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음은 새벽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

북한의 지식인 聰明 씨, 다시 성탄절이 오는군요.


그곳에서는 기독교의 성탄절이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나는 모릅니다. 아마 무관심하거나,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일 수도 있겠습니다. 나 역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의 수준에서 聰明 씨에게 성탄 축하 메시지를 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물론 가톨릭 교회의 영세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성적인 신자라고 자임하지는 못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30대 초(初)의 청년이 지금으로부터 2000여년 전에 목숨을 던져 인류에게 던진 메시지는 오늘의 북한에 가장 절절하게 해당 된다고 나는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그 분의 정신을 “악(惡)의 지배에 대해 어떻게 근본적으로 승리하느냐?”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제국으로 대표되는 억압의 권세에 비하면, 예수님으로 대표되는 피압박자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로마제국은 흔적도 없고 예수님의 교회는 전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이 승리는 ‘예수님 방식의 싸움’이 이룩한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싸움의 방식-그것은 한 마디로 “한 알의 밀씨가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비폭력, 무저항, 자기를 던지는 것, 악을 악으로 대적하지 않고 절대선으로 대적하는 것,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라는 것..,대체로 이런 말씀들입니다.


마르크스, 레닌, 스탈린 김정일은 이런 방식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압니다. 그러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같은 사람은 그런 방식으로 대영제국을 물리쳤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1970년대에 권위주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성공한 시대지만 정치적으로는 억압이 심했다는 평을 듣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시절이 주로 무엇에 의해 크게 타격을 받아 민주화로 넘어온 줄 아십니까? 바로, “한 알의 밀씨가 떨어져 죽어야…” 하고 설파한 당시의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같은 분들의 ‘예수님적 싸움의 방식“이 그것이었습니다.


이런 광야의 목소리가 수 많은 신도들과 시민들을 구름처럼 모여들게 했습니다. 명동성당 철야기도회, 개신교 목요기도회 같은 것이 국민들의 마음을 모두 ‘작은 예수’의 마음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적 방식‘을 따르는 순교적인 민심의 대세는 탱크로도, 장갑차로도, 계엄령으로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아저씨들이 “우리 승리하리라”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며, 평화의 행렬을 잇는 데에는 유신(維新)의 철권통치도 어찌 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물론, 김정일 수령독재는 남쪽의 유신체제보다 아마 1만 배는 더 지독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북한의 주민과 엘리트가 당장 그런 방식으로 나가기를 재촉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을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성탄절의 메시지는 ‘어둠의 권세’에 짓눌려 있는 ‘빛의 자녀’들에게 “진리(따라서 正義와 善이)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희망의 기쁜 소식입니다. 밤이 깊다는 것은 곧 새벽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聰明 씨, 그리고 북한동포 여러분, 여러분이 잃을 것은 억압의 사슬이요, 얻을 것은 자유해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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