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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에 와서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어 좋습니다”
문명일(28, 2003년 입국)씨는 이색 탈북자다. 그는 남한에 와서 ‘발명왕’이 되었다. 사업가로도 활동 중이다. 그는 올해 국내 특허 출원 최다 100명에 선정되었다. 특허 받은 제품은 국내외에서 주문이 쇄도한다. 한마디로 그는 요즘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가 발명한 ‘댄싱보드’는 2005년 ‘대한민국 특허기술대전’에서 은상을 수상했고 현재 스포츠 레저용품 시장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다. ‘댄싱 보드’는 스케이트 보드와 다르다. 바퀴가 십자형으로 되어 있어 몸을 좌우로 흔들기만 하면 전진한다. 누구나 쉽게 탈 수 있다. ‘댄싱 보드’를 만들면서 그는 죽을 고생을 했다. 날마다 밤을 샜다. 하늘도 감동했는지 특허기술대전에서 은상을 받았고 지금 ‘댄싱 보드’의 주가는 치솟고 있다.
남한 입국 탈북자들이 7000여 명이 넘어섰지만 이들의 사회 적응은 여전히 어렵다. 문씨 같은 경우는 드문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지난 25일 문씨를 만났다. 기자 “성공 하셨네요”라고 하자 문씨는 “아직 성공이라고 말하긴 어렵다”며 수줍어 했다. 그런문씨의 모습이 마치 사회 초년생 같아 보인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성이 찰 때까지 한다”고 했다. 그를 발명가, 사업가로 만든 의지가 느껴졌다.
-언제 한국에 오셨나요?
2003년에 입국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 남한의 공군사관학교와 비슷한 ‘경성비행군관학교’에 다녔습니다.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고 만드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기계를 조종하는 것이 너무 좋아 조종사가 되는 꿈을 갖고 비행국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조종사의 꿈은 이루지 못하고 홀로 탈북습니다. 지금은 현재 <다라온>이라는 레저용품 회사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발명가로서 특허출원을 하고 있고 출원한 아이디어를 상품화하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왜 북한을 떠나게 됐습니까?
군복무 중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생겨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일이라 다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남한에서 발명왕의 꿈을 이루겠다”
-남한에 와서 ‘발명왕’이 되셨는데, 북한에서도 발명을 했나요?
아무래도 군관학교이기 때문에 자유롭게, 원하는 만큼 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도 틈틈이 아이디어를 구상했고 제품을 만들어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이것저것 만들어 보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군관학교 다닐 때입니다.
자유로운 남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북한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생각과 아이디어를 짜낼 수 있었습니다. 특허기술대전에서 은상을 받은 ‘댄싱보드’도 남한에 와서 발명하게 되었죠.
-‘댄싱보드’는 ‘스케이트 보드’와 어떻게 다르죠?
‘스케이트 보드’보다 여러 가지로 진일보한 것이 ‘댄싱보드’입니다. ‘스케이트 보드’는 처음부터 잘 타기는 힘듭니다. 그러나 댄싱보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아무나 탈 수 있어요.
‘댄싱보드’의 바퀴는 십자형 구조입니다. 노를 젓듯이 좌, 우로 몸을 흔들기만 하면 앞으로 전진합니다. 스케이트 보드는 보드 앞을 들어 좌, 우로 움직여야 앞으로 가는데, 댄싱보드는 보드의 앞을 들지 않아도 됩니다. 무척 편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 댄싱보드는 앉아서도 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대 장점이지요. 서서 타는 게 두려운 여성, 노인들도 즐길 수 있습니다.
-어떻게 ‘댄싱보드’를 생각해냈나요?
사람들은 독특한 것, 특이한 것을 좋아합니다. 앉아서 타는 보드는 세계적으로도 없습니다. 저는 앉아서 편하게, 아무나 탈 수 있는 특이한 보드를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호기심이 발동되어 만들게 되었지요.
주경야독으로 ‘댄싱보드’ 개발
-남한에 처음 와서 ‘댄싱보드’를 완성할 때까지 꽤 힘들었을 텐데…
정말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발명하는 일이야 제가 좋아하는 것이기 때문에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 혼자 정착하는 게 무척 힘들었습니다.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해야 하는 것이 젊은 나이에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발명하는 것이 쉬운 게 아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었지요. 그러나 저의 아이디어를 하나, 둘 제품에 접목시키는 작업은 흥미 있었습니다.
저는 탈북한 후 부산에서 생활했습니다. 그곳에서 분리수거 아르바이트를 약 5개월 하면서 저녁에는 아이디어 고민을 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이 힘들었지만 꿈을 잃지 않았습니다.
-발명하는 과정이 궁금한데요?
‘댄싱 보드’ 만들 때 주위 사람들이 걱정을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말을 해서 힘이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차피 발명은 수십, 수백번 실패해서 한번 성공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는 데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지를 불태웠죠.
제품을 구상하고 완성하는 데 2004년 8월부터 올해 8월까지 만 1년이 걸렸습니다. 구상한 아이디어를 검증하는 데 수백번의 시행착오를 거쳤고 이론적인 검증과 도면을 만든 후 60여 개의 시제품을 만들고 난 다음에 지금의 ‘댄싱보드’를 완성했죠.
▲특허기술대전에서 은상을 받은 문씨의 발명품 ‘댄싱보드’ |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 십자형 바퀴 각도를 조절하는 작업을 했는데 너무 많이 해서 몇 번 했는지 기억도 안납니다.
어느 정도 바퀴 각도가 조절됐다 싶어서 그 다음에 쇠로 만들어 수백번 타보았습니다. 청계천 복원 전에 평평한 지대가 있어서 그곳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했습니다. ‘이젠 됐다!’는 생각이 들 때는 정말 기뻤습니다. ‘하면 된다’는 말이 실감나더군요.
-다른 탈북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저도 아직 갈 길이 먼데요… 짧은 소견을 말씀드리면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이 정말 냉정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 돈을 중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 현재 좋은 파트너를 만나 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남한에 정착한 지 3년도 채 못되지만 제가 느낀 것은 자본주의 사회는 자신이 하기에 따라 잘 할 수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남한과 많이 다른 체제이기 때문에 남한에 적응하기 힘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힘들어도, 지쳐도 끝까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탈북자건, 남한 사람이건 결실을 맺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길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시죠
요즘 북한에 계신 부모님 생각이 많이 납니다. 성공한 아들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아직 어리고 헤쳐 나가야 할 일이 많지만 제가 좋아하는 발명을 계속 할 것입니다. 탈북자라고 해서 사회에 적응 못하고 변두리에서 배회하는 낙오자가 아니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의 첫작품인 ‘댄싱보드’를 더욱 업그레이드시키는 일을 할 것이고, 레저용품 외에 가전제품도 발명해볼 작정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