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北공교육②]빈곤 학생은 시장으로, 부유 학생은 사교육 장으로

1990년 5월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으로 선출되고 그 이듬해인 1991년 12월에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다. 이로써 김정일은 노동당은 물론 군의 통수권까지 장악하고 권력기반을 공고히 한다.

당시 김일성은 국가주석과 국방위원장을 겸임하고 있었지만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고 권력의 주도권은 이미 김정일에게 넘어갔다.

김정일의 권력은 공고화 과정을 거치고 있었지만 경제는 추락 국면에 들어섰다. 1991년 4월 동구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되면서 ‘바르사뱌조약기구’가 해체된다. 동구 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하면서 북한의 교역과 원조에도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이후 북한 당국의 재정 위기가 심화되면서 교육에 대한 지원도 유명무실해 졌다. 학교를 유지하는 비용 대부분은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부담으로 떠맡겨 졌다.

▲이름만 남은 무상교육, 바닥난 학교 예산

1977년 북한은 ‘전반적 11년제 의무교육제’를 선포하고 스스로 ‘배움의 나라’로 추켜세웠다.

김일성은 어린이들을 ‘나라의 보배’라고 부르고 교육시설에 대한 현장 지도사업을 자주했다. 설날이면 반드시 어린이들의 ‘설맞이 공연’을 참관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 비해 교육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다. 초기 후계자의 지위에 있을 때만 김일성과 함께 ‘설맞이 공연’을 참관하고 학교 방문을 같이 했지만 김일성 사후에는 이러한 모습마저 자취를 감췄다.

김정일은 학생들을 노동력 보충 대상으로 내세웠다. 김정일은 대대적인 봄·가을 농촌지원 투쟁과 각종 ‘좋은 일하기’ 명목의 징수 행위를 강제해갔다.

대표적인 것이 토끼 사육과 인민군 지원품 보내기 운동 등이다. 토끼를 사육해서 내거나 만약에 토끼가 없다면 돈으로 내게했다. 학교에서는 꼬마탱크 같은 각종 모형 시설을 만드는 비용까지 학부모들에게 부과했다.

북한식 무상교육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이 이곳에서는 식량난 이후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1990년부터이다. 교육에 대한 국가적 투자가 줄면서 북한의 모든 학교들은 학생들의 부담에 의한 ‘자율적인 경영’을 시작했다.

학부모들은 “차라리 월사금을 내고 학교에 보냈으면 좋겠다. 중국도 월사금만 내면 다른 부담은 없다는데…”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 첫 사례가 90년대 초부터 시행된 학교 난방 문제였다.

김일성 시대 북한은 탄광들에서 나오는 석탄을 학교들에 우선적으로 보내주고 난방문제를 해결했다. 하지만 김정일이 이 우선 배분에 교육시설을 제외하면서 각급 학교는 난방 문제에 부딪히게 됐다.

한국에 비해 겨울이 길고 기온도 훨씬 떨어지는 북한에서 교육기관들이 국가의 지원 없이 난방 문제를 해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 학생들을 통해 해결하라고 지시한 것은 사실상 ‘국가지원을 통한 무상교육’의 큰 틀에 균열을 내는 정책이나 다름없었다.

영리 활동이 없는 교육기관들은 90년대 초반부터 학생들을 대상으로 돈을 거두는 방법으로 개인에게서 석탄이나 화목을 사들여 난방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학생들에게 무료로 배포되던 교과서마저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학교들에서는 선배들이 쓰던 교과서를 다시 이용하는 운동이 벌어졌다. 교과서가 무료로 지급되는 학생 비율은 평양을 제외하고는 50%가 넘지 않았다.

이후에는 책걸상이나 학교지붕, 울타리 보수작업 비용에 이르기까지 학교를 유지하는 일체의 자금을 학생들로부터 현물로 거두거나 학부모들을 통해 돈으로 해결했다. 어떤 지역은 학과 시험조차 과목당 금액이 정해져 돈을 낸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학생들의 부담으로 학교가 운영되다보니 자연히 권력과 돈이 있는 집안 학생들이 학생 간부직을 차지하게 됐다. 빈곤층이나 농촌지역 학생들은 정상적인 취학 학생 비율이 30% 수준에 머물렀다.

▲ ‘교육 포기’와 ‘사교육’의 출연으로 공교육 붕괴 직전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거치면서 경제상황은 극도로 악화됐다. 여기 저기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상황에 학교는 뒷전이었다.

국가 배급이 끊기면서 교원들이 학교에 출근하지 못하거나 사표를 내는 경우가 빈발했다. 굶주린 아이들이 장기 결석을 하는 경우도 늘어 학교 운영 자체가 어려움을 겪었다.

‘고난의 행군’시기 학생들의 초모(군입대) 사업을 담당하는 군사동원부 관계자들은 “농촌학생들의 경우 절반 이상이 팬티도 못 입고 신체검사를 받으러 오고 있다”고 말했다.

부모들이 굶어 죽은 아이들이 거리를 유랑하는 ‘꽃쩨비’로 대거 등장했다. 생계가 어려운 대부분의 집 자식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장사를 위해 장마당에 뛰어 들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학업은 이제 먼 나라 이야기나 다름 없었다. 생활이 어려운 학부모들은 “큰일을 못 할 바엔 학교에 갈 필요가 없다. 그저 글이나 읽고 돈 계산이나 할 줄 알면 된다”는 식으로 아이들의 교육을 회피했다. 빈곤이 불러온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학생들의 출석률이 낮아지고 ‘공교육’이 파괴될 조짐으로 번지자 2000년대부터 북한 당국은 학교에 안 나오는 학생들을 대신해 학부모들을 처벌하는 방법까지 동원하며 학교 살리기에 나섰다. 하지만 식량사정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학교를 포기하는 학생들에 대해 북한 당국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른바 북한에서 상당수 취학연령의 학생들에 대한 ‘무교육’시대가 도래하게 됐다.

한편, 돈과 권력이 있는 집 자식들도 학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빈번해 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빈곤층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이 학부모들은 실속 없는 학교 교육에 대한 불만과 교육의 다양화에 대한 욕구 때문에 사교육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이기시작했다.

낡은 교육시설에 대한 국가적인 투자가 없는데다 교육용 자재들이 부족하다 보니 실질적인 교육이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은 1985년부터 고등중학교 수학교재에 ‘전자계산기(컴퓨터)’라는 장을 따로 만들어 컴퓨터에 대한 일반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학교에는 컴퓨터가 없어 빈 말공부만 해야 했다. 음악시간에 학생들이 악기를 만져보지도 못하고, 체육시간에도 축구공이 하나 없는 실정이었다.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교원들도 학생들에 대한 교육에는 전혀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북한에서 처음으로 사교육이 등장한 것도 이 음악 수업 때문이었다. 예술단 출신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학생들을 상대로 손풍금이나 바이올린을 배워주면서 사교육이 시작되었다. 초창기 개인 교습은 단순히 자식들에게 다양한 재능을 물려주려는 부모들의 욕망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북한에서 ‘사교육’ 열풍이 불게 된 결정적인 사유는 DVD플레이어의 광범한 보급이었다.북한 당국이 TV 채널을 고정하는 등 외부 소식의 유입을 차단하면서 주민들은 외부 영화나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DVD플레이어를 가정의 필수 생필품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DVD를 구입한 가정들은 북한 당국이 합법적으로 제작한 ‘교육문화방송(평양시만 시청)’이나 제1중학교(영재학교)들에서 진행되는 강의를 CD로 복제해 자녀들의 교육에 이용하게 되었다. DVD의 경우 재시청이 가능하고 유명 강의들을 편집한 것으로 학교교육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북한 공교육 파괴 실태는 올해 3월 ‘새 학년도 입학준비’를 맞으며 전국의 공공장소들에 ‘신입생 등록 공지문’을 광고한데서도 나타난다. 신입생 등록 명단을 작성해서 포고문 형태로 발표한 것이다.

지난 3월 17일 탈북지식인들의 단체인 NK지식인연대는 현지 소식통이 “북한 역사에 ‘신입생 등록 공시’라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개탄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돈 있는 사람들도 학교에 매 달 바치는 돈이면 조금 더 보태 개인 교사들의 교육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는다”면서 “보통 수학, 물리를 가르치는 사람들의 경우 한 달에 2, 3만원, 음악이나 미술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4, 5만원을 받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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