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486 세대’…메드베데프의 도전과 과제

한국에는 386이라는 용어가 있다. 30대이면서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녔다는 뜻이다.

90년대 말 등장한 이 신조어는 80년대 학생운동 속에서 이른바 이름을 날렸던 사람들이 대거 정치에 진출하는 과정에서 도드라졌다. 그들은 386이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의 세대적 정체성을 조직하고 부각시키려 했다. 한국사에서 80년대가 위대하였던만큼 386이라는 이름의 값어치도 비쌌다.

그런데 386은 2000년대 중반 이후 486이라는 표현으로 바뀌어 그들의 가치를 이어가고 있다. 486은 2008년 다가오는 총선을 행해 다시 뛰고 있다. 한국사에서 가히 절대적 지위를 획득한 80년대의 위대성은 그렇게 386에서 486으로 그리고 미래에는 586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그들의 역사적 상징성과 값어치를 지속하려 할지 모르겠다.

러시아에도 486의 바람이 몰아닥치고 있다. 그 기수는 이번에 대통령에 당선된 메드베데프이다. 메드베데프는 올해 나이 42살이다. 구소련 시기까지 포함해서 가장 젊은 대통령이 된 것이다. 러시아의 486은 한국에서의 그것과 닮았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 대학을 다니며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라는 사회주의 개혁과 시장 경제의 출현 그리고 민주주의의 태동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1991년 공산주의 소련의 해체 속에서 절정의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오늘날 러시아 정치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대통령 당선자 메드베데프를 필두로 알렉세이 쿠드린(Kudrin·48) 부총리 겸 재무장관, 엘비라 나비울리나(Nabiullina·45·여) 경제개발통상 장관, 드미트리 코작(Kozak·49) 지역개발 장관 그리고 안톤 이바노프(Ivanov·42) 최고중재재판소장, 니콜라이 빈니첸코(Vinnichenko·42) 법무부 연방분쟁조정관 등이 모두 486이다.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푸틴의 출세 가도에 줄곧 붙어 다녔다. 푸틴이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보좌관이던 시절 13년 후배인 메드베데프와 인연을 맺은 이후 푸틴이 총리가 되자 메드베데프는 내각 실장을 수임했으며 푸틴이 대통령이 되어서는 크렘린 행정실장으로 그를 보좌했다.

메드베데프는 푸틴의 재선 당시 캠프 본부장으로 푸틴을 다시 한 번 당선시킨 후 러시아 재정의 엄청난 자금줄인 국영천연가스업체 가즈포름의 회장으로 고공낙하하였으며 2005년에는 제1부총리에 등극하였고 푸틴이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처지가 되자 곧바로 그의 뒤를 잇는 쾌속행진을 계속하였다. 푸틴의 존재가 그의 존재를 만든 것이나 다름없는 대목이다.

메드베데프, 구소련 포함 가장 젊은 대통령

러시아는 푸틴의 열풍이 가시지 않고 있다. 한국의 대통령이 5년 임기를 마칠 즈음이면 부끄러운 지지율로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곤 하는 것과는 판이한 현상이다. 고르바초프보다 더 급진적인 개혁으로 러시아 공화국을 쟁취해 낸 보리스 엘친에 이어 대통령이 된 푸틴은 2번 연임을 마칠 즈음에도 그 인기가 오히려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황이다. 알몸을 드러내 보이며 50대의 나이에도 근육질의 건강미를 뽐내기도 하였던 푸틴은 이미 압도적 여당의 당수로서 다음 총리를 예약해 놓고 있다. 대통령에서는 물러나지만 정치를 떠나지 않으며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푸틴의 충성된 수하로서 푸틴의 승승장구에 따라 자신의 출세가도가 펼쳐졌던 메드베데프를 두고 푸틴의 ‘꼭두각시’라고 야유하는 것은 이 같은 정황과 맞물려 있다. 푸틴으로 인해 자신의 출세가 이뤄졌던 이력과 푸틴의 가실 줄 모르는 국민적 인기 그리고 그에 편승해 이빨을 표나게 드러내 놓고 있는 푸틴의 권력욕 때문이다.

푸틴은 냉전의 붕괴 속에서 무기력해져 가던 러시아를 다시 살려냈다. 러시아의 넘쳐나는 부존자원을 이용해 세계의 부를 긁어모았으며, 미국과도 대립하며 자존심을 세웠다. 독립을 요구하는 체첸 반군을 탱크로 밀어붙이며 주목을 받고 일약 명성을 얻어 순식간에 대통령에까지 등극했던 푸틴은 체첸 테러리스트들의 연이은 인질테러도 가차 없이 진압하였다. 그런 그에게 러시아는 열광하였다. 이제 화두는 무기력한 러시아에서 ‘강한 러시아’로 탈바꿈하였으며 그 중심에 국민의 영웅 푸틴이 있었다.

냉전의 붕괴 후 러시아에 도래한 ‘시장’과 ‘민주주의’는 함께 몰아닥친 ‘모라토리움’이라는 국가 파산으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에게 희망보다 절망을 던지고 말았다. 러시아 국민들은 냉전 시대의 강한 소련에 향수를 가졌으며 푸틴의 통치가 그것을 채워주기 시작하였다. 푸틴은 러시아의 경제도 살렸으며 자존심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방편은 불안한 것이었다. 이라크, 이란의 중동 정책과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 연방 국가들과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 그리고 미국의 MD(미사일 방어) 체제 문제와 최근의 코소보 사태에 이르기까지 미국 및 서방과 끊임없이 충돌하였으며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냉전의 붕괴는 세계의 안정성을 높여주고 더욱 평화로운 세계를 가져다 줄 것으로 사람들은 기대하였다. 냉전에서 이탈한 약소국들의 통제 불능과,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이 미국 및 서방과의 대립 수위를 높이는 데 신경이 쏠림으로써 세계는 다시 그 불안정성과 불안감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세계는 냉전 붕괴의 안락함을 기억에서 지워버리며 오히려 ‘신냉전’의 도래에 심각한 걱정과 우려를 갖게 되었다. 갈등의 키를 쥐고 있는 러시아는 여전히 세계 최강의 핵 기술 및 핵무기 보유 국가이다.

외부의 불안한 시선은 러시아 국내 분위기에도 맞추어 졌다. 러시아의 오늘은 전체주의의 강한 유혹에 빠져 있는 듯하다. 푸틴은 국가 발전을 위해 국민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러시아식 주권민주주의’를 주창한다. 푸틴의 추종자들은 ‘강한 러시아’의 구호와 푸틴에 대한 절대적 충성, ‘러시아 민족주의’로 무장해 과거 신나치의 행동과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 같은 분위기의 권위적 러시아는 대외 정책에도 녹아들었다. 그루지야의 장미혁명과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을 비롯해 옛 소련 연방 국가들의 정치 민주화 과정에서도 사사건건 서방 선진국과 부딪히며 자신의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 했고 그것은 해당 국가의 권주의주의 정부와 세력에 대한 옹호로 나타났다.

메드베데프는, 시장의 자발성보다 국영기업을 확대하고 국영기업을 중심으로 경제발전을 꾀하고자 하였던 푸틴의 국가주의적 경제정책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부패와의 전쟁을 비롯해 공무원의 감축 등 과감한 공공개혁을 선창하고 국가 기능의 상당부문을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입법·행정·사법부의 분명한 3권 분립, 미국 및 유럽과의 관계개선 등의 공약도 민주주의에의 요구와 변화된 러시아 대외정책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렇듯 그동안의 푸틴 정책과 차별적인 부분들을 메드베데프는 내뱉고는 있다. 그는 푸틴의 계승자임을 공언하면서도 러시아 헌법에 명시된 대통령의 권한에 대해 분명히 하고 있다. 총리 푸틴이 러시아의 대외정책까지 간여할 수는 없다는 점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세계인들은 과연 메드베데프가 푸틴과 다른 길을 갈 수 있을까 주목하고 있다. 더구나 푸틴이 총리로서 권력의 심장부에 틀어 앉아 있는 이상 그것은 더욱 의구심을 자아낸다. 오히려 그는 언제 갈릴지 모르는 위태로운 푸틴의 하수인이거나 가장 좋아봐야 ‘얼굴 마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대체적인 분석이다.

사람들은 러시아가 시장과 더욱 조화를 이루고 민주주의를 향해 꾸준히 전진해 가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미국 및 서방과의 협력을 주문한다. 핵 강국이면서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는 러시아가 국가주의, 전체주의의 후진적 경향에 경도되며 ‘신냉전’의 중심에 서는 것을 원치 않고 있다. 이 같은 변화에의 기대가 새로운 대통령의 탄생에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젊은 푸틴의 덕에 훨씬 젊은 40대의 대통령이 거대한 나라 러시아를 이끌게 되었다. 그들은 시장과 민주주의라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러시아 역사상 가장 거대한 변화와 격동의 시간에 한국의 486처럼 더운 심장의 20대를 살았다. 20년이 지난 후 그들은 러시아 정치의 전면에 서 있다. 러시아의 명실상부한 통치집단이 된 것이다. 그런 그들이 자칫 새로운 권위주의로 나아갈 위험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러시아에 진정 신선한 변화의 물결을 몰고 올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그들이 그저 푸틴의 귀여운 ‘인형’으로 안주할지 혹은 강력한 개혁으로 ‘무서운’ 푸틴을 극복할지 러시아의 486은 일찌감치 거대한 실험과 도전의 정점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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