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변호사의 지독한 논리 모순

정성산 감독이 연출,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 “요덕스토리”에 대한 기사가 지난 몇 주 여러 신문과 인터넷 매체에 소개되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아직 개막이 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정 감독의 인터뷰기사 중 다음의 내용은 <요덕스토리>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나온 비명임을 말하고 있다:

“저의 아버지가 저 때문에 회령 22호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셨다가 공개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 그날 이후 저는 살아 있는 시체였습니다. 삶의 의미를 상실했고 제 인생은 때늦은 후회와 절규로 가득했습니다. (……) 어떻게 해서라도 이 못난 아들 때문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21세기 아우슈비츠, 북한 정치범 수용소를 소재로 한 뮤지컬 ‘요덕스토리’였습니다.” (“용서라는 위대한 이름으로” 문화일보, 2006.2.18)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경우 주위를 살필 틈 없듯이, 정감독의 <요덕스토리> 또한 그 어떤 정치적 고려, 계산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늘로 찌르면 “아야!”하는 반응과 실로 다를 바 없는 것이다.

北인권은 남북교류의 종속 요소?

문제는 이 비명에 대한 우리의 반응들이다. 더 정확히 말해 ‘반응의 차이’에 있다.

한 편에는 북한인권참상 및 정 감독이 공연준비기간 중에 겪은 “현 정권의 은밀한 협박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멈춘 심장박동과도 같은 지식인들의 긴 침묵이 있다. 격렬한 고통에 대한 비명과 분노의 경우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반응방식이라는 점에서 더 이상의 정당화는 필요 없다. 그러나 ‘침묵’의 경우 그것은 분명 지식인 특유의 긴 숙고, 혹은 ‘계산’이 만들어낸 반응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원순 변호사의 경우, 나치 전범들을 단죄한 뉘른베르크 재판과 남미 등 여러 나라의 인권유린 청산과정에 대한 글을 썼음에도 북한인권문제에 대하여는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하여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운동가로 꼽히고 있다는 점에서 당연히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다.

그처럼 논리적 일관성을 주장하는 지식인이라면, 나름대로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고서야 북한인권에 대해 거의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물론 박 변호사 스스로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북한인권을 보는 차이는 이념의 문제보다는 불신의 문제다. ‘왜 북한 인권에 침묵하느냐.’ ‘그동안 인권탄압에 침묵하더니, 북한 정권의 붕괴를 위한 정치적 목적 아니냐.’는 식으로 서로 공격의 수단으로 삼는다. 사실 과거에 인권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북한 인권에 관심 없을 리 없는데, 의심과 적대를 갖고 있는 것이다.(서울신문,2005.9.20)”

그의 말대로 “북한 인권에 관심 없을 리 없는” 박변호사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원론적인 수준의 발언을 하긴 하였다:

“[미국 NED재단의 거쉬먼 회장에게] 북한의 경우 워낙 폐쇄적인 사회여서 북한의 민주화나 인권문제에 당장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 대신 점진적인 남북교류와 경제교역의 추진에 따라 신뢰와 화해를 쌓아가는 것만이 북한을 민주화시키는 길일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1999)”

박 변호사의 견해는 북한인권문제는 남북교류라는 대북정책의 큰 틀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김대중, 노무현정권의 햇볕정책과 거의 일치하는 듯 하며, 따라서 그는 북한의 인권문제를 남북교류 확대에 종속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햇볕정책 논란과 핵 위기 공방 속에서도 남북 교류는 점점 깊어진다는 느낌입니다. 지난해 추석에 평양에 가서 들었는데 북한 지역에 항상 5백명 가량의 남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이런 현실은 대세로 굳어질 것 같습니다.(중앙일보, 2003.11.23)”

김정일에게 변화란 ‘변화하지 않기 위한 막간극’

특이한 점은 박 변호사의 경우 한국의 다른 진보적 지식인들과는 달리 남북교류를 남북화해만이 아니라 북한을 위협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도 보고 있다:

“북을 변화시킬 지렛대를 우리가 가져야 하잖아요. (……) 북이 남쪽에 훨씬 더 의지하고 남이 북쪽에 더 많이 투자하면, 평화협정 따위가 없어도 전쟁은 물 건너갈 것입니다. 평소에 주는 것이 있어야만 그걸 안 줄 때 위협이 되고 지렛대가 됩니다.(앞 인용처)”

그러나 객관적인 사실로만 놓고 보아도 햇볕정책은 실패하였다.

지난 8년간 ‘북이 남쪽에 훨씬 더 의존하고 남이 북쪽에 더 많이 투자하였어도’ 북한의 핵보유와 선군(先軍)정치로 인해 동북아와 한반도의 긴장은 더 높아졌지 내려가지 않았고, 북한인권상황도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이유는 한국이 짝사랑식 평화체제구축 정책을 선포하는 순간, 김정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미 ‘그들이 원하는 평화체제’를 다 얻었기 때문이다.

쌀, 비료, 전기 등 필요한 물자는 배달시키듯 주문할 수 있고, 서울에서 북한인권대회가 열리자 곧바로 한국 집권여당의 국회의원들이 – 이중에는 국회 국방위원장까지 포함되어 있다 – 먼저 나서서 “전쟁하자는 거냐?”라고 비판하는 상황이라면 김정일 정권의 입장에서 볼 때 무엇이 더 아쉽겠는가?

북한의 개혁개방이나 민주화, 즉 변화는 현 체제의 유지가 고통스러워야 가능한 것이다. 현 수령체제가 고통스럽지 않고, 차라리 그것을 영원히 존속시키는 것이 수월한 김정일의 입장에서 변화란 항상 ‘변화하지 않기 위한 막간극(intermezzo)’이다. 즉 햇볕정책을 골수에 각인한 현 정권은 방향전환을 하지 않는 한 ‘북한을 위협할 수 있는 지렛대’를 결코 사용할 수 없으며, 북한의 핵철거와 북한인권개선에 사용되지 않는 지렛대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北인권운동에대한 ‘기원의 오류’

박원순 변호사 스스로도 이런 착잡한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나 그는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개입 자체를 정치적 편견을 갖고 보고 있다.

“지난번 Ms.코언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집요하게 북한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운동을 한다면 재정지원을 할 용의가 있음을 이야기하여 좀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 그 동안 북한인권문제를 다루는 단체와 언론은 대체로 극우보수파들이었음을 설명했었다.(1999)”

박 변호사는 ‘북한의 주장과 같은 주장을 했다고 해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것이 잘못됐다고 보는 사람이며, 순수히 논리적으로 볼 때 그는 이른바 ‘기원의 오류(fallacy of origin)’를 지적한 것이다. 즉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주장이라고 해서 그 주장 자체가 틀렸다고 보는 것이 전형적인 기원의 오류다.

그러나 위의 인용문에서 박변호사는 그가 그렇게 문제 삼은 논리적 오류를 스스로 범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파 언론과 단체가 언급했다고 해서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똑같은 오류다.

나아가 그는 “극우”라는 표현을 곡해하고 있다. 유럽적 의미에서 극우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원칙으로 삼는 자들이 아니다. 극우는 사실상 파시즘의 후예들로서 이들의 주 고객층은 폐쇄적 민족주의자와 인종주의자, 사회의 불평분만자, 실업자 등이다. 박원순 변호사는 “극우”란 표현을 그 원래의 의미에서 사용할 때 한국의 정당과 시민단체, 언론 중 어느 집단에 해당하는지 스스로 판단해 볼 일이다.

다른 한편 박원순 변호사는 “인간성에 대한 범죄”의 경우 “용서와 화해”만이 능사가 아니며 처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갖고 있다:

“또한 범죄자 처벌은 그 희생자가 결정할 수 있는 고유한 권리 중의 하나이며 배상의 한 형태로 간주되어야 한다. 이러한 종류의 범죄희생자는 진실 파악과 처벌의 실제적 조건이 확보된 상태에서 진정한 용서를 할 수 있다. (……) 범죄자에 의하여 향유되는 ‘불처벌’은 동일한 범죄의 반복을 고무한다. 동시에 고통받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대한 회복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불가양의 권리임에 틀림없다.(영원히 쫓기는 나치범죄자)”

그렇다면 박원순 변호사가 ‘현재’ 북한에서 행해지고 있는 인권유린의 책임자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북한이 민주화된 연후에 처벌하자는 것인가?

문제의 핵은 이런 것이다. 박변호사는 80년대 이후 한국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하였다. 즉 그는 변호사에 의해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구속자 가족들의 모임이 있고, 종교단체와 외국의 인권단체와 연계가 되는 상황 하에서 활동하였다. 아니면 그는 이미 역사적 과거의 일, 즉 나치 독일이나 남미, 코소보 등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성찰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변호사는 현재 진행형으로, 그것도 한국의 권위주의 정부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히틀러-스탈린 급의 인권유린이 일어나고 있는 북한의 경우에는 “남북교류확대”라는 원론 이외에는 사실상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의로운 공분’이 바탕해야

이런 상황은 박원순 변호사 개인에게만이 아니라 한국의 진보파 지식인들의 공통된 현상이다. 무조건적 햇볕정책 하나에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비명과 분노도 침묵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남북교류확대”라는 주문(呪文) 때문에 침묵의 정당성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한국의 인권개선에 대하여는 마치 집을 짓고 마지막 내부 장식을 하듯 小木의 섬세한 눈으로 보지만, 그 구조에서 뒤틀려 大木의 작업이 필요한 북한인권에 대하여는 오로지 “남북교류확대”라는 블랙홀에 모든 정당성의 책임을 맡기고 눈감는다. 해서 북한의 강제수용소에는 “타는 목마름”도, “아침이슬”도, “장정일을 위하여”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 정성산 감독의 비명이 갖는 의미가 선명해진다. 비명이란 좌고우면(左顧右眄)하지 않고 나오는 것이고, 바로 그 점에서 가장 자연스러울뿐더러 또 효과적이다. 현재 진행형인 북한인권문제의 개선을 위해 가장 필요한 작업은 한국 국민의 집단적 분노이어야 하며, 바로 이 분노를 바탕으로 해야만 직접 손이 닿지 않는 북한의 인권을 개선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이 개발될 수 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는 두 주체는 명령하는 김정일과 수행하는 수하들이며, 아마도 후자는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 재판을 보고 말했듯이 “행위의 정당성 문제를 성찰하지 않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김정일의 경우는 다르다. 그는 자기가 명령을 내리는 주체임으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자기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싶어 할 것이다.

문제는 현재 한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들이 바로 김정일의 인권유린 행위에 “미국의 북한 위협”, “생존권과 자유권에서 생존권 우선” 등의 수준 낮은 궤변으로 그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한국 지식인의 방조와 옹호가 바로 북한인권문제의 추가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되먹임구조(feedback)를 이들은 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남북화해는 어디로 갈까? 물론 김정일정권은 한국국민의 분노에 처음에는 격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국은 화해의 분명한 조건을 제시해야 한다. 란코프교수는 데일리NK에 실린 최근 칼럼 「김정일 정권 붕괴와 북한간부들의 비상구」에서 북한의 지도층 인사들의 “사면”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눈감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의 인권유린을 막기 위한 조치로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정성산 감독 스스로 <요덕스토리>의 연습과정에서 증오에서 용서로 향하는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북한 독재자에 대한 저주와 경멸과 증오로 일관될 줄 알았던 작품이 저도 모르게 용서라는 주제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 어느새 작품은 사랑과 용서, 화해와 희망을 노래하는 천사들의 얘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습니다. 배우들이 연습도중 너무 울어 연습이 안 될 정도로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습니다.(문화일보, 2006.2.18)”

물론 고통의 당사자들이 ‘용서’를 하기 위한 전제는 논리적으로 한국과 북한 인민의 의로운 ‘공분(公憤)’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철학박사)

홍성기(洪聖基)
-서울출생(1956)
-경기고, 서울대 독문과 졸업
-뮌헨대 철학석사
-자르브뤼켄대 철학박사(논리학, 동서비교철학)
-아주대 특임교수(현)
-주요논문 : <용수의 연기설><괴델의 불완정성 정리 비판>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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