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 군부를 무너뜨린 獨비폭력 운동이 주는 함의

동독의 베를린 소재 겟세마네 교회(Gethsemanekirche)와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 교회(Nikolaikirche)는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만을 갖고 있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두 교회는 동독 내 자유와 민주화의 대명사이자, 이를 위해 투쟁하던 재야 인사들의 보루(堡壘)로서의 의미가 더 크다. 동독을 와해시키고 통일의 길을 열어준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가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월요데모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평화기도 모임으로부터 발전한 시위문화다. 당시 평화기도는 동독 기독교 저항문화의 표현이었고, 비폭력을 그 수단으로 했다.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가담했던 평화기도 운동은 1981년부터 시작됐고, 1985년 그 힘이 활성화될 때까지는 한 조그만 교회의 기도 운동에 불과했다.

이 조그만 평화기도가 동독 공산당에 대한 저항운동의 산실이 된 것은 1988년 기도모임 후 벌인 시위 때문이다. 이때부터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기도는 늘 시위행진의 출발점이 됐고, 동시에 공안당국의 관찰대상이었다. 1989년 5월에는 공안 경찰이 교회를 포위해 시위를 막기도 했다.

하지만 평화기도 모임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 라이프치히의 다른 교회로 확산돼 갔고, 경찰력도 이에 비례해 증가됐다. 악화일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1989년 9월 4일에는 평화기도가 끝난 후 최초로 동독 공산당의 독재에 저항하는 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약 1천명의 시위대원들은 “슈타지 사라져라” “여행의 자유를 달라, 그렇지 않다면 대량탈출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과정에서 슈타지의 무력 진압으로 인해 70명의 재야인사들이 체포됐다. 그 이후 매주 월요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동독을 새로운 사회로 변화시킨 ‘월요데모’가 시작됐다.

1989년 10월 9일 월요데모에는 무려 7만 명이 가담했고, 최초로 동독 공안당국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시위대들은 늘 ‘비폭력’을 연호했고, 무력으로 시위를 중단시키려 했던 공안당국의 노력은 허사였다. 사통당(SED)은 공식적으로 동독교회에 정치적인 행동을 삼가고 기도운동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라이프치히와 함께 베를린에서도 민주화에 대한 요구와 반공시위가 진행됐다. 1989년 10월 2일에는 나치시대 저항의 대명사이자 개신교 지도자들의 민주화 운동의 산실인 동베를린 겟세마네 교회에서 정치범들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동시에 교회 앞에서는 동독 공산당에 대한 경고 시위가 시작됐다.

이런 가운데 10월 16일에는 전 동독 지역에서 약 12만 명이 참가했던 월요데모가 일어났고, 그 규모에 눌린 공안경찰은 계획했던 대규모 진압작전을 수행할 용기를 잃고 말았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18일, 호네커 총 서기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지난 18년 간의 권좌에서부터 떠나고 만다.

막강했던 슈타지와 최신예 장비로 무장한 군부를 무너뜨린 게 라이프치히의 한 조그만 교회에서 시작된 주민들의 비폭력 기도운동이었다는 사실 속에서 독재 권력의 허상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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