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행동해야만 우리도 행동”

13개월만에 6자회담이 시작된 지난 18일, 눈 덮인 평양의 짙은 안개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험난한 여정을 보여주는 듯 했다.

대북지원단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이 지원한 조선적십자병원 신경.호흡기병동 준공식 취재차 18∼21일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만난 북측 관계자들은 핵보유 정당성을 강조하며 “미국이 행동해야만 북한도 행동할 것”이라는 메시지 전달에 주력했다.

◇”미국의 핵위협 하에 어떻게 우리만 핵을 포기하나” = 북측 관계자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핵포기를 위해서는 미국이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9.19 공동성명에 포함된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의 원칙이 북측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거듭 밝혔다.

한 관계자는 “미국이 하나를 하면 우리도 하나를 하고, 미국이 말에 그치면 우리도 말에 그칠 뿐”이라고 말했다.

김일성 주석이 비핵화를 유훈으로 남겼지만 미국의 핵 위협 때문에 핵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대남기구인 민족화해협의회 당국자는 “조선반도(한반도) 인근에서 미국이 핵 훈련을 수시로 하고 있고, 인근 바다에는 미국의 핵 전함들이 수시로 다니고 있다”면서 “제나라를 지키기 위해 핵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조선의 핵을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도 끊임없이 펼쳤다. ‘남쪽에 무슨 핵이 있느냐’는 질문에 “핵이 없다는 것을 확인해 봤느냐”고 되물었다.

시내 곳곳에는 ‘핵보유국이 된 5천년 민족사의 역사적 사변을 길이 빛내이자’, ‘세계적인 핵보유국을 일떠(일으켜) 세우신 절세의 영장” 등 핵선전 구호들이 곳곳에 내걸려 있었다.

◇”남쪽이 너무 모른다” = 북측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왜 핵을 가지게 됐는지 남측 주민들이 너무 모른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핵위협 때문에 핵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만 동포들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논리를 거듭 펼쳤다.

민화협 리춘복 부위원장은 “민족을 지키기 위해 핵을 만든 것”이라면서 “남쪽 동포들은 추호의 걱정도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핵은 우리 동포한테 아무런 피해가 없는 것이다. 남쪽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미국의 대조선(대북) 압살 정책을 막기 위해 핵을 만든 것이라는 것을 명백히 얘기해 왔지 않느냐. 북이나 남이나 민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북측 관계자들은 남쪽 언론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여과없이 보도해 달라”는 주문도 쏟아냈다.

◇“우리는 고난의 행군도 이겼다” = 핵 실험 이후 각종 제재 속에서도 자신감은 넘쳤다.

“쌀 한톨, 비료 한 줌에 핵을 포기하지 않는다. 비료가 없다고 농사를 못 짓느냐”면서 “민족이 망하는 것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정신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펼쳤다. “이라크를 봐라. 아프가니스탄을 보라”고도 했다.

한 관계자는 “식량 사정이 안 좋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지금은 그래도 괜찮다. 내년 보릿고개가 걱정”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는 고난의 행군도 이겼다. 그 어려움도 이겼는데 이것 쯤은 괜찮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북한의 전력 사정과 관련, “그래도 작년, 재작년보다 훨씬 좋아졌다. 자력갱생의 입장 속에 중.소형 수력발전소를 많이 건설한 덕분”이라면서 “평양만 해도 훨씬 밝아졌다”고 설명했다.

◇조선적십자병원 병동에도 핵보유 선전 문구 = 남측의 민간 지원으로 건설된 조선적십자병원 신경.호흡기 병동 내부에도 ’핵보유국이 된 5천년 민족사의 역사적사변을 길이 빛내이자’는 핵보유 선전 문구가 눈에 띄었다.

1천여개의 병상을 갖추고 있는 북한 내 최대인 이 병원의 4인실 침실. 남측 손님들을 맞기 위해 병동 내외부는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병실 복도에는 ’의사.간호원을 비롯한 모든 의료 일꾼들이 혁명적 동지애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정신을 가지고 환자 치료에 최대의 정성을 쏟아 붓도록 하여야 합니다. 김정일’이라는 격려 문구도 크게 내걸려 있었다.

심일철 원장은 “하루에 1천∼1천500명의 외래환자가 온다”고 말했다. 의사 수는 900여명, 전체 직원은 2천명에 달했다. 병원 관계자는 “일단 아프면 각 구역의 병원에 간 뒤 시병원→중앙병원의 순으로 오게 된다”고 설명했다.

◇무채색의 도시 평양 = 핵실험 후 첫 겨울을 맞은 평양은 무채색의 도시나 다름 없었다.

짙은 눈이 내린 지난 19일, 하늘과 건물, 차량, 행인은 온통 검.회색 일색이었다. 두툼한 외투를 입은 주민들은 걸음을 서둘렀고, 여인들의 등에 진 봇짐들도 쉽사리 찾아 볼 수 있었다.

전력과 에너지난을 보여주듯 기자가 묵은 47층 양각도호텔도 로비는 한기가 느껴졌고, 객실은 어둠침침했다. 썰렁한 한기는 21일 찾은 평양 단고기 집에서도, 순안비행장서도 느껴졌다.

제설 장비가 부족한 북한에서는 눈이 올 때마다 주민들이 직접 도로의 눈을 치우는 모습도 목격됐다. 20일 아침 8시, 평양에서 묘향산으로 가는 비교적 잘 닦여진 4천선 도로는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할당된 구간마다 주민들이 동원돼 손 삽으로 일일이 도로의 눈을 치우는 모습이 이어졌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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