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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6자회담의 미국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차관보가 지난 8월 17일 한미 양국이 베이징 6자회담 때 북한과 평화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문제를 검토했고 중국과도 이미 협의했다고 밝힌 바 있다.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철수 등 골치아픈 문제가 뒤따른다는 이유로 그간 평화협정 거론을 꺼려왔던 미국이 공개적으로 이를 논의할 수 있다고 밝힌 자체가 종전과 다른 입장변화로 해석된다. 그러나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은 “평화협정은 핵문제가 풀린 이후 관련국간 적절한 포럼을 만들어 논의할 사안”이라고 못박았다.
미국측의 ‘평화협정 체결 가능성’ 언급은 북미관계 정상화에 대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북한의 핵포기 결단을 촉구하는 측면이 있어 보인다. 평화협정 논의는 그동안 북한이 끈질기게 제기해온 이슈다. 북한은 1974년 최고인민회의 제 5기 3차회의에서 대미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이후 줄곧 협정체결 당사국은 북한과 미국이라고 주장해왔다.
또 이번 8.15 행사때 북측 대표단이 국립 현충원을 참배한 것도 6자회담 때 거론된 평화협정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내보인 평화의지 제스처로 해석됐다.
“북핵 끝장낼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것” 발언
따라서 힐 차관보의 이번 발언과 8.15 행사때 북한 대표단의 파격 행보를 볼 때 평화협정 체결 문제는 이미 관련국 사이에 상당히 심도깊은 논의를 한 것으로 추정되고, 차기 6자회담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것은 분명해 보인다.
북핵 문제가 딜레마에 빠지자 부시 행정부는 “평화협정 체결이 북한의 핵폐기를 유도하기 위한 포석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북한이 핵폐기를 결심하면 평화협정 문제도 논의할 수 있다는 미국의 입장은 미국이 얼마나 북핵 폐기에 집착해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 준다.
힐 차관보는 8월 11일 전략문제연구소(CSIS) 연설을 통해 “미국은 북핵 협상 타결이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고 이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 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의 표현은 평화협정 체결 등 북한의 요구를 망라한 포괄적 보상책을 뜻하는 것이다. 한국이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것이다.
힐 차관보의 발언은 평화적 핵 이용권의 북한권리는 용인할 수 없지만 대신 “북핵을 끝장낼 수 있다면 평화적 핵 이용권을 제외한 그 무엇이든 북한이 원하는 것은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힐 차관보가 북핵 보유를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한 그 ‘everything’에는 대체 무엇 무엇이 들어갈 것인가?
미-북 평화협정, 중국형이나 월맹형 가능성
힐 차관보의 발언만 놓고 볼 때, 그것은 우선 “평화적 핵은 안되고 평화협정은 된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평화협정을 핵 폐기의 강력한 유인책으로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미국이 평화적 핵 이용권 문제가 핵확산방지에 중요한 사안이듯이 한국에게는 평화협정 체결 문제가 한국안보에 중요한 사안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정전협정의 폐기를 의미하는 바,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는 한미양국이 유지해 온 기존의 대북억제 틀을 완전히 뒤집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정전협정은 지난 50년간 주한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는 조건 하에 체결된 것이며, 주한미군이 한국 땅에 머물러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전쟁억제의 수단으로서 기능해 왔다. 또한 정전협정은 주한미군으로 하여금 한국을 보호해주는 안보 우산의 최일선 역할을 담당하게 함으로써 한국이 고속의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한 한국의 버팀목이나 같았다.
따라서 힐 차관보가 언급한 ‘정전협정 종식 및 평화협정 대체’라는 안은 한국의 버팀목을 허물 수 있는 안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빅터 한슨(Victor Hansen)은 8월 20일자 시카고 트리뷴지 칼럼에서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자제함으로써 가자지구, 이란, 북한에서 벌어질 지역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북한의 경우는 “북미간 평화협상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남북한이 통일의 길로 달리는 것”이라고 상정했다. 달리 말하자면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남한과 통일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미국 국익에 부합한다는 취지다.
미국이 북한의 핵폐기 유인책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고 가정할 경우, 그 유형은 미국이 과거 적성국과 관계개선을 취했던 접근방식에 비추어 볼 때 ‘중국형’ 이나 ‘월맹형’ 이 될 것이다. 중국형은 미ㆍ중이 1972년 상해공동성명과 1979년 수교 공동성명 등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 관계정상화를 맺은 형태로서, 대만과 중국은 그 후 지금까지도 갈등관계를 지속해 오고 있는 경우이다.
반면, 월맹형은 미국과 월맹이 1973년 파리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등 급진적인 과정으로 월남문제 해결에 합의를 보았으나 월남과 월맹은 그 후에도 교전관계를 지속하다가 결국 월남이 공산화된 경우다.
북핵문제 해결이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우위를 차지한 데다 마땅한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시점에서 미국과 북한의 요구가 일치할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평화협정을 통한 안전보장과 핵 폐기를 맞교환하려고 시도할지도 모른다. 미국 주도의 핵문제 해결방안으로 정전협정이 급속도로 평화협정으로 대체되는 사태가 전개되는 것은 한국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란 점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평화협정과 4가지 안보영향
미국 주도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한다고 가정할 경우, 그러한 상황은 한미간의 군사동맹은 더 이상 존립근거를 갖기 힘들 것이다. 그러한 사태가 한국의 안보에 미칠 영향을 몇 가지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남북한 등거리원칙’ 으로 전환할 것이다. 미국은 남북한에 대해 정치적 지렛대를 강화함으로써 한반도 문제를 자국의 영향력 하에 두고 이를 중국 견제에도 활용할 것이다. 남북한은 대미관계 유지를 위해 외교적 경쟁을 벌이는 형국이 될 것이다. 주요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ㆍ 북간 직접 접촉 기회의 증대로, 한국은 정치ㆍ 외교ㆍ 군사적으로 소외되고 고립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둘째,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 후 북한은 기존의 대남전략을 더욱 공세적으로 구사할 것이다. 북한은 침략국ㆍ 테러국에 대한 면죄와 북ㆍ 미 적대관계 해소로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대해 근접 견제가 가능해짐에 따라, 크고 작은 한반도 군사분쟁에 대한 대처 또는 대남전략 구사를 훨씬 노골적이고 대담하게 펼 것이다. 예컨대, 북한은 남북간의 군사충돌이나 분쟁문제를 민족내부 문제로 돌림으로써 유사시 미국 또는 유엔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킬수 있다고 확신할 것이다.
셋째, 정전체제 파기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압박요인이 가중될 것이다. 평화협정 체결은 필연적으로 한미동맹 구조의 변경을 강요하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한미연합방위체제가 약화될 우려가 없지 않다. 한반도평화협정 체결은 정전협정 폐기와 유엔사 해체를 전제하지만, 주한미군문제는 법적으로 다른 차원의 문제이므로 직접 연계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협정 이행 과정에서 북한이 벼랑끝 전술로 집요하게 미군철수를 들고 나올 경우 주한미군의 완전철수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넷째, 평화협정 체결 여파로 한국의 사회각층에서 다양한 여론이 분출됨에 따라 한반도 안보상황에 대한 국론 분열현상이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평화협정이 남북한 평화체제 구축에 유리하다고 속단하고 보안법 철폐 대규모 군축 등 전향적인 대북조치를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평화협정 체결 및 남북간 평화무드 증대로 인해 전쟁발생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가 지나쳐 자주국방력 확충을 위한 국방비 확보 여건이 불리해지고 군의 대북억제 기능이 약화될 수 있다.
남만권/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