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北 공교육①] 김정일 ‘계급論’, 北 ‘영재교육’ 망쳤다

김일성은 1984년 5월 17일부터 7월 1일까지 한 달 반 일정으로 동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동유럽 국가를 방문할 때 마다 어린이들로부터 축하의 꽃다발을 받은 김일성은 통역을 통해 ‘미래의 희망이 무엇이냐?’고 다정히 물었다.

어린이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과학자’였다. 동유럽 교육현장 어디를 둘러보나 모든 학생들의 희망은 과학탐구였고 그만큼 교육열도 높았다.

평양 순안비행장을 통해 귀국한 김일성은 비행장에서 꽃다발을 올리는 어린이에게 똑같이 물었다. ‘미래의 희망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 아이의 대답은 ‘예술인’이었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교육현장들을 돌아보며 큰 충격을 받은 김일성은 귀국 후 곧바로 평양시 ‘대동문 인민학교’와 ‘평양학생소년궁전’을 비롯한 일선 교육 현장부터 찾았고 학생들과 일일이 담화를 나누었다.

결과는 최악이었다. ‘앞으로의 희망이 뭐냐?’고 묻는 김일성의 질문에 학생들은 미리 약속이나 한 듯이 ‘예술인’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며칠 후 7월 6일, 김일성은 동유럽 방문 결과를 보고하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9차 전원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에서는 북한의 심각한 교육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고 김일성은 교육부분 일꾼들에 대한 비판을 통해 우회적으로 김정일을 책망했다.

김일성의 분노, 깜짝 놀란 김정일

“모두가 예술인이 되면 과학은 누가 발전시키고 이 나라는 누가 먹여 살리느냐?”

김일성의 고함소리에 간부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당 중앙’ 김정일의 표정이 특히 일그러졌다.

1970년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와 치열한 후계자 쟁탈전을 벌인 김정일은 ‘5대혁명가극’, ‘불멸의 역사’와 같은 김일성을 주제로 한 문학예술 사업을 주도했다. 이 과정에 김일성의 두터운 신임을 샀고 결국 삼촌 김영주와 의붓 어머니인 김성애의 세력들을 밀어내고 김일성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올라서게 된다.

김정일이 주도하는 혁명예술 바람으로 북한에서는 기초 학문보다 예술 분야가 각광받는 풍조가 발생했다. 학생들 역시 예술 방면에 열중했다.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김정일은 노동당 중앙위 전원회의가 끝난 직후 7월 20일에 ‘전국교육일군열성자회의’를 소집, 혁신적인 교육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당시 ‘전국교육일군열성자회의’에 보낸 김정일의 서한이 바로 오늘날 북한이 교육강령으로 삼고 있는 노작 ‘교육 사업을 더욱 발전시킬 데 대하여’다. 이 노작에서 김정일은 교육의 목표를 과학기술, 온 사회의 인텔리화로 명명하고 ‘영재교육’을 실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이에 따라 1985년 9월 1일, 시범적인 영재교육 단위로 ‘평양 제1고등중학교’와 ‘김일성고등물리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한다. 그로부터 2년 후에는 각 도마다 ‘1중학교’들이 설립됐고 각 지역에서 최고 두각을 나타내던 학생들을 선발, 본격적인 영재교육을 시작했다.

허울만 남은 영재교육, 교육질서 근간 흔들어

북한에서 영재교육은 이렇게 후계자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김정일의 야심에서 출발했지만 과학중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창출했다는 측면에서 하나의 큰 변화로 꼽힌다.

주로 자연과학 영재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1중학교에서는 일반학교들과는 높은 수준의 교과서들을 특별히 제작해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이곳 졸업생들은 대체로 ‘평성리과대학’ ‘강계국방대학’ ‘김책공업대학’을 비롯한 과학 전문대학들에 진학했고, 1992년경부터 대학을 졸업한 첫 세대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 2002년부터 북한 당국이 군사복무를 형식적으로 ‘모병제’에서 ‘징병제’로 개정했으나, 여전히 1중학교 학생들은 징병제에서 제외되는 혜택을 부여하기도 했다.

특히 1중학교 졸업생들이 과학 분야만이 아닌 사회 각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1중학교는 미래 인생의 배경을 마련하기 위한 발판으로, 또 군 복무를 피하면서도 출세를 보장받는 입신의 기회로 주목 받게 된다.

돈 있고 권력 있는 가정들이 너도나도 자식들을 1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치열한 로비를 벌였다. 국가 영재교육이 권력과 돈에 휘둘리면서부터 결국 ‘귀족학교’로 전락하는 길을 걷게 됐다.

사실 ‘영재교육’이 북한의 군사력이나 과학기술 발전에 큰 영향으로 미치기도 했으나, 결국 교육차별화로 귀결돼 일반학교들의 교육질서를 파괴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반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우리는 애초에 사회적인 발판을 갖추지 못한 낙오자’라는 자격지심을 갖게 된다. 더구나 각 도마다 1중학교 졸업생들이 늘어나면서 일반 중학교 졸업생들의 성공기회는 급속히 위축됐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교육 차별화는 더욱 심각해졌고, 돈 없고 권력 없는 가정의 학생들은 애초부터 1중학교 입학 기회마저 차려지지 않았다.

‘고난의 행군’ 당시 김정일의 ‘계급교양 강화’ 방침은 영재교육의 본질마저 흔들어 놓았다. 김일성 시대부터 북한 당국이 사회 통제의 기본 규칙으로 만들어 놓은 ‘출신성분’이라는 평가기준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왔던 분야가 바로 영재교육 분야였다. 그러나 1998년부터 각 도, 시, 군, 리는 물론 대학, 학교, 공장, 기업소에 들어선 ‘계급교양관’은 북한 사회를 철저히 ‘출신성분’으로 구분 짓는 결과를 낳았고, 1중학교 입학 사정에도 출신성분이 선발 기준으로 활용됐다.

결국 권력형 세습사회 구조가 공고해짐에 따라 출신성분의 대물림이라는 악순환이 고착화 됐고, 수많은 영재들이 묻혀버린 것이다.

김정일의 계급교양 지침은 ‘영재교육’ 자체를 붕괴시켰을 뿐아니라 ‘일반교육’의 기반마저도 허물어 버렸다. 북한 당국이 부르짖는 ‘11년제 의무교육’이 말 그대로 빈껍데기로 전락한 것이다.

이때부터 ‘출신성분’ 대물림에서 벗어나려는 부모들이 학교 밖으로 눈을 돌리게 된다. 출신성분을 바꿀 수 없다면 돈이라도 많이 벌어야 한다는 판단이 사회적 기류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학부모들의 이러한 요구는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바로 ‘사(私)교육 시장’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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