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베를린은 4월 중순에 접어들었는데도 아침 공기가 찡하니 매서웠다. 뼈까지 전달되는 어두침침한 베를린 추위에 익숙해질 만큼 자주 드나드는 편이지만 이 이국적인 대륙의 추위는 내겐 아직도 생소하고 때로는 우울하다. 하지만 베를린에서 진행하는 북한인권 행사는 북한문제를 관찰하는 베를린의 전문가 그룹들 속에선 꽤 익숙해진 듯 보인다.
ICNK(북한반인도범죄철폐국제연대)의 활동으로 베를린을 드나들기 시작한 게 2015년 초반부터다. 베를린에 ‘북한인권’ 문제를 전담하는 독일인들의 시민단체가 창립됐다고 대북라디오 방송이 뉴스 보도를 내보냈다. 그 전까지는 유럽과 서방 선진국 중엔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국가는 미국을 제외하면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최악의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무관심이 서운하던 차여서 독일에서 새로 태어난 북한인권단체 소식은 반가움 그 이상이었다. 유엔의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보고서가 나온 지 1년이 지난 시기라 그 기대감은 더욱 컸다. 북한인권 문제 국제화 실현의 꿈이 조금씩 다가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인권이사회를 참여하려고 제네바를 방문한 김에 베를린까지 들러 향후 활동 계획을 논의하고 북한인권 개선이라는 공동목표를 위해 협력할 것을 약속했던 것이 그해 3월 말이었다.
2015년부터 매년 가을이면 베를린북한인권영화제를 개최하고 4월이면 베를린재단주간을 기해 국제심포지엄을 진행하고 있다. 햇수로 5년에 걸쳐 일여덟 차례 공개 비공개 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2015년에 창립한 ‘북한인권을 위한 사람’이라는 독일 시민단체가 관련 업무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독일인들로만 구성된 이 단체는 처음에는 비영리단체로 등록해 활동하다 지난해 말 독일사회에서 엄연한 ‘재단’으로 등록했다. 올해도 베를린 시에서 진행하는 베를린인권재단주간 행사의 일환으로 ‘사람’이 국제심포지엄을 준비했다. “북한의 인권상황과 독일의 선택”이라는 제목으로 최근 북한 주민들의 경제생활과 인권상황, 당국 차원에서 진행되는 인권유린의 체계를 토론하고 독일은 무엇을 할 것인지를 토론했다.
기존의 국제적인 인권단체라 하면 휴먼라이츠워치나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처럼 국경을 초월해 인권문제를 다루는 경우가 대다수다. 북한의 인권문제에만 초점을 두고 일하는 외국의 북한인권 단체는 ‘사람’이 유일한 듯하다. 독일에서 이해관계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북한인권 문제를 다루는 데는 어려움도 많았을텐데 변함없이 지난 5년간 북한인권운동을 진행해 온 게 대단하다. 올해 방문에서는 베를린의 활동에 다소간 변화를 감지했다. 독일 시민사회에서 북한인권운동이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독일 정부와 의회를 대상으로도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입바른 소리를 하는 단체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활동이 더 효과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행사 때마다 모이는 시민사회의 영역과 폭도 점차로 확대돼, 지난해까지는 훔볼트대학교의 대학생동호회 중심의 학생운동이 올해는 베를린 자유대까지 확산됐다. 베를린 자유대에는 한국학과가 있기에 이번 베를린 자유대의 북한인권 공개강좌는 더욱 의미가 있었다. 물론 이번 행사에는 자유대 한국학과 학생은 한 명도 확인할 수가 없었지만 독일인 학생들의 북한인권운동 대상이 베를린자유대로 이어졌다면 1, 2년 이후에는 자유대의 한국학과 학생들도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두는 날이 오지 않을까 미리 장미빛 상상을 해본다.
독일 내 북한인권운동의 발전을 느끼게 만든 또 하나는 일반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 부분이었다. 2년 전에 진행한 베를린북한인권영화제에서 처음 안나를 만났다. 15세 소녀가 엄마와 함께 북한인권영화제 광고를 보고 라이프치히에서 베를린으로 온 것이다. 영화 상영과 북한에 대한 우리의 발표와 강연을 마치고 안나는 내게 와서 이것저것 북한상황에 대한 기본 지식과 정보를 물어봤다. 그리고 ‘친구야 내 소원을 들어줘’라는 ICNK가 기획 제작한 정치범수용소에 대한 아동용 동화 팸플릿을 눈여겨보다가 독일어로 번역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더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이해하라고 제작한 책자라 이를 활용한다는 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곤 잊고 지냈는데 지난해 겨울에 번역을 완성해서 독일어 버전으로 출판한다고 연락이 온 거다. 사실 ‘친구야 내소원을 들어줘’는 알고 지내는 선배의 11살 딸내미 김서연 양이 당시 2014년에 학교 숙제로 쓴 동화를 우연찮게 보게 돼서 팸플릿과 영상으로 제작하게 된 거다. 독일의 베를린에 이 팸플릿을 가지고 왔더니 이걸 본 독일 10대 소녀가 감동을 받는 게 아닌가. 새로 그림을 그리고 독일 사람들의 이해를 돕는 설명을 좀 더 넣어서 새로운 정치범수용소 동화책을 재창작해 냈다.
그런 뒤 2년이 지나 이번 출장에서 안나를 다시 만났다. 안나와 부모님은 이번에도 북한인권 행사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라이프치히에서 베를린으로 달려왔다. 안나의 어머니 설명은 이렇다. 안나가 다니는 학교에서 전교생에게 이 책자를 나눠주고 북한에 대한 강연을 했단다. 그리고 사회과목 선생님의 요청으로 두어 차례 다른 학급 수업에 들어가서 북한 정치범수용소와 북한인권에 대한 강연도 했고 학교 선생님들에게도 강연을 했단다. 이 책자를 제작하며 안나 어머니가 다니는 회사의 소프트웨어를 사용해서 그림을 그리고는 어머니 회사의 직원들에게까지 북한인권 강연을 했다고 한다.
안나의 어머니는 딸애의 자발적인 북한인권 운동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딸이지만 정말 자랑스럽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나까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안나도 대견스럽고 고마웠지만 어머니가 느끼는 그 감동과는 조금은 다른 색깔의 감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을 인간적 연민을 가지고 들여다 본 독일인 십대는 이 문제에 대중적 인식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했다. 이 지점이 우리 운동의 희망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안나의 가족 외에도 이번 출장기간에 진행한 행사에는 지난해 활동 때보다 더 다양한 시민사회 활동가들이 참여하고 있단 걸 감지했다. 이미 체제전환을 경험한 체코공화국 출신 동아시아 정치학자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재단을 설립하고 이제 활동을 시작하는 시민활동가와 예술로서 사회갈등을 표현하고 완화하자는 예술가, 대학교 신문사 기자들에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시민참여 의식을 가진 베를린의 지성들이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발걸음을 한 것이다.
2015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일은 내게 그냥 편안히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였다. 북한과 외교관계는 있었지만 인권문제에는 차가운 거리감을 유지하던 부자나라였다. 이제는 그 부자나라에 북한인권 문제를 전담하는 인권단체가 있어서 인권운동의 전략을 세우고 주변 시민단체와 지식인들을 이끌어 나가며 활동의 폭을 확대하고 있다.
*편집자 주 : 권은경 ICNK 사무국장은 지난 10일부터 13일까지 독일 베를린에 다녀왔다. 북한인권 관계자를 만나 향후 활동을 토론하고, 대학, 의회, 외교부 등을 돌면서 북한경제 상황 및 인권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를 가졌다. 데일리NK는 권 사무국장이 보내온 기행문을 통해 현재 독일에서 진행되는 북한인권 개선 운동의 상황을 독자들에게 제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