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함께 일어서는 대한민국을 향해

을씨년스러운 바람이 코끝을 날카롭게 스쳐가는 것이 계절은 한겨울로 치닫는다는 것을 내게 알린다.

차가움이 잔잔히 남아있는 아침, 아직 감긴 눈을 비비며 신문을 잡으면 추워진 계절만큼이나 음울하고 씁쓸한 이야기로만 가득 차있다. 얼어붙은 고용시장, 롤러코스터를 타는 환율, 무역 수지의 악화. 불길한 내용들만 빼곡히 적혀있는 기사들을 읽노라면 액조(厄鳥)가 지저귀는 것 같아 이내 내 마음은 울적해지고야 만다. 결국에는 다 읽지도 않은 신문을 접는다. 아직 대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나. 이 시대는 왜 이렇게 힘들게 돌아가는 것일까? 소심하게 속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세수를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간다. 누군가가 먼저 와서 샤워를 하고 나갔는지 거울에 뿌연 김이 서려 있다. 마치 나의 답답한 마음속처럼 불투명하게 증기로 가득 찬 거울. 그 거울을 손바닥으로 어르듯 문지르면 22살의 초췌한 얼굴의 내가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나. 하루사이 불쑥 자란 턱수염과 노랗게 익은 뾰루지는 내 근심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불안감으로 가득 찬 얼굴. 밉상이 되어버린 내 얼굴. 20대는 꽃다운 나이라며 그때를 그리워하고 동경하는 어른들이 많지만, 나의 얼굴에선 그런 젊은이의 낭만이란 찾을 수가 없다. 추리닝 하나 새로 사지 못하고 고등학교 추리닝을 아직까지 입고 있는 나는 빈곤이란 열등감 하나만으로도 그런 아리따운 사람이 되기엔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어언 22년 동안 집안의 장남으로 세상을 살아오며 얼마나 많은 힘든 시기를 겪었었는가. 고생의 깊이만큼 나의 얼굴에는 근심의 나이테가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었다.

1997년, 하루는 담임선생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눈을 감으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선생님께서는 절대로 눈을 뜨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조심히 ‘아버지나 어머니께서 직장을 잃으신 분이 있으면 조용히 손을 올려주세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철이 없었던 나이였던 터라 몰래 실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봤었는데, 많은 아이들, 특히 나와 친했던 아이들까지 손을 든 것을 보고 나는 적잖게 충격을 먹었던 적이 있다.

그 당시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다행이도 실직을 하시지 않으셔서 사방에서 떠들어대는 ‘IMF위기’라는 말은 나의 세상과는 먼 이야기라고만 생각 했었다. 그런데 나의 생각과도 다르게 세상의 위기는 주변에 명백하게 실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다른 제 3자가 아닌 나와 친한 친구들에게까지도……. 그때부터 내 주변에 숨어있던 위기들은 나에게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친구네 옷가게가 점포정리를 한다는 얘기부터 몇 동 아파트에서 어떤 남자가 자살했다는 흉흉한 이야기까지. 그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소스라지는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겁을 먹고 살 수밖에 없었다. 평소 어머니께서 ‘용돈을 아껴 써야한다’라고 말할 때 건성으로 ‘네네’하며 지나치던 어린 소년은 이제 ‘네, 아껴 쓸게요.’라고까지 말하며 동전 하나에도 돈의 소중함과 그리고 돈에 대한 무서움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런 어려운 시절이 겪으며 나는 고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고 세상과 단절하듯 공부에 매진하며 3년을 살게 되었다. 여전히 뉴스나 신문에서는 달갑지 않은 소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래도 경기는 점점 회복하는 듯 했다. 코스피가 상승한다거나 수출이 어느 정도로 증가되고,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었다는 희망찬 이야기들이 세상에 무신경해져버린 내 귀에도 간간히 들려왔기 때문이다. 내게는 어린 시절 두렵게만 느껴졌던 이 세상이 사춘기란 시간 동안 성숙해진 나의 외모만큼이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위기나 불안감에 대해 성숙해 지는 듯싶었다.

그러던 세상이 또 다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미국발 경제위기로 한국은 경제 위기를 또 한 번 맞닥뜨리게 되고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집값, 끝을 모르고 올라가는 물가, 그리고 늘어나는 실업. 나는 또다시 겁먹은 사내로 변하고 만 것이다. 몇 군데 넣은 원서가 다 떨어졌다고 울상 짓는 주변 선배들을 바라보며 아직 취직 준비를 할 나이도 되지도 않은 나는 어리석게도 지레 겁만 먹고 벌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대한 불신과 미움만 가득한 채.

그런 내게 처음으로 마음을 두드리며 다가온 사람은 나의 초등학교 친구였다. 우연히 고향에 내려가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어느 패스트푸드점 안에서 내게 어떤 아르바이트생, 바로 그 친구가 말을 걸어 온 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순박한 얼굴에 짧은 머리를 한 키가 작은 아이. 그리고 선생님이 우리들 보고 눈을 감으라고 했던 그 날, 우리 분단 맨 앞에서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던 아이. 그 아이는 창 밖에 걸어가는 날 알아채고 ‘어이’라고 부르며 날 반겨주는 것이었다. 훌쩍 커버린 우리는 반갑게 인사하며, 따사로운 햇살이 비치는 창 아래 점심을 시키며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공고를 졸업하고 이제는 기술로 돈을 벌어 멋지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녀석. 그 얘는 무슨 일이라도 하고 싶지만 지금 경기가 좋지 않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용돈을 조금씩 모아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나는 대학을 나오고 취직이나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이내 핀잔을 떨고 만다. 그리고는 다시 그때처럼 어려워져서 세상이 각박해지고 무서워지는 것이 아니냐고 친구에게 겁먹은 듯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친구는, “그래도 난, 그 때 네 어머니께서 많이 도와주셔서 참 고마웠었어.”라고 웃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녀석과 같은 학급이었던 그 시절, 우리 어머니는 도시락을 쌀 때 항상 그 친구 몫까지 싸서 주시는 것이었다. ‘우리가 왜 걔네 것까지 해줘야해?’라고 괜한 짜증을 부리면 어머니께서는 언제나 ‘우리 집도 힘들지만, 서로 돕고 살아야 하잖니.’하며 두 개의 도시락 가방을 내 양손에 하나씩 집도록 하시는 것이었다. 친구는 그 시절 아버지께서 실직을 하시며,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이혼도 하서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공부도 할 수 없었던 많이 힘든 시기였었는데, 우리 어머니와 같이 도와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 너무도 감사했고, 그리고 힘도 낼 수 있었다고 한다. 참, 그때는 우리 집도 많이 힘들어서 외식 하자는 소리만 해도 혼을 내고 그랬었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까지 많이 도와 주셨다는 생각을 하니 어머니께서 대단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런 생각이 미칠 즈음 내 친구는 또다시 말을 다시 잇는 것이었다. “나, 비록 아르바이트로 버는 돈은 적지만 그걸로 저소득층 얘들을 조금씩 도와 나가려고.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 너희 어머니께서 내게 해주신 것처럼 뭔가 힘이 되지는 않을까 생각하거든.”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가슴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족함에 대한 짜증과 사회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 찬 내 마음에 그의 말은 일종의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곳간이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남의 빈 곳간을 채워주려고 하다니……. 나는 친구의 성인과도 자세에 감동을 했다. 나는 항상 내가 가진 것이 없고, 세상은 어둠으로만 가득하여 헤쳐 나가기 힘든 곳이라고 여겼는데……. 그렇기 때문에 IMF위기 때에도 지금의 한국의 위기 상황에서도 지레 겁만 먹으며, 나의 미래와 한국의 미래는 뿌연 안개 속에 갇힌 것과 같다고 봤던 것이다. 하지만 친구는 비록 넉넉지 못한 일급과 악화된 경기 상황 속이지만 주변 사람들과 함께 일어서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다 같이 힘든 상황에서 서로를 붙들어 주며 열심히 살아가는 자세. 그것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가 아무것도 없는 한국이 수많은 나라들 속에서 우뚝 설 수 있도록 애썼던 것이 아니더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굶주리고 힘든 상황에 서로가 잘 살기위해, 한국이 잘 살기위해 서로가 용기를 심어주고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갔던 그 시절. 새마을 운동의 구호를 외치며 구슬땀을 흘리며 일했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들. 그에 비해 나는 어떠한가. 세상을 원망하며, 한국의 경제를 한심해하며 사회에 대해 두려움만 잔뜩 떨고 있는 나는 겁쟁이가 아닐까? 겁쟁이, 불안감에 밉상이 다 돼버린 겁쟁이.

그날 오후, 나는 친구의 청년다운 멋진 정신에 감탄하며 집으로 가는 돌길을 조심조심 걸어 나갔다. 내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과 함께.

저녁이 다 돼 집에 들어가니 현관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가득히 풍기고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부엌에서 부침개를 부치시고 계시는 것이었다. 항상 어려운 순간에도 남을 도와가며 함께 해쳐나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삶의 철학이 있었기에, 우리 집은 어려움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었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용기를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는지. 나도 이제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본받아야겠다. 더 이상 겁먹지 말고 어깨를 쭉 피고 힘차게 앞을 향해 달려가는 청년으로 말이다. 그리고 생각해 본다. 우리 모두도 지금처럼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서로 돕고 힘내 나간다면 그까짓 경제위기쯤이야 한 발에 밟아버리고 일어 설 수 있지 않을까하고. 그렇다면, 한국의 미래도 우리 마음대로 술술 풀리지 않을까?

노릇노릇 잘 부쳐진 부침개가 그릇 위에 소복이 쌓여있다. 아마도 몇 장은 구수한 향기와 함께 이웃집 현관을 두드리겠지? 어머니의 희망찬 메시지와 함께.

나상은(고려대 06학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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