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김일성 초상화가 먼저일 순 없었다”

지금은 남한에서 혼자 살고 있지만 나에게도 온전한 가족이 있었다. 그것도 딸만 넷인 딸 부잣집이었다.

부모님이 집에 안 계셔도, 언니들과 놀며 싸우며 하루하루가 금세 지나가버리곤 했었다. 자매가 많은 만큼 정말 우리 집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막내였던 난 유난히 엄마를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다만 우리 엄마는 키가 크신 편이었는데 난 유난히도 작았다. 그래도 어릴 때부터 지지 않으려는 성격이 강해 큰 언니들하고도 많이 싸웠는데, 특히 셋째 언니랑은 치열하게도 싸웠다.

한번은 셋째 언니랑 싸우다 너무나 화가 나 누워있는 언니 옆구리를 힘껏 발로 찬 적이 있다. 언니는 너무나도 아파하면서 뒹굴었고, 나는 내가 차고서도 그걸 보고 겁이 나 멀찌감치 도망을 갔다. 다행히 언니는 보복으로 때리는 대신 쏘아보기만 했다.

집안 살림도 꽤나 괜찮았다. 청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인 포항구역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양곡 기계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셨고, 어머니는 중국 의류를 수입해 옷 장사를 하셨다.

투철한 노동당원이셨던 아버지는 회사에 충성하셨고, 우리 집에는 아버지와 김일성이 악수하던 사진까지 걸려있었다. 전국노동자대회 때 청진 대표로 만난 때였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빛나는 사진이 있어도, 열심히 공장에서 일하셨어도 90년대에 들어와서는 배급이 나오질 않았다. 집안의 경제는 어머니 몫이었다.

어머니는 장사를 하면서 아버지께 ‘배급도 주지 않는데 무슨 일을 그렇게 열심히 하냐’고 불평했고, 아버지는 그 때마다 ‘애들 들을까봐 무섭다’며 입을 다무시곤 했다. 그러나 배급이 나오질 않아도 처벌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는 일을 하셔야만 했다.

어머니의 빈 자리

그렇게 평화롭던 우리 집이 몰락하기 시작한 건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간 복수라는, 간에 물이 차는 병이었다. 남한에서야 큰 병이 아니라고 들었지만, 북한에서는 의료 시설이 열악해 고치기 힘든 병이었다.

어머니를 치료하기 위해 집안에 있던 모든 가산을 탕진했다. 처음에는 저축해둔 돈을 쓰다가, 그 돈을 다 쓰고 나서는 집안의 패물을 팔기 시작했다. 가구까지 다 팔고 나서, 결국은 ‘범표 마선'(재봉틀)까지 팔게 됐다. 마선을 판다는 건 마지막 남은 재산까지 판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노력했지만 결국 어머니는 93년 6월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 내가 인민학교 3학년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우리 집안은 가난에 쪼들려야 했다. 아버지는 공장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며 장사를 하려고 하셨다. 하지만 지배인은 그럴 수는 없다며, 한 달에 쌀 얼마씩을 도와 줄 테니 계속 일을 하라고 권했다. 그래서 그 뒤 한 3년은 그렇게 그날그날 먹고 살았다.

그렇지만 공장도 어려운데 계속해서 쌀을 줄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린 먹을거리를 장만하기 위해 집까지 팔아 버렸다. 있을 곳이 없게 된 우리 가족은 공장 휴게실 같은 곳에서 살았다.

나이가 어려 일을 할 수 없는 나를 빼고는, 언니들은 모두 나가서 일을 했다.

첫째 언니는 졸업 후 버스 회사 쪽에 일을 배정받아 했었는데, 나중에는 그만두고 방앗간에서 일했다. 아버지 공장과 연결이 되어 들어갈 수 있었는데, 음식을 직접 다루는 일이라 북한에서 정말 좋은 곳으로 꼽히는 곳이었다. 살림에 크게 도움이 됐다.

둘째 언니는 졸업한 후 중국과 관련된 무역회사에 들어가 일을 했다. 이 역시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는데, 아버지기 아시는 분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하지만 그 회사는 얼마 안 가서 망해버렸고, 나중에 언니는 일을 못구해 집에 있었다.

셋째 언니가 제일 돈을 잘 벌었다. 구리 장사를 했는데,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다. 구리는 팔고 사지 못하는 물품이었다. 들키면 안 되는 일이었기에 옷 같은 것으로 감싸서 배낭에 짊어지고 다녔다. 여자가 들기에는 정말 무겁고 위험한 철물들을 취급하면서 다치기도 많이 다쳤다.

사실상 우리 집을 먹여 살린 건 이 셋째 언니의 구리 장사였다. 종종 시장에 나도 따라 나서곤 했는데, 그렇게 시장에 가면 내가 어릴 때 괴롭히고 놀리던 가난한 친구들이 다 있었다. 어릴 때는 나도 이렇게 될지는 꿈에도 몰랐는데, 참 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집에 땔감이 없으니 아버지는 종종 밖에 나가 나무를 해 오시곤 했다. 어차피 공장에 나가도 배급은 없었기에, 출근 도장을 허위로 찍고서 나무를 하러 가셨다. 그렇지만 청진 근처에 나무할 데가 없어 엄청나게 멀리 갔다 오셔야만 했다. 북한 전체가 땔감을 위해 나무를 다 베어내서 민둥산이 가득한 때였다.

그러나 그렇게 일해도 역시 삶은 어려웠다. 나중에는 구리 장사도 시원치 않았고, 결국 그때그때 먹고 살다가 공장의 자재를 팔기까지 했다.

결국 김일성 초상화에 손 대

▲김일성 초상화

먹을 것이 전혀 없던 어느 날. 결국 굶주림은 우리를 어둠의 골짜기로 몰아넣었다. 몇 끼를 굶었는지 너무나 배가 고팠던 우리 가족은 결국 손대지 말아야 할 물건에 손을 대고야 말았다. 바로 김일성 초상화였다.

아버지는 김일성 초상화의 유리를 꺼내서 파셨다. 종신형에까지 처해질 수 있는 범죄였지만, 그 당시는 정말 팔 수 있는 모든 걸 다 팔던 때였다. 밥보다 김일성 초상화가 먼저 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일은 순탄치 않았다. 김일성 초상화 유리를 팔고 난 얼마 후, 공장 지배인이 와서 신고가 들어왔다고 귀띔해 줬다. 들켜버린 우리 집안은 더 이상 가만있을 수 없었다.

마침 구리장사 할 때 중국 밀수를 도와주던 아주머니가 중국으로 가자고 권유하던 때였다. 그 아주머니는 중국이 (북한보다) 훨씬 잘 산다면서, 중국에 건너가 살자고 강권했었다. 아버지도 당시 조선이 제일 못 사는 나라인 줄을 알고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감히 딴 나라에 가서 사냐며 듣지 않던 참이었다.

하지만 이제 김일성 초상화를 건드렸으니 어쩔 수 없는 형편이었다. 우리 집 식구 모두 그 아주머니를 따라 두만강을 넘었다. 그게 1998년 9월 21일이었다.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 날 이후 난 가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중국에 갈 때 우리 가족 5명을 비롯해서 그 아주머니와 30대 여자분 두 명, 총 8명이 강을 넘었는데, 그날 밤 그 아주머니가 안내해 주는 집에서 잠을 잤었다. 그런데 그때 공교롭게도 공간이 부족해 나와 아버지는 다른 곳에서 잤었다.

일어나고 보니깐 언니들이 모두 사라져버렸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아주머니를 비롯해서 그 30대 여자분 두 명도 다 안 계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아주머니가 인신매매단이었다.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중국에서 부딪힌 일은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었다. 아버지는 답답해 하시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셨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얹혀사는 집에서 농사일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마저도 3개월 후, 12월 어느 날에 잡혀서 북송되고 말았다. 밖에서 벼를 손질하시다가 잡히신 모양이었다. 난 세상에 완전히 외톨이로 남겨지고 말았다.

전 가족이 뿔불이…혼자서 탈북

정말 ‘막막하다’는 표현이 어떤 건지 그때부터 알 수 있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의지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그때 내 나이 15살이었다.

다행히 친구가 아는 교회를 따라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귀신 나오는 곳이니 가지 마라’고 하셨지만, 그곳 아니면 도움 받을 데가 없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2001년 10월까지 전도사님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10월 어느 날 신고가 들어와 나는 공안에 잡히고 말았다. 이후 나는 4번이나 잡혔는데, 두 번은 압송 중에 탈출하고 한 번은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러나 결국 마지막에는 북한으로 가고 말았다.

북송되고 나서 엄청나게 맞았다. 한국인을 만났는지, 기독교를 접했는지 무조건 불어라고 했는데, 끝까지 아니라고 말했다. 그걸 말하는 순간 더 심한 형벌에 처해진다는 건 여러 경로를 통해 수도 없이 들어온 참이었다.

정말 얼마나 많이 맞았는지 모른다. 나같이 작은 애한테 때릴 곳이 어디 있었는지, 참 신기할 뿐이었다. 뺨을 맞으면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고, 정강이를 계속 구둣발로 차니 나중에는 너무 부어올라 내 자신이 쳐다보기도 끔찍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끝까지 버틸 수 있었고 결국은 풀려나서 고아원 같은 곳에 수용됐다.

말이 고아원이지 정말 상상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한겨울에 찬 콘크리트 바닥에 그냥 자라고 하는데 말이 나오질 않았다. 먹을 것도 가루 같은 걸 줬는데, 정말 뭔지도 알 수 없는 가루였다. 먹으면 목이 메여서 도저히 소화가 안 돼 난 먹지 않았는데, 친구들은 이걸 먹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면서 꾸역꾸역, 억지로 먹었다.

도저히 그 곳에 있을 수 없어서 나는 나무하러 나가서 두만강으로 무작정 도망갔다. 그리고 강에 뛰어내렸는데, 수영도 못해서 빠져 죽을 뻔했다. 물에 뛰어들 때는 정말 중국으로 가야겠다는 간절한 생각에 뛰어들었는데, 막상 뛰어들고 보니 죽음의 공포만이 날 사로잡았다. 물에 쫄딱 젖은 채로 난 다시 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또 도망쳤다. 이번에는 도저히 건널 자신이 없어 강이 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오지로 가는 기차를 잡아타고 친척집으로 향했다. 거기서 12월 중순, 강이 얼 때까지 난 기다렸다.

그 곳에서 아버지의 소식을 들었다. 아오지 친척집에서, 아버지가 감옥에 계시는 동안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내가 들은 마지막 가족 소식이었다.

이후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넌 나는 선교사님의 도움을 받아 2002년에 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대학생인 만큼 삶이 그렇게 힘들진 않다. 대학에 다니면서, 학업도 어렵긴 하지만 잘 하고 있고, 캠퍼스 생활도 만족스럽다. 친구들도 너무들 다 좋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가끔은, 온 가족이 모여 살던 때가 그립다. 청진에서, 지금보다는 부족했지만, 같이 모여 밥 먹던 게 너무나 좋았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중국 어딘가에 있을 언니들 행방이 궁금하다. 만약 남한에 들어온다면 국정원에서 연락이 올 텐데, 그 연락이 올 순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문은혜(가명) / 2002년 탈북, 대학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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