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승기, 도상록 등 월북과학자가 주도

북한의 핵개발은 해방 후와 한국전쟁 기간에 월북한 과학자(핵과학자 1세대)들의 주도속에 소련 유학파 출신의 2세대 과학자들이 합세해 이룩한 ‘공동 작품’으로 보인다.

24일자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과 합참 자료 등에 따르면 북한의 핵 연구는 ‘핵 개발의 태두’인 도상록(1903~1990)과 리승기(李升基.1905-), 한인석 등이 앞에서 끌고 정근과 최학근, 서상국 등 소련 유학파들인 2세대가 뒤에서 미는 등 ‘파키스탄의 핵 아버지’인 압둘 카디르 칸 박사처럼 한 사람이 핵개발을 시종 주도하지 않고 1,2 세대간 합작으로 개발에 성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교토대에서 유학한 양자(量子)분야 전문가 도상록은 원자핵이나 소립자에 관한 물질의 심층구조 탐구용 물리실험에 사용되는 입자가속기를 만들었고 북한 최초의 핵반응 실험도 했다.

2000년 통일부 보고서는 서울대 교수 재직중 1946년 5월 월북, 김일성종합대 물리학과 주임을 맡은 그를 ‘북한의 핵과학아버지’에 가장 근접한 인물로 묘사했다.

이재성 연구원도 다른 보고서에서 도상록이 1990년 사망 전까지 핵개발에서 제1의 과학자로 평가받았다고 밝혔다. ‘북한을 움직이는 테크노크라트'(이재승 지음.일빛刊)는 김일성이 도상록을 공개 칭찬하면서 김일성종합대 물리학부의 종신 주임으로 임명했다고 밝혔다.

도상록은 1961년 9월 노동당 4차대회에서 핵연구에 역점을 둬야하며 원자에너지 분야 전문가팀을 조직해야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그는 1973년과 1986년 최고 훈장인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전남 담양 출신인 리승기는 1939년 교토제국대에서 응용화학으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고 서울대 공과대학장으로 재직중 6.25 때 월북했다.

1940년대 초반 석탄으로부터 합성섬유 1호를 개발한 그는 1961년 비날론 생산을 주도했고 영변원자력연구소장(1967)과 과학원 함흥분원장(1987)을 지내는 등 북한 과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핵개발 참여를 꺼린 그는 “핵개발은 민족통일의 중요한 과제”라는 김일성의 설득으로 핵개발에 참여했다.

합동참모본부가 2003년 발행한 ‘합참’지에 따르면 그는 북한이 보유했다고 주장하는 내폭형(Implosion Type) 플루토늄 핵무기 개발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이런 공로로 김일성 훈장을 두 차례 받았다.

또 경성대(물리학)와 연세대 교수로 재직중 월북해 초대 영변 원자력연구소장을 지낸 한인석과 경원하 전 춘천농과대 교수도 내폭형 플루토늄탄 개발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으로 합참 자료는 전했다.

독일 유학파인 한인석은 김일성종합대학 교사 재직중 소련에서 첨단 물리학을 배우고 돌아와 1960년대 대량의 핵물리학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북핵 개발과 관련해 또 주목할 인물은 소련 유학파 출신의 물리학자인 최학근 전 원자력공업부장. 북한은 1956년 3월 소련과 ‘핵에너지 평화 이용 협력협정’ 후 과학자와 기술자를 소련에 파견해 핵기술을 배워왔다.

모스크바 북쪽 120㎞ 지점인 두브나의 ‘연합 핵연구소’에서 유학한 과학.기술자들이 오늘날 북한의 핵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이다.

두브나 연구소의 알렉시 시사키안 국장은 약100명의 북한 과학자가 이 연구소를 다녀갔으며 지금도 해마다 5-8명이 연구소에 머물고 있으며 86년 원자력공업부장으로 승진한 최학근이 대표적인 인물.

최학근은 북한의 IAEA 가입 후인 1975년부터 ‘IAEA 파견관’ 자격으로 두 차례 총회에 참석하면서 도서관에서 각국의 원자반응로 설계도 등과 관련된 자료를 복사해 북으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IAEA 대변인은 “도서관에 비치된 과학 및 기술문건들은 그리 민감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서울대 물리학과 출신인 정근은 핵무기와 직접 연관이 있는 핵반응로 물리학을 연구했다. 10.9 핵실험 주도자로 알려진 서상국(68) 김일성종합대 물리학부 강좌장은 1966년 소련 유학 후 돌아와 김일성대 교수로 재직해왔다.

한편 IHT는 원자력공업부 남천화학연합기업소 산하 핵폐기물 처리회사 부사장 재직중 94년 한국에 망명한 김대호(47)씨가 펴낸 핵개발의 이면을 담은 자전 소설 ‘영변 약산에는 진달래 꽃이 피지 않는다’와 수년간 북한의 핵개발을 관찰해 온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북한이 자체 기술이 아닌 해외 기술에 의존해 핵을 개발한 것으로 분석했다.

2005년 5월 워싱턴 소재 미국 우드로 윌슨 국제센터가 러시아와 헝가리 외교 문서등을 인용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은 1960년대부터 미국의 핵공격에 대비한 방어전력 강화를 명분으로 공산권 동맹국들에게 원자력 기술이나 핵무기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태우 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도 러시아 문서들을 인용, 김일성이 한국전쟁 직후 모스크바에 핵탄두 미사일 제공을 요청했으나 소련이 이를 거절했다고 밝혔다./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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