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서 인권대사의 ‘사이비 인권 순수론’

이달 19일 박경서 인권대사는 성공회 세미나실에서 개최된 “대한민국 인권대사가 본 북한인권”이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유엔에서마저 북한의 인권이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발언으로 언론의 관심을 끄는 동시에 여러 북한인권단체로부터 비판적인 반응을 야기시켰다.

물론 그는 이런 비판들을 자신이 행한 강연의 일부분을 문맥에서 떼어내 왜곡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그는 위의 인용된 구절 이외에도 주의해서 보아야 할 많은 발언을 하였고, 그 중에는 그의 북한 인권관에 비판적인 사람들 역시 동의할 수 있는 내용도 있다.

“1993년 6월 비엔나 유엔인권위 주최의 세계인권 특별총회에서 정치적, 시민적 권리와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권리는 상호의존적이고(interdependent), 불가분적이며(inseparable), 절대 필요하고(indispensable), 포괄적으로(inclusive) 발전해야 한다는 지침을 세계에 선포한 것을 상기해야 한다”, “생존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자유권을 무시하고 자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은 생존권을 무시하는 접근은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북한인권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개인, 단체, 국가 모두가 동의하는 바일 것이다.

예를 들어 90년대 북한의 기근에 의한 대량 아사의 근본원인이 식량부족에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식량을 찾으러 다니기 위한 통행의 자유를 봉쇄한 것에 차라리 더 큰 원인이 있다는 기근 전문학자(정광민. 『북한기근의 정치경제학』, 도서출판 시대정신) 및 엠네스티 인터내셔날(Starved of Rights: Human Rights and the Food Crisis in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North Korea), AI Index: ASA 24/003/2004, 2004.1.17)의 지적은 바로 생존권과 시민적 자유권과의 상호의존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박 대사는 인권문제에 대한 올바른 기본 전제에서 접근했으면서도 결론에 가서는 세가지 점에서 논리적 설득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첫째 주요개념의 자의적 사용으로 인한 오류, 둘째 인권문제제기가 인권탄압정권에 대한 압박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개념의 자기모순, 셋째 인권문제제기와 평화권이 서로 배타적이라는 거짓 딜레마의 오류이다. 이 세가지 오류는 자세히 살펴보면 일종의 점층법을 이루고 있고, 궁극적으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실패한 햇볕정책이 그 배경임을 알 수 있다.

“북의 생존권”이란 표현의 자의적 오용

박 대사는 강연에서 “북한 인권상황을 우리 눈으로 볼 때 상당히 열악한 것은 사실이지만, 포괄적인 접근을 했을 때 북은 생존권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의문은 위협받고 있는 우리가 생존권을 보장해야 할 주체가 북한인민 개인들인지, 아니면 김정일정권인지가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유엔인권헌장(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 1948.12.10)에서 보호받아야 할 주체는 개인이지 정권이 아니며, 인권탄압을 일삼는 정권은 더더욱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사는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개인의 생존권을 마치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과는 배타적 개념인 듯 대비시키고 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상황이란 김정일봉건세습파시즘에 의해 고통 받는 북한인민들이고 지난해 말 유엔총회의 북한인권결의안도 바로 그 앞부분에 “고문과 기타 잔인하고 비인간적이고 저열한 취급이나 형벌, 공개처형, 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 감금, 법에 근거한 적절한 재판절차의 부재, 정치적 이유로 사형집행을 강행하고, 수많은 정치범 수용소가 존재하며, 광범위한 강제노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하에서는 “북의 생존권 보장”이란 표현은 강제수용소 및 탈북자들을 제외한 투매식 식량지원, 아니면 ‘김정일 정권의 생존’으로 교묘하게 바뀌어 사용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김대중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정치적 인권은 어떻든, 식량•비료 지원, 이산가족상봉, 탈북자 지원 등 사회적 인권 지원에는 많이 힘써 왔다(산케이신문 2005.12.10)”는 주장은 그가 강제수용소에 ‘정치적 이유’에서 수감된 북한인민의 경우 마치 생존권은 보장되어 있는 듯한 착각을 하고 있지 않나 의심을 들게 만든다.

물론 김대중이 그런 착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김대중 정권에서 초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 및 인권대사직을 맡은 박경서 대사가 그런 착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정권으로부터 노무현 정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주장되고 있는 전략적 궤변이 있다.

“사람은 먹고 살 수 있어야 자유고 인권이고 있으며, 먹고 사는 문제가 바로 생존권이다”라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게 들리고 또 국민 대다수가 가난했던 박정희정권시절에 바로 보수우파가 그런 주장을 하였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박정희정권하의 인권유린이 김정일파시즘 하의 인권유린과 그 질과 양에서 도대체 비교가능하지 않다는 점은 고사하고,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북한인민에게 있어서 생존권과 자유권은 결코 인권의 두 가지 측면이 아니라 자유의 박탈이 곧 생존의 박탈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정권의 전략적 궤변은 훨씬 더 깊은 곳에 근원을 두고 있다. 즉 생존권을 인권 위에 놓거나 아니면 인권들 중의 인권으로 올려놓은 뒤, 생존권 향유의 주체를 북한인민 개인에서 정권으로 슬쩍 바꿔치기 하는 것이다. 이점이 박대사의 강연 중 바로 두 번째 오류로 이어지고 있다.

인권탄압 정권에 대한 압박이어서는 안된다는 사이비 순수주의

박 대사의 발언은 물론이고 김대중, 노무현 정권, 그리고 친김정일파시즘계열의 시민단체 및 요즈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는 뉴레프트계열의 지식인들에 이르기까지 “인권문제제기는 순수해야 하고 절대로 정권에 대한 압박수단이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거나 이에 동의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이 주장은 자기모순 문장일 뿐이다. 아마도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머릿속에서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하는 듯하다: 어떤 나라, 예를 들어 미국이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순수하게 인권개선에 대한 관심보다는 북한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압박이며 간단히 말해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즉 인권문제제기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 데, 하나는 순순한 인권개선요구이며 또 하나는 인권탄압정권에 대한 압박인데, 후자는 정치적으로 인권문제를 악용하는 도덕적 위선이라는 주장이다.

사실은 인권문제제기란 ‘순수한 인권개선 요구+정권압박’ 혹은. ‘정치적 이해타산으로서 인권개선 요구+정권압박’의 두 종류이며, 따라서 인권탄압정권에 대한 압박은 인권문제제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나아가 공리주의적 도덕관에 기초한다면 정치적 의도에서라도 인권탄압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침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도덕적이다.]

왜냐하면 인권문제 제기란 “죄송하지만 귀 정권에 의해 귀국에 속하는 인민들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습니다”라는 식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너는 도덕적으로 파탄이 났으며 계속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너의 존재의 정당성을 상실할 수 있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경고이자 압박이다.

처음에는 국제사회에서 망신으로 그칠 줄 모르지만, 외교단절, 경제봉쇄와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개선되지 않는 인종청소와 같은 극악한 경우에는 유엔은 평화유지군이라는 무력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박대사는 차라리 혼자하는 기도에서나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노무현 정권에게 중요한 것은 인권문제제기에 필수적인 정권압박이라는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북한인권문제제기 자체를 봉쇄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박대사는 “인권은 당사자에 의해서 발전하며 우리의 경험을 너희들도 따라서 이렇게 해라는 방식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인권의 ‘평화 위협론’은 논리적 파탄

그것은 유엔인권위와 유엔총회에서 개별국가의 인권문제에 대하여는 결의할 수 없다는 식의 결론을 함축하고, 따라서 유엔헌장에 기초한 평화적 인권문제해결의 단서조차 용인하지 못하겠다는, 다시 말해 19세기식의 민족국가론으로 후퇴함과 동시에 인권의 보편성 자체를 부인하는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히틀러의 절멸수용소가 ‘당사자들’에 의해 사라지지 않았듯 북한의 강제수용소가 김정일정권 스스로의 성찰과 결단으로만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그 자체가 무책임한 행동이자 이기주의적 책임방기를 인권자력갱생으로 포장한 것에 불과하거나, 아니면 김정일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교묘하게 하는 것뿐이다.

박 대사의 지난 성공회 강연의 논리적 파탄은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평화권(rights to peace)’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북한인권문제제기가 한반도의 평화권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의 평화와 북한인권은 서로 ‘배타적인 선택지(exclusive disjuncts)’가 아니다. 차라리 유엔인권헌장의 전문(前文/preamble) 모두(冒頭)에 천명되었듯이 인권은 “세계의 자유, 정의, 평화의 그 기초(the foundation of freedom, justice and peace in the world)”인 것이다.

평화적으로, 그것도 국제사회에서 정당한 절차를 통해 수년에 걸친 유엔인권위의 의결을 통해, 그리고 그 자체로는 구속력이 없는 유엔총회의결로 나타난 북한인권개선 의결이 전쟁으로 귀착될 정도라면 한반도는 이미 평화를 논할 시기가 아니라 준전시상태나 다름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백하며 그것은 김정일 정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사와 친김정일파시즘단체들은 연일 평화권 운운하면서 북한인권문제제기를 무력화시키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평화권이란 인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1984년 11월 12일 유엔총회는 ‘인민의 평화권에 대한 선언(Declaration on the Right of Peoples to Peace)을 결의하였다. 그 내용의 핵심은 미소냉전체제의 끝 무렵에 있었던 핵무기경쟁으로 인한 핵전쟁에 대한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1980년대는 바르샤바 조약국에 배치된 소련의 중거리미사일 SS20에 대항하기 위해 나토국가에 배치(예정)된 미국의 퍼싱II와 관련하여 특히 유럽에서 격렬한 평화운동이 전개되던 시절이다. 왜냐하면 미소간의 핵전쟁은 재래식 전쟁과는 달리 인류의 공멸을 거의 필연적으로 부르나, 새로운 기술발전으로 인해 미소의 중거리핵미사일은 정치적 무기가 아니라 실전에 사용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한반도 평화위협은 김정일의 핵무기 개발

만일 이러한 배경을 알고 있다면 박 대사는 북한이 스스로 발표한 핵무기보유가 한반도의 평화권을 위협하는 근원이라는 점을 먼저 밝혔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한인민의 처참한 상황을 고발하고 그 개선을 촉구하면, 한국 국민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이기주의적 발상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1997년 1월 유네스코는 의장명의(F. Mayor)로 ‘평화인권(The Human Rights to Peace)’을 발표하였다. 그 첫 번째 두 문단을 인용한다:

“지속적 평화는 모든 인권과 의무의 전제다.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여 혹은 제약으로 인한 남녀의 침묵의 평화(peace of silence)가 아니다. 그것은 자유의 평화(peace of freedom)이고-따라서 정당한 법률에 의거하며- 행복의, 평등의, 연대의식의 평화이며, 바로 그 안에서 모든 시민들이 가치 있고, 서로 공생하며 나눌 수 있는 평화이다.

평화, 개발 그리고 민주주의는 서로 상호작용하는 삼각형을 형성한다. 이들은 서로 강화시킨다. 민주주의 없이 지속가능한 개발은 불가능하다: 불균형은 지속불가능하며 강제와 지배로 이어진다.”

박 대사가 언급하는 평화권이 위 유네스코의 평화권 선언에 비추어 볼 때 어떤 종류의 평화인지는 명백하다. 그것은 북한의 무력 앞에 “침묵하는 평화”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면서 박대사는 이 침묵의 평화의 근거로서 동서독간에 1975년 ‘평화협정’이 맺어지기 전에 서독은 동독의 인권을 논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가 과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서독 간에는 평화협정을 맺은 적이 없다.

1975년에 동서독이 조인한 평화협정은 양국 간의 협정이 아니라 35개국이 조인한 헬싱키평화조약이다. 여기에서 인권은 인류의 보편적인 권리로 분명히 명문화되었다. 동독의 반체제인사들이 동독정부에 저항할 때 계속적으로 내세운 논거가 헬싱키협정이었음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서독, 동독 주민의 주요 인권조항 기본협정에 명문화

동서독 양국 간에 있었던 조약은 1972년 브란트와 호네커가 서독과 동독 정부의 수반이었던 시절에 체결된 ‘기본협정(Grundlagenvertrag)’이었다. 브란트는 할슈타인원칙을 포기하고 동독의 주권을 사실상 인정하는 이 조약의 전제조건으로서 “동서독은 서로 간에 외국이 아닌 특별한 관계이며 자결권에 의거하여 통일을 이루려는 독일연방정부의 정치적 목적과 모순되지 않음”을 명백히 하였고 동독인민의 국적에 대하여는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대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서독은 동독의 인권은 언급하지 않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브란트는 동독인민의 주요인권조항을 아예 기본협정의 항목으로 명문화하였다. 즉 그것은 가족의 재결합, 여행과 방문 목적의 왕래의 자유화, 비상업적 물품들의 교류, 그리고 서독언론의 동독진출 등을 명문화한 것이다. 이것은 “인권(Menschenrechts)”이라는 표현만을 안 썼을 뿐 사실상 동독인민의 삶을 엄청나게 개선하였고, 궁극적으로 독일통일에 기여한 것이다. [소련의 브레즈네프는 호네커에게 일년 4만대의 승용차와 수백만의 서독국민의 동독방문에 대하여 강력히 항의한 적이 있었다.]

필자는 남북한간에 통일 이전의 동서독 수준의 절반이라도 인적 교류가 가능하다면 그것으로 북한의 극악한 인권문제는 거의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평화권이 유엔 인권헌장에 구체적으로 명문화되지 못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폭력행위 자체를 금기시 할 경우 살인, 강도, 강간과 같은 폭력범을 다루기 위한 국가독점폭력, 즉 공권력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히틀러나 김정일정권과 같은 망나니 정권의 비행을 순전히 도덕적 호소로만으로는 제거할 수 없다는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화권을 흔히들 ‘전쟁의 문화(culture of war)’와 대비시켜 ‘평화의 문화(culture of peace)’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사회의 구성원들 간에 갈등을 규제하는 두 가지 규칙이 한편으로는 도덕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법이듯, 평화도 평화를 사랑하는 마음과 태도, 즉 평화권과 함께 평화를 지킬 수 있는 물리적 힘이 뒷받침 되어야 유지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결국 김정일 파시즘 정권 옹호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출발

필자는 박 대사의 성공회대 강연이 결코 개인적인 의견이나 즉흥적인 발언도, 또 그의 표현처럼 깊은 종교적 신앙심에서 우러나온 발언도 아니라고 본다.

그것은 김대중정권부터 노무현정권에 이르기까지 언어의 표피를 이용하고, 논리의 전도와 파편화를 통해 끊임없이 김정일파시즘정권을 옹호하려는 “정치적 의도”에서 나왔다고 결론지울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비논리의 자기신념화가 “유엔에서마저 북한의 인권이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있다”라고 판단하게 된 배경일 것이다.

한국의 친김정일파시즘에 경도한 단체들은 북한 인권문제와 관련하여 툭하면 “미제국주의” 핑계를 들먹이다 유럽공동체가 북한인권문제를 제기하자, 이제는 인권문제를 선별적으로 제기하고 있다는 불평을 늘어놓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그처럼 비정치적이고 순순하게 인권문제를 논하고 싶으면 유럽공동체가 정치적 의도로 ‘봐준’ 나라들의 인권문제를 유엔에서 왜 제기하지 않는가? 아니면 중국의 인권문제는 왜 제기하지 않는가?

어쩌면 이들은 이제 다른 나라의 인권탄압에 대한 관심, 즉 인권감시(Human Rights Watch)가 아니라,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제기에 대한 관전평만 늘어놓는, 즉 행동의 주체성도 능동성도 잃어버린 도착적 인권관음증(Human Rights Voyeurism)에 빠지지나 않았나 의심이 들뿐이다.

홍성기/ 아주대 특임교수(철학박사)

홍성기(洪聖基)
-서울출생(1956)
-경기고, 서울대 독문과 졸업
-뮌헨대 철학석사
-자르브뤼켄대 철학박사(논리학, 동서비교철학)
-아주대 특임교수(현)
-주요논문 : <용수의 연기설><괴델의 불완정성 정리 비판>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