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 후진타오 수행 `왕씨 3인’

후진타오 중국 주석 겸 공산당 총서기의 이번 북한 방문에는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 외에 ‘3명의 왕(王)씨’, 그리고 랴오샤오치(廖曉淇) 상무부 부부장 등이 공식 수행했다.

류훙차이(劉洪才)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대외연락부 부부장과 총서기 비서실장 격인 천스쥐(陳世炬) 총서기판공실 주임도 수행원에 포함돼 있었으나 후 주석이 공식 방북 활동에 들어간 이후 중국 언론은 더 이상 그들을 거명하지 않았다.

중국 언론은 이들 수행원을 반드시 왕강(王剛)-왕자루이(王家瑞)-리자오싱-왕후닝(王삼수변+扈寧)-랴오샤오치 등의 순으로 거명했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역시 리자오싱 외교부장이고 왕자루이 중앙 대외연락부장도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인물이다.

이에 비해 왕자루이 부장과 함께 잠시 ‘왕씨 3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왕강 중앙판공청 주임 겸 중앙서기처 서기, 왕후닝 중앙정책연구실 주임은 상대적으로 국제 지명도가 낮은 편이라 할 수 있다.

◇ 왕강 = 올해 63세로 후 주석과 동갑인 왕강 주임은 중앙판공청에 오래 몸담아온 인물로 장쩌민 전 총서기 때인 94년부터 99년 3월까지 부주임을 역임한 후 99년 12월 주임으로 승진해 당 총서기 실장 역할을 맡고 있다. 현재의 직급은 부총리급.

그러나 전임자인 쩡칭훙 현 국가 부주석으로부터 사실상의 중앙판공청 주임 업무를 넘겨받은 것은 제15기 1중전회가 끝난 직후인 97년 10월로서 이때부터 부장급 부주임 대우를 받으며 다른 당 업무로 눈코뜰 새 없이 바쁜 쩡칭훙을 대신해 판공업무를 수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판공청 부주임이 되기 전에는 기밀사항을 포함한 각종 문서와 기록 등을 통일해 보존관리하는 중앙당안관 상무 부관장을 거친 후 93년 12월 중앙당안관 관장으로 승진하면서 국가당안국 국장을 겸해 99년 12월까지 일했다.

97년 9월 제15기 중앙후보위원으로 선출됐고 2002년 11월에는 제16기 중앙위원 겸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중앙서기처 서기, 중앙판공청 주임(유임), 중앙보밀위원회 주임 등에 임명됐다.

중당안관과 국가당안관(국가당안국), 중앙보밀위원회와 국가보밀국은 당 중앙군사위원회와 국가 중앙군사위원회처럼 간판은 약간 다르게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같은 기관이다.

지린(吉林)성 부위(扶餘) 출신으로 지린대학 철학과을 졸업한 그는 건공부 7국 8공사 선전과 간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71년 신장위구르자치구 당위원회 판공청 비서로 이동한 후 줄곧 판공업무를 담당해왔다.

충성심이 확실해 먼저 쩡칭훙으로부터 신임을 받은 후 후진타오의 추천과 원자바오 현 총리의 찬성으로 장쩌민이 주재한 제15기 중앙정치국 회의와 후진타오가 주재한 중앙서기처 회의의 만장일치 결정에 따라 2002년 11월 제16기 중앙정치국원이 됐다고 한다.

◇ 왕자루이 = 중앙대외연락부와 신화사의 자료에 따르면, 상하이 푸단(復旦)대 대학원에서 경제관리학을 전공한 고급경제사, 경제학박사로서 푸단대 관리학원 상업경제 전공 박사과정 지도교수 및 베이징대 광화관리학원 교수를 겸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 자료는 그가 지린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푸단대 대학원에서 공업경제학 박사후과정을 마쳤다고 소개하고 있으며 한 인터넷 사이트에는 정부장급 직위에 있는 11명의 지린대 출신 동문 가운데 한 명으로 올라 있다.

올해 56세로 70년 지린성 성도인 창춘시 우정국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 젊은 시절을 창춘시와 지린성의 우정.우전분야에서 일하다 중앙으로 올라가 국가경제무역위원회 부국장, 국장을 지냈다.

95년 산둥성 칭다오시로 이동, 그곳에서 시위원회 상무위원, 부시장, 시위원회 부서기, 시장 등을 역임하고 2000년 9월 대외연락부 부부장으로, 2003년 4월 부장으로 승진하면서 제10기 전인대 대표, 제16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이 됐다.

국회의원에서부터 장관, 야당 총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을 방문한 한국의 주요 정부 인사들과 정치인 가운데는 그의 접대를 받은 사람이 많고, 그가 한국을 방문해 만난 사람은 정.관계에 두루 걸쳐 있다.

2001년 1월에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중국 방문 때 신의주 건너편인 단둥까지 가서 김 위원장을 맞았고, 금년 2월에는 중국공산당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 후 주석의 구두친서를 전달했다.

지난 6월 신화통신 인터뷰에서는 당시 자신이 김 위원장과 장장 4시간 동안 대좌해 북핵문제에 대한 중국측의 입장을 설명함으로써 북한측의 적극적인 회답을 얻어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국가 총체외교의 일부분으로서 중국공산당의 대외교류와 전방위적인 정당외교를 한층 더 확대, 심화시킨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학자의 입장에서 그는 한 기고문을 통해, 한국의 경영학자들은 공자의 경영사상과 학설이 국가와 기업의 발전에 대단히 심원(深遠)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는 예를 들면서 동양식 경영이 사회발전으로 가는 길이자 경제발전의 동력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왕후닝 = 상하이 출신에 올해 만50세인 그는 중국공산당 내에서 손꼽히는 이론가다. 화둥(華東)사범대 불어불문학과 졸업 후 상하이사회과학원에서 자연변증법 연구에 종사했고, 81년 푸단대에서 법학석사학위를 받은 후 이 대학 정치학부에서 바로 교편을 잡아 31세 때인 86년 부교수, 88년 정교수가 됐다.

정치학에 관한 그의 열정적인 연구와 풍성한 저작은 개혁.개방 초기라는 시대적 배경과 참고할 만한 정치학이론의 긴급한 필요성으로 인해 일찍이 당과 국가 지도자들의 눈에 들었고 80년대 중국 학술계의 중요한 성과로까지 손꼽혔다.

푸단대 법학부 부장으로 있던 95년 중앙정책연구실로 자리를 옮겨 정치팀장과 부주임을 거친 후 후진타오를 총서기로 선출한 2002년 11월 공산당 제16기 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피선되고 제10기 전국인민대표대회가 후진타오를 국가주석으로 선출한 2003년 4월에는 이 연구실의 주임으로 승진했다.

일부 인사들은 교수로서 초고속 승진을 하면서 성가가 높아진, 잘 나가던 정치학자였던 그가 중앙정책연구실에서는 장쩌민 전 총서기의 브레인중 한 사람이었다가 하나 하나 단계를 밟아 올라가 연구실 주임이 됨으로써 수석 브레인의 자리에 올랐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 2002년 11월 당시에는 장쩌민이 상하이시 서기로 있을 때부터 왕후닝의 이름과 그의 정치학 저서를 탐독해 중요한 내용을 거의 외울 정도고, 자신이 총서기에서 물러나더라도 그를 통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왕후닝은 장쩌민 전 총서기가 내세운 ‘3개 대표(선진 생산력, 선진 문화, 광대한 인민의 근본이익을 대표함)’ 이론과 ‘시기를 맞춰 앞으로 나간다(與時俱進)’는 이론을 개발하는데 핵심 역할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실제로 그는 장쩌민 전 총서기가 해외순방을 포함한 중요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지근에서 그를 수행했으며, 그 이후 후진타오 총서기의 중요한 행차에도 거의 빠짐없이 수행해 오고 있다.

2001년 9월 장쩌민 당시 총서기가 북한을 방문하면서 그를 데리고 간 데 대해 일각에서는 중국측이 자국의 개혁.개방 경험을 체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북한의 결단을 우회적으로 촉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분석했었다.

후 주석이 이번 북한 방문에 그를 데리고 간 것도 비슷한 논리로 해석할 수 있지만, 경제적 개혁.개방 그 자체보다는 그렇게 했을 때의 정치적 대응방안 등을 북한측에 설명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선경제발전 후민주화론자로서 강력한 리더십에 입각해 경제개혁을 추진, 경제발전과 민주화 실현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온 그는 대표적 저서인 ‘비교정치분석’에서 “인류는 바로 지금 정치의 시대에 처해 있으며 정치활동과 정치관계는 날이 갈수록 인류의 각 정치공동체와 인류 전체의 발전을 결정하고 있다”고 썼다. /베이징=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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