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영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원상복구를 고려할 것이라고 밝힌 가운데 미국은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며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26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지 않음으로써 10·3 합의를 위반했고 그 대응조치로 영변 핵시설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원상복구도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미 국무부는 27일(현지시간) “미국은 북한을 포함해 모든 당사국들과 대화를 계속하고 있으며 이러한 형태의 이슈가 부각된 것은 처음도 아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로버트 우드 국무부 부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미국은 북한이 가능한 한 빨리 핵 검증 방안을 제시하도록 장려하고 있다”면서 “이러한 과정에는 기복이 있기 때문에 당장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우리로서는 지나치게 흥분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선(先) 검증체계 구축 후(後) 테러지원국 해제’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 미국은 북한의 핵시설 불능화 조치 중단의 동기를 파악하기 위해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북한과의 대화 지속 의지를 밝히고 있다. 자칫 강경 대응으로 인해 협상이 단절될 경우 북핵 진전에 따른 임기 말 외교적 성과의 기대는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우려에 기인한 것으로도 풀이된다.
이에 따라 미국은 6자회담 관련국들과 북한의 의도에 대해 긴밀히 논의하면서 대책 마련에 고심하는 모습이다. 미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도 조만간 동북아시아 지역을 방문할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일본, 러시아, 한국 등 나머지 4개국 역시 북한의 성명에 대한 강한 유감을 밝히면서도 6자 틀 내에서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각각 사태 해결 방향에 있어서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은 6자 틀 내에서의 대화를 통한 해결을 강조하고 있다. 친강 외교부 대변인은 26일 “6자회담은 순풍에 돛을 단 듯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며 “참가국들은 상호존중의 정신과 상호신뢰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6자회담 참가국들은 약속사항을 명심하고 6자회담의 끊임없는 발전을 위해 공동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덧붙였다. ‘공동행동’은 해석에 따라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와 관련국들의 경제·에너지 지원 약속 이행을 촉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러시아도 27일 외무부 성명을 통해 “북한의 불능화 조치 중단에 실망과 우려를 전한다”면서도 “북한은 10월 말까지 불능화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고, 관련국들은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북한과 이전에 합의한 내용들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러시아는 “북한의 점진적 비핵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참가국들의 건설적인 정치·경제적 조치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일본은 북한을 비난하는 한편으로 일본인 납치문제 재조사 등 북한과의 합의 이행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이 전해진 26일 저녁 출입 기자단에게 “핵 포기를 위한 검증을 확실히 해주길 바란다. 미국 등과도 협의해 나가겠다”면서“(납치문제)재조사에 영향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재조사의 개시를 향해) 착실히 추진해가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는 일단 유감을 표명하면서 더 이상의 상황악화를 막기 위해 주력하는 모습이다. 이를 위해 경제·에너지 지원 실무그룹 의장국으로서 대북 경제·에너지 지원을 예정대로 계속할 방침이라고 27일 밝혔다.
북한은 여전히 ‘미국책임론’을 펴면서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조치를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조선신보는 27일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지연에 따른 결과라며 ‘미국 책임론’을 폈다.
그러면서 이 신문은 검증 문제로 북미 대립이 격화되면 “6자 구도가 마련한 비핵화의 시계 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며 “핵시설의 원상복구 조치를 고려하게 될 것이라는 (북한 외무성 대변인) 성명의 구절은 헛소리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매체는 ‘무장해제 기도에 대한 단호한 결단’이라는 제목의 평양발 기사에서 “부시 정권의 말기나 다음 정권시기에 긴장이 고조된다면, 조선이 미국의 위협에 대처해 핵시험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 됐던 그 때의 상황이 다시 조성되지 않으리라는 보증은 없다”며 “현상 타개를 위해서는 미국이 과감한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지금까지 영변 5MW원자로에 대한 불능화 조치 11개 가운데 8개를 완료했고, 폐연료봉 인출, 미사용연료봉 처리, 원자로 제어봉 구동장치 제거 등 3개 조치가 남아 있는 상태다. 페연료봉 인출도 55~60% 진행됐으며, 11개 불능화 조치와 별개로 영변 핵시설의 냉각탑도 폭파해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