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송환 在北 국군포로 1만3천명

6.25전쟁 후 상호 포로송환 때 북한이 남한에 돌려보내지 않은 국군포로는 1만3천94명이며 이 가운데 6천430명은 북한군에 강제복무하면서 내무성과 철도성의 각종 공사 작업 인력으로 동원된 것으로 밝혀졌다.

북한은 특히 6.25전쟁 초기 남한 점령기에 인민군에 강제동원했던 ’의용군’가운데 휴전 당시 북한에 있던 4만2천262명도 돌려보내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북한 주재 블라디미르 라주바에프 소련 대사는 “북한 동지들은 남한 포로들의 귀향 소망에도 불구하고 돌려보내지 않기로 했다”며 미송환 국군포로 숫자를 이같이 본국에 보고했다고 선 즈화(Shen Zhihua) 베이징(北京)대 현대사연구중심 특별연구원이 ’한국전쟁기 북ㆍ중 갈등과 해소’라는 논문에서 밝혔다.

선 즈화 연구원의 논문은 옛 소련과 동구권및 중국 등 과거 냉전시대 공산권의 외교문서를 비롯해 각종 기록과 관계자들 인터뷰를 토대로 집필한 것으로,미 우드로 윌슨센터의 ’냉전국제사 프로젝트(CWIHP)’를 통해 영역됐다.

국방부는 그동안 1997년 10월 가족의 신고와 병적부를 통해 확인, 발표한 1만9천409명의 ’6.25참전 행방불명자(실종자) 명부’를 근거로 이 명부에 미송환 국군포로가 상당수 포함돼 있을 것으로 추정해 왔다.

그러나 라주바에프 대사가 북한 당국으로부터 입수한 것으로 보이는 이 수치에 따르면 미송환자는 국군포로 1만3천94명에, 강제 ’의용군’ 4만2천262명 까지 포함할 경우 5만5천356명에 이르게 된다.

특히 라주바에프 소련 대사가 미송환자에 ’의용군’을 포함시킨 것은 이들이 국군포로는 아니지만, 강제동원됐으며, 따라서 일종의 전쟁포로 성격임을 인정한 것으로 보여, 생존 국군포로는 물론 이들 강제 ’의용군’의 생존자 문제도 국내 가족 등에 의해 제기될 소지가 있다.

강제 ’의용군’ 미송환자가 4만2천262명에 달한 점으로 보아 북한 인민군이 강제동원한 ’의용군’의 총 규모는 엄청 날 것으로 추정된다.

선 즈화 연구원은 “북한은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노동력 확보 필요성 때문에” 국군포로를 송환하지 않았다며, 휴전 협상 때 중국측은 쌍방 포로의 “전원 송환”을 주장한 반면 북한측이 이를 주장하지 않고 휴전 협정 체결을 서두른 것도 이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4월 워싱턴에서 열린 미국의 보수단체 디펜스 포럼 주최 강연회에서 탈북 국군포로인 김창석(가명)씨가 “1953년8월 중순 중공군 병원에서 평안남도 강동군 해운광산으로, 다시 신창 탄광으로 이송됐다. 김일성은 값싼 노동력을 국군포로들에게서 찾았다고 본다. 국군포로들은 안전교육도 없이 광산으로 보내졌다”고 증언한 것도 북한의 미송환 이유가 노동력 확보에 있었음을 뒷받침한다.

북한이 휴전 협정 체결을 전후해 송환한 국군포로는 8천343명에 불과하고, 그 이래 북한엔 북한 인민군에 ’자원 입대’한 사람외에 국군포로는 없다고 주장해왔다.

휴전협정 당시 김일성(金日成) 주석은 전쟁포로 문제로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이 문제로 논란을 계속할 필요가 없다. 미군의 공습으로 손실만 가져오기 때문이다”라며 우선 협정을 체결한 뒤 포로문제는 정치회의로 넘겨 계속 연구할 것을 주장했다고 라주바에프는 1952년초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북한과 중국은 6.25 전쟁중인 1951년 11월 국군포로는 북한이, 기타 나라 포로는 중국이 각각 관리키로 했었다.

북한은 이들 포로를 “믿을 수 없는 계층”으로 분류해 월남자의 가족, 유엔군의 북한 점령기 때 조직된 ’반혁명 단체’ 가입자 출신과 가족, 월북자, 구 지식인, 북송 재일교포, 중소 상인, 전 종교인 등 다른 믿을 수 없는 계층들과 함께 “일상생활의 모든 면을 감시”하고 격리했으며 “특히 그 자식들을 감시”했다.

CWIHP가 수집, 영역한 당시 헝가리 대사관의 본국 보고서(1964년6월1일)는 조선노동당 중앙위 전체회의 비밀문건을 입수한 결과 “놀랍게도” 이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며, “분단국이라는 점때문에 어느 정도는 이해되지만, (북한측 주장대로라면) 남한에서 인민군에 자원입대한 사람들까지 의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한편 북한은 4.19혁명 후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등의 혼란한 한국 정세 속에서 대남공작부서를 조선노동당에 신설한 뒤 남한의 사회대중당(the Socialist Mass Party)에 재정지원을 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옛 동독 문서를 중심으로 1949-1989년 북한과 동독관계를 분석한 독일 학자 베른트 쉐퍼의 논문에 따르면, 북한은 후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60년 방소한 김일성 주석에게 대남 정책을 유연하게 하라고 충고한 대로 대남공작부서를 만들었다./워싱턴=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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