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급제… 모스크바로 가던 ‘소시지 기차’

▲ 구 소련 당시 상점앞에 늘어선 행렬

과거 김일성은 “쌀은 곧 공산주의다”라고 선언한 바 있다, 이를 좀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배급제는 곧 사회주의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사회주의 경제학의 저명한 전문가인 코르나이(Kornai) 박사는 소련식 사회주의를 “물자 부족의 경제”로 묘사했다. 끊임 없는 물자 부족을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보았다. 시장이 없는 사회주의 경제는 수요 공급의 법칙에 따라 자동적으로 조절되는 체제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국가계획기관에 의해 조절되면서 여러 가지 불균형이 불가피하다.

이 누적된 불균형을 조절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주민들이 저축한 돈을 없애버리는 화폐 개혁이며, 또 하나는 주민들이 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배급제다.

소련, 제2차 대전 시기 배급제 절정

배급제는 시장경제 하에서도 가능하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전쟁과 같은 비상 사태에서 배급제를 이용한 적이 있다. 1917년 독일 잠수함의 연속적인 공격 때문에 식량을 받지 못하게 된 영국은 배급제를 도입했다. 1939년 제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도 다시 한번 도입했다.

하지만 평시에 배급제를 이용하는 국가들은 거의 소련식 사회주의 경제를 모방한 국가였다. 특히 북한에서 이같은 특성이 매우 뚜렷이 나타났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배급제를 많이 이용했고 사회주의 체제의 탄생지인 소련에서도 배급 원칙은 보통 일이었다.

1920년대 말부터 고속 공업화의 정책을 실시한 소련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특히 수 백만 명의 주민들이 아사(餓死)한 1930-32년의 대기근 이후 식량 부족은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1928년 소련 정부는 식량 및 일상용품에 대해 배급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자들은 배급제를 임시방편적이고 예외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하고, 가능하면 빨리 배급제를 일반 판매제로 바꾸려고 노력했다. 또 배급제를 임시적인 조치로 생각했기 때문에 1935-36년 배급제를 폐기했을 때 이것을 중요한 경제성과로 선전했다.

그러나 몇 년 후 제2차 대전으로 배급제가 다시 한번 도입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1941-47년 소련에서는 배급 대상이 아닌 식량품이나 일상용품은 거의 없었다. 레닌그라드 봉쇄 초기에 음식 할당량은 최저 수준으로 내려갔다. 1941년 말 독일군대에 의해 교통이 완전히 끊겨버린 레닌그라드에서 빵 할당량은 노동자 1인당 250g이었으며, 노동자가 아닌 경우 125g에 불과했다. 레닌그라드 봉쇄 당시 사망한 사람은 70-80만 명 정도였다. 그 중 대부분이 1941-42년 겨울에 굶어죽었다.

배급제, 간부들 권력만 높여

1947년 12월 화폐개혁을 실시한 다음 소련에서는 배급제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배급 원칙’이 소비생활에서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1950-60년대, 식량을 비롯한 일상용품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었지만 비싼 물품을 구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1960년대의 칼라TV, 1970년대의 자동차와 같은 고급 상품은 돈이 충분히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구입할 수 없었다. 공급보다 수요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인맥을 이용하거나 판매담당 간부에게 뇌물을 주고 구입했다.

가장 많이 쓰인 구입방법은 ‘대기자 명부’를 통하는 것이었다. 구입 희망자들은 자기 이름을 대기자 명단에 올리고 상품이 나오는 대로 배급받았다.

권력이 있는 직장은 할당량을 더 많이 받았다. 규모가 큰 군수공장 숙련공들은 2-3년 정도만 기다리면 승용차를 구입할 수 있었지만 일반 공장에서 꼭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5-7년 동안 기다려야 했다. 학교나 서비스업 노동자들에겐 할당량이 안 나오기도 했다.

대기자 명단에 올리는 것도 담당 간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는데, 윗사람과 관계가 좋은 직원들이 더 쉽게 올릴 수도 있었고 더 빠르게 상품구입 권리를 받을 수 있었으니까 이 체제는 간부들의 영향력을 많이 강화시켰다.

모스크바로 가는 ‘소시지 기차’

배급제의 또 하나의 형식은 간부를 비롯한 특권층에게 고급 생활물자가 분배되었다는 것이다.

특권층에 대한 특별 배급제는 1920년대부터 구소련 해체시기까지 계속되었지만, 누구나 다 아는 이 사실을 보도매체에서는 일절 다뤄지지 않았다. 간부들이 받는 생활물자의 질은 일반 주민들의 그것보다 훨씬 좋았다. 간부들은 명절이나 특별기념일 이전에 ‘선물’이나 ‘특급세트’라는 이름으로 생활물자를 배급받았다. 이러한 ‘특급세트’에 들어가는 것은 주로 캐비어, 수입 와인, 고급 햄과 같은 음식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와 소련의 소비생활은 다시 어려워졌다. 그 근본이유는 사회주의 경제의 비효율성이었지만 세월이 갈수록 수요-공급 사이의 불균형은 심해졌다.

1947년 배급제를 폐지했을 때의 고정된 물가는 시장경제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물가와 대체로 일치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시중에 나도는 현금이 많아졌다. 대중의 정치적 지지를 의식한 정부는 월급을 계속 올렸지만 국가가 고정시켜 놓은 물가는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국영상점의 진열대는 텅텅 비어갔다.

1970년대 우리 가족은 큰 상점 근처에 살았는데, 필자가 해마다 소비자의 선택이 좁아지는 것을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한다. 1972-73년 이 상점 진열대에는 치즈 5종류가 있었는데, 1977-78년에는 1-2종류, 1980년 이후에는 한 종류라도 있으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지역에 따라 큰 차이도 있었다. 지방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육류는 1960년대 말부터 어려워졌고, 가게 앞에 선 긴 줄은 그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물론 소련의 경우 ‘식량문제’는 식량이 절대 부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품질이 좋은 음식을 구하기 어렵다는 의미였다. 빵이나 면, 설탕이나 쌀과 같은 기본 음식은 언제, 어디에서나 살 수 있었지만 야채와 과일, 특히 고기는 문제였다.

식량이 많이 팔리는 대도시, 특히 모스크바 같은 정치 대도시는 ‘음식여행’의 대상이었다. 소련에서 교통비는 비교적 쌌으니, 지방 주민들은 대도시로 육류나 다른 고급 음식을 사러 다녔다. 이 때문에 지방사람들은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소시지 기차’로 불렀다.

이 때문에 1980년을 전후하여 소련의 많은 지방에서 배급제가 조용히 부활하였다. 중앙정부는 이러한 조치를 지지하지 않았으나 해마다 심해지는 위기 때문에 배급제를 마지못해 받아드렸다. 1970-80년대 배급제 물품은 주로 고기류, 우유류였고, 할당량과 배급형식은 지역에 따라 다양했다. 모스크바나 레닌그라드 등 ‘특권지역’에서는 배급제가 도입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지방 사람들로 가득찬 ‘소시지 기차’들은 더 많아졌다.

배급제 회귀 주장하는 사람 없어

소련 당국은 배급제의 부활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소련 국민들도 배급제의 부활이 나라의 경제위기를 상징한다고 보고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파괴시키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간주했다. 물론 공식매체들은 배급제 부활을 일절 보도하지 않았다.

가장 어려웠던 시기는 1989-91년 전후였다. 이 무렵 구식 사회주의 경제는 고르바초프 총비서의 개혁정책에 의해 거의 가동되지 못했으나, 신식 시장경제는 아직 출현하지 못했다. 1990년에 들어 지방은 물론 모스크바에서도 상점의 진열대는 완전히 비워졌고, 팔리지 않던 옥수수 통조림까지 다 없어졌다. 이 무렵 배급제가 없는 지역이 없었고 설탕과 비누까지 배급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92-93년 이후부터 상점의 모습이 다시 바뀌었다. 시장경제가 가동되기 시작하자 진열대에는 소련 사람들이 평생 한번도 못보던 다양한 국산제품, 수입 상품들이 많이 생겼다. 문제는 돈이었다. 돈 없는 사람들에게 진열대의 상품은 그림의 떡이었다.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지금의 러시아 사회를 많이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배급제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초빙교수, 역사학 박사

<필자 약력>
-구소련 레닌그라드 출생(1963)
-레닌그라드 국립대 입학
-김일성종합대 유학(조선어문학과 1986년 졸업)
-레닌그라드대 박사(한국사)
-호주국립대학교 한국사 교수(1996)
-저서 : <북한현대정치사>(1995) <스탈린에서 김일성으로>(From Stalin to Kim Il Sung 2002) <북한의 위기>(Crisis in North Korea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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