직 관념’이라는 당 기풍확립 운동이 벌어진바 있다. 내용인즉 김정일이 아침 9시, 중요국가기관에 전화를 걸었는데, 책임일꾼이 부재중이었다. 김정일의 전화를 받은 서기는 ‘책임일꾼이 세포비서에게 당비(黨費)를 바치러 갔다’고 정중히 보고했다.

그러자 당장 찾아오라고 지시한 것이 아니라 “5분이면 될까? 5분 있다 다시 전화하지”라고 김정일이 답했다 한다. 이것을 두고 김정일의 당 조직관념이 높다며 전 당과 전 사회에 일반화하도록 한 운동이다.

이때 강연제강에 등장한 ‘중요부서의 책임일꾼’이 바로 김영룡이다. 서기의 부름을 받고 황급히 올라와 김정일의 전화를 받은 김영룡은 김정일을 칭송하는 덕성실기를 쓰고 북한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집중총화 앞둔 김영룡, 자살 혹은 처형

국가안전보위부는 1997년 ‘중앙사로청사건’을 보위사령부에 뺏기면서 더욱 무능해졌다. 당시 보위부가 사건제보를 먼저 받았지만, 김일성의 빨치산전우 최현의 아들인 최룡해, 그리고 김정일의 매제인 장성택이 연루된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했다고 한다.

보위사령부는 김정일에게 “국가안전보위부가 ‘중앙사로청사건’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안면정실관계 때문에 계급투쟁에서 태공(태만)했다”고 일러바쳤다.

국가안전보위부는 또한 중국주재 국가안전보위부 해외반탐(反探)조직을 노출시키는 실책을 저질렀다. 국가안전보위부는 ‘신흥무역회사’를 통해 외화를 벌어 기술장비와 대내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해 왔다. 이름은 ‘무역회사’를 걸었지만, 직원들 가운데에는 보위부 해외반탐국 소속 312호 공작원들이 있었다. 이러한 해외반탐조직은 심양과 연길, 북경을 비롯한 중국각지에 널려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남한 안기부에 노출되었던 것이다.

국가안전보위부는 1997년 12월 중앙당 집중검열을 받게 되었다. 부부장들은 물론 각도의 부장, 부부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검열을 받았다. 평안북도만 하여도 부장 최만흥은 철직되었고, 반탐부부장 정찬균은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하는 등 일대 수난을 겪게 되었다.

중앙당 집중총화가 시작되자 김영룡은 도저히 소생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극약을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그러나 김영룡의 죽음이 자살인지, 처형인지에 대해서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국가안전보위부 연혁
1945. 11. 19
보위기관 창립절, (김일성 남포시 보안간부훈련소 현지지도)
1949. 6
내무성 정치보위국
1951. 3
사회안전국 창설, (내무성과 별개)
1972. 12
사회안전부 정치보위국
1973. 2. 15
김일성 사회안전부에서 정치보위부로 독립 지시
1973. 3
국가정치보위부 독립(초대 정치보위부장: 김병하.사망)
1982. 4
정치보위부를 국가보위부로 개칭(국가보위부장: 이진수.사망)
1992. 11.12
국가안전보위부로 개칭(제 1부부장: 김영룡.사망)

백명규/ 前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근무(2004년 입국, 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