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독재’ 비용 치러 성장 잠재력 키워내”

“하루는 기차에서 박정희 평전을 읽고 있으니까, 젊은 대학생이 ‘사장님, 어떻게 박정희 책을 읽고 있습니까’라고 묻더군요. 이 책을 읽어봤냐고 물어보니 그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알지 못하고 들은 것만 갖고 판단하는 성급함, 편견들을 갖고 있어요.”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사안별, 세대별로 극명하게 갈린다는 특징이 있다. 6·25 전쟁 이후 피폐해진 한국의 산업을 일으켜 선진국 진입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찬사와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를 통해 영구집권을 추구했다는 비판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젊은층에게는 ‘쿠데타’를 일으킨 폭압적인 군인 정치가이자 유신헌법으로 영구 집권을 추구한 ‘독재자’로 보는 평가가 우세해 박 전 대통령이 이룩한 경제적인 성과조차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박정희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이러한 평가가 내려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제도권 교육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실제 학계내에서는 지금도 산업화의 공과(功過)와 권위주의 체제 및 유신 독재 폐해의 문제를 놓고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대학생 시사교양지 ‘바이트(bait)’가 마련한 대학생과의 대담 ‘대한민국 역사상식에 도전하다!’에서 “박정희가 독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개발시대 산업의 사령관으로 독재를 함으로써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성장의 잠재력을 극단적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오늘날의 관점에서 독재는 비판해야 되지만, 독재라는 비용을 치르면서 한국사회에서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그 시대의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경제 발전 이전에 민주주의를 달성할 수는 없었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구호가 나온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7년 집권을 하면서 부터”라며 “이는 당시에 들어서야 한국의 시장경제가 정부의 개입 없이도 자립적으로 자율적으로 시장이 돌아갈 만큼 시장경제가 성숙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는 “민주주의라는 것을 처음부터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진국의 객관적인 사정상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며 “소위 개발도상국들인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폴, 말레이시아 모두 권위적 정치를 초기 1970~80년대까지 한 뒤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또 “낮은 발전단계에서 정부가 투자자원을 집중적·전략적으로 투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민주주의라는 것은 원리적으로 작동할 수 없었다”며, 결국 “시장과 정부가 자립한 다음에 정치분야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영훈 서울대 교수(좌에서 두번째)가 대학생들과 대담하고 있다./사진=바이트 제공


[다음은 이영훈 교수와 대학생들의 대담 요지]


-장면 정부가 4·19혁명 이후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는 개혁을 하기에 1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초기 장면 정부의 실정을 이유로 5·16쿠데타의 정당성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은가.
 
“장면 정부에게 좀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잘 할 수 있었을 거라는 가정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는 50년대 한국사회의 경제·정치의 모순구조 속에서 어느 정도 예정돼 있었다.


당시 한국은 국민소득이 60달러에 불과한 최빈국이었지만 세계에서 인구 당 가장 많은 수의 군대(60만)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 장교단의 상당수는 6·25전쟁의 생존자로서 굉장히 투철한 반공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지닌 이들이었다. 이들이 50년대 사회·정치·경제의 무질서, 부정부패에 분노하면서 이미 쿠데타 모의는 박정희 당시 육군 소장 뿐만 아니라 장군들을 중심으로 논의가 있었다.


이미 1958년부터는 상당히 구체적인 쿠데타 모의가 있었고, 박정희 개인의 기준으로 보자면 오히려 4·19가 발생을 해서 쿠데타가 연기된 것이다. 따라서 4·19 이후에 하나의 사회적 혼란은 명분과 핑계에 불과했다. 


또 1958년 이집트와 터키에서 나세르 혁명이나 케먈 파샤 혁명이 있었고, 이런 것들이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젊은 군인들로 하여금 어떤 경우든 간에 정치일선에 나섰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회적·정치적 역관계가 형성돼 있었다.”


-그렇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킨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사실 박정희와 군인 출신의 정치가들이 쿠데타를 한 가장 큰 이유는 4·19 1주년을 기해 급진적인 통일운동이 제기되면서 반공정책에 손상이 오는 것을 바로 잡기 위함이었다. 


두번째는 무엇보다도 당시 국민소득이 85달러에 불과했는데 극도로 가난한 민생고의 해결, 강력한 조국 근대화, 산업화, ‘우리도 잘 살아 보자’라는 것이 쿠데타의 동기 자체다. 흔히들 쿠데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경제개발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거꾸로다.


그러고 나서 예산편성권 등 강력한 기획과 집행기능을 갖는 부총리 급의 경제기획원을 만들었고,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을 세웠다. 크게 봐서 1차 5개년 계획이 장면 정부의 계획서를 전제한 것이라는 지적은 타당하다고 본다.” 


-박정희 정권이 성공적인 경제성장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은 무엇인가.


“박정희 정권은 집권하자마자 강력한 정부에 의한 정부의 개입을 특징으로 하는 경제개발 계획을 시작했다. 많은 나라에서 실패했지만 한국에서 이 계획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로 당시 세계경제가 팽창하던 때에 수출주도공업화 노선으로 전환한 데에 있다.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케네디 라운드라는 가트(GATT, 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의 약칭.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7차 라운드를 통과시킨 뒤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관세를 50% 이하로 낮췄다. 구체적으로 1963~1964년부터 자유무역 촉진이 활성화 되었는데 바로 그때 한국의 군사정부가 수출주도공업화 정책으로 기민하게 노선을 전환했다. 선진국에서 후진국의 공업제품을 사는 시장이 열린 것이다.


둘째, 이러한 수출주도공업화 정책을 취하는 가운데 한일국교정상화가 장애요소였는데 이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심했지만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했다. 그 뒤 일본의 자본, 기술, 부품, 한국의 노동력, 미국의 시장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국제적 시장 연관을 창출해 낸 것이고, 이러한 국제시장의 연관에서 한국경제가 클 수 있었다.


셋째, 당시 한국의 시장경제는 매우 낮은 수준에 있었는데, 그 시장에 자원배분의 기능을 맡기지 않고 국가가 개입했는데도 아주 효율적으로 정확하게 잘 했다. 수출진흥확대회의, 월간경제동향보고로 알려진 관·민·업계·제계·학계·전문가들이 모이는 회의가 구성이 돼서 고급 정보를 교환하고, 배분하고, 알력이 생기면 조절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1979년까지 매달 2번씩 쉬지 않고 열렸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도 사례가 없다.”


– 당시 시대적 상황 상 개발독재가 필요했다는 인식이 있다. 민주주의를 먼저 실현한 후 경제발전을 이룩할 수는 없었을까.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이라는 구호가 나온 것은 김대중 대통령이 1997년에 집권을 하면서 나온 것이다. 이는 1997년 단계가 되면 한국의 시장경제가 정부의 개입 없이도 자립적으로 자율적으로 시장이 돌아갈 만큼 시장경제가 성숙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에는 한국의 시장경제에 금융시장도 성립되지 않았다. 은행은 가계저축을 받아서 생계대출을 하고 있는 정도지, 기업의 투자계획을 심사하고 투자 전망을 밝게 평가하기 위해서 장기적인 산업 대출을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또 기업이 심사를 받을 만큼 투자계획서를 잘 쓰거나 기업의 재무재표가 잘 정비된 단계가 아니었다. 증권시장도 당시에는 국채유통 시장에 불과했고, 발생시장이나 회사채 시장이 성립된 것은 1976년 이후의 일이다.


시장경제가 낮은 발전단계에서 정부가 투자자원을 집중적으로 전략적으로 투자할 수밖에 없을 때에는 민주주의라는 것은 원리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한국경제도 30~40년 지나 1997년 단계에는 이미 정부가 개입하면 비효율이 발생할 수 있는 시장이 되었다. 은행은 은행대로, 증권은 증권대로, 자기들이 책임지고 자원을 배분하는 역할을 하고 정부는 뒤에서 잘못하는 것이 없는가, 부정부패는 없는가 감독만 하는 이런 상태로 되면 시장은 시장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이때 비로소 민주주의 논리에 따라서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이 이뤄지고 경제에 대한 개입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시장과 정부가 자립한 다음에 정치분야에서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것을 처음부터 하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후진국의 객관적인 사정상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고 소위 말해서 세계 많은 개발도상국들을 보면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폴, 말레이시아 전부 다들 권위적 정치를 초기에 1970~80년대까지 한 뒤 민주화가 이뤄진 것이다.”


– 일각에서는 박정희 정권 시기의 고도 성장은 단순히 박정희 개인의 역량이 아니라 세계경제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시대에 있었던 고도성장과 역사적 성취를 박정희 개인의 작품이라는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는 그대로 산업의 총사령관으로서 사령관의 역할을 충실히 했을 뿐이고, 유능한 현장에서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같은 그런 사람들이 기업가라면 그 기업가들의 역할도 중요했다.


또 무엇보다도 산업의 현장에서 전쟁을 치르려면 실제로 전투에 나섰던 사병들 즉 노동자가 있다. 다 공로가 있고 자신이 맡은 사업의 현장에서 이노베이션을 수행할 수 있었던 국민적 역량이 있었다. 이러한 국민적 역량을 당시의 세계 경제와 맞추어서 극대적으로 성장의 잠재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기여한 바가 크지만 쿠데타를 일으켰던 것, 유신헌법을 단행한 독재자였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후대들이 이러한 점에 대해 올바른 방향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난 10년 사이에 박정희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많이 발굴한 평전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읽어보길 바란다. 알지 못하고 들은 것만 갖고 판단하는 성급함을 범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독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족의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후진적 독재가 아니라 소위 개발독재라고 하는, 개발시대에 하나의 사령관으로서 독재를 함으로서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성장의 잠재력을 이끌어 낸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독재는 비판해야 되지만, 독재라는 비용을 치르면서 한국사회에서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 그 시대의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대학생 대담 참여자
김승재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3학년, 김초롱 경희대 언론정보학과 4학년, 김형주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이승수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황인혜 동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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