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출신 386들이 김정일을 못 떠나는 이유

1980년대 초반 수도권 명문대학에 입학해 NL(민족해방) 계열에서 활동한 경력을 가진 386운동권들. 그들이 북한 노동당의 지시로 결성한 지하당 왕재산이 최근 검찰에 적발됐다.


검찰 발표를 요약하면, 지하당의 명칭은 ‘왕재산’이고 총책(당수)은 서울 J대 80년대 초반 학번 출신 김모 씨다. 1994년 노동당 대외연락부와 접촉해 당을 결성했고 이후 10년간 직접 접촉, 통신 등을 통해 국내 기밀 정보와 동향을 보고하고 지령을 접수했다. 핵심 조직원 5명은 김정일에 충성을 맹세하고 해외에서 1년에 한 차례씩 북한 공작원을 접촉했다고 한다.


이 사건을 접한 민족21 발행인 명진 스님의 발언이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번 사건을 공안기관의 조작이라고 단언했다. 명진은 “한국 사회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당을 만들고… 그런 건 정신 나간 놈들이다.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다”고 말했다. 맹쾌하다. 상식적인데다 정당하기까지 하다.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들이 2011년에 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활동했다니 이를 정상이라고 보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다면 뭔가? 명진의 말대로 수사 당국이 사건을 조작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면 마음은 편안해질지 모르겠다. 명진은 비슷한 류의 사람들에게 계속 순진하고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실은 불편하지만 마주서야 할 때가 있다. 


공안당국에 의해 이번 사건이 조작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간첩단이나 공안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관련 혐의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조작 가능성을 먼저 떠올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과거 좌파 혁명노선을 걸었던 안병직 서울대 교수는 최근 인혁당, 통혁당, 남민전 사건들이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대부분 사실이라고 증언했다. 그 이후에도 사건 자체가 조작된 경우는 거의 없다.


최근 공안 사건 재판은 진술이나 정황에 의존하지 않고 증거를 구체적으로 따질뿐더러 매우 까다로운 심리를 진행한다. 90년대 중반의 영남위원회 사건 당시에도 법원의 감청 허가 명령 한도를 벗어난 대상에 대한 녹음이나 녹취록은 사실로 인정된다 할지라도 모두 재판 증거에서 배척됐다. 법원 명령에 따른 증거 수집 범위와 여기에 구속된 수사기법에서 파악된 증거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입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일부 세력들이 공안 당국으로부터 피의자를 보호하고 정치적 명분을 얻기 위해 조작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간첩활동까지 보호해주는 장막이 돼서는 곤란할 것이다.


이번 간첩단 사건에서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관련자들이 왜 아직도 북한에 대한 미망을 버리지 못하고 김정일에게 자기 생을 바치겠다고 마음 먹었냐는 점이다. 왕재산의 총책은 대한민국에서 자라 명문대를 다니고 기업 대표까지 맡고 있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길러 대학에 보낼 나이다.


그는 삶 곳곳에서 대한민국 고도성장의 결실을 만끽했다. 그러나 그에게 정작 이런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남북의 1인당 GNI가 17배 차이가 나고 전 세계 민주주의 순위에서는 100등 이상 차이가 나며 유엔에서는 매년 북한인권결의안이 채택될 정도로 북은 인권 말살지역이란 점도 고려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런 질문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타락한 자본주의 삶을 살 것이냐 고상한 사회주의 삶을 살 것이냐, 사람을 주인으로 만드는 주체사상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효율의 대상으로 보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묻힐 것인가, 불요불굴의 혁명전사냐 평범한 소시민이냐, 위대한 영도자이냐 독선적인 대통령이냐를 두고 자신은 당당하게 전자를 선택하기로 했다고 자위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1980년대 초반부터 섬기기 시작한 주군(主君)을 절대 배반하지 않겠다는, 아니면 이 길을 떠나서는 달리 할 일도 없기 때문에 나중에 남조선 혁명을 이루고 개국공신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왕재산은 2000년대 들어서도 갈수록 조직을 확대하면서 야당 정치인들까지 포섭대상으로 삼을 정도로 왕성하게 활동했다는 것이다. 10여 년을 넘게 활동한 핵심 조직원뿐만 아니라 여기에 동조할만한 우호 자원들이 곳곳에 널려있었다는 점이다.


2006년 적발된 일심회 사건에는 제도권 정당으로 진입한 민주노동당의 사무부국장이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이번 왕재산은 야당 당직자와 총선 출마 후보자, 대학교수 등이 망라돼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 사회에는 지하당이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이 충분히 조성돼 있다는 점이다. 종북주의 정당이 내년 대선을 겨냥해 야권연대의 핵심고리로 활동하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북인사들을 북한에 대해 더 호의적이고 동정적이며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들로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핵심적인 활동가들 중 상당수는 지하당에는 가입하지는 않았겠지만 단순한 이념적 친북을 넘어 남한 보수정권을 타도하고 북한 주도의 통일을 실현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일종의 혁명주의적 친북노선이다.


여기에 다양한 형태의 친북들이 결합한다. 북한이나 북핵에 대한 막연한 호감에서부터 반미투쟁의 공동전선, 과거 통일운동이나 현재의 햇볕정책의 오류가 밝혀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까지 섞여서 다양한 층과 형태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 우리 사회의 친북에 대한 관대함까지 어우러져 지하당의 싹이 틔울 수 있는 좋은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하당이 여태 건재한 것은 총책 J씨를 비롯해 핵심 조직원들이 북한에 대한 어떤 공격도 견딜 수 있는 강한 사상적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들에게 북한의 수령독재, 주민의 생존권과 인권의 원죄는 북한이 아닌 미국에 있다. 미국의 적대 정책에 맞서 갖은 희생을 감수해왔기 때문에 현재의 북한은 정상적일 수 없고, 문제점 또한 김정일의 책임이 아니다.


누군가가 ‘미국에 맞서기 위해서 자국민을 죽이고 고문한다면 결국 북한이 추구하는 사회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다시 반미 자주국가를 들고 나올 것이다. 결국 동어 반복에 북한의 체제유지 논리를 반복하는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상적, 논리적 오류가 반복되는 것이 왕재산 같은 지하당과 혁명주의적 친북세력의 현실이다.


우리 사회의 광범위한 친북 벨트와 함께 북한의 지령을 받아 지하당을 구축하려는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이러한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북한의 개혁개방을 위한 과감한 대북정책, 올바른 통일교육, 합리적인 대북인식을 갖춘 시민사회 단체의 영향력 확대 등을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기존 친북세력에 대한 사상적 전향 요구가 현실적인가는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친북이든 종북이든 지하당이든 북한 정권의 유지에 기반한다. 결국 북한 정권이 개혁개방이 되고 민주화가 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북한 정권이라는 몸통을 해체하기 위한 민주화 투쟁이 김정일이라는 늪에 빠진 슬픈 영혼들을 구하는 가장 합리적이고 빠른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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