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보기 [러시아 벌목공의 인생역전 1부] 10여 년 만에 살아돌아온 반역자 남편

벌목장에서 쫓겨오다


벌목공들은 국가가 주는 보잘 것 없는 월급에만 매달리지 않고 자체로 돈을 더 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들에게는 주말이면 울타리를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차츰 러시아인들과도 사귀게 되었고 그들과 결탁해서 일거리를 찾아냈다. 노동자들은 주말이면 부지런히 러시아인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집 건설, 혹은 건물 보수 같은 일을 해주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한 달에 네 번, 주말에 나가서 버는 돈이 벌목해서 번 돈보다 더 쏠쏠했다. 그렇게 모두 외부 돈벌기에 맛을 들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이 간부들과 보위원들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간부들은 주말에 쉬지 않으니 일의 능률이 나지 않는다며 사상투쟁회의까지 소집했고, 개인주의를 한다고 꼬집어대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주말에 밖에 나가서 버는 돈에서 얼마씩 떼 간부들과 보위원들의 주머니에 찔러줬다.

이 씨는 이렇게 버는 돈의 액수가 불어날 때마다 너부죽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랑하는 가족을 떠올렸다. 늘 성분타령을 하며 아프게 했던 아버지, 지극정성으로 마음을 달래주던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아들. 이제 돌아가면 성분이라는 상처를 묻어버리고 좀 편한 직업을 찾아 풍족한 살림으로 화목하게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이렇게 해가 두 번 바뀌고 어느덧 러시아에서의 체류 일정이 끝나가고 있었다. 집에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집에 돌아 갈 날을 생각하니 힘이 솟았다. 두 달 남짓한 기간을 남기고 이 씨는 일감을 찾아 나섰다. 조금이라도 더 벌고 싶었다. 먼저 떠나간 동료들의 말에 의하면 귀국할 때 국경에서 검열관들에게 돈을 찔러줘야 물건과 돈을 무사히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고임 돈이 만만치 않다고 했다.

그날 낮, 이 씨는 러시아인의 집에서 집수리를 하고 있었다. 일을 한창하고 있는데 러시아 경찰과 보위원들이 함께 들이닥쳤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수갑을 차고 러시아 구류장에 끌려갔다. 이후에 안 일이지만 밖에서 벌어오는 돈이 월급보다 더 많다는 것을 눈치 챈 간부들과 보위원들이 시범적으로 몇 명을 표적으로 삼았고, 그 안에 이 씨가 걸려든 것이었다. 그들은 이때까지 규정을 따지지 않다가 갑자기 규정을 따지며 걸고 들었다. 쉬는 날에 쉬지 않고 돈벌이를 하는 것은 혁명과업수행에 대한 태만이라고 걸고 들었고 개인주의는 집단주의에 대립되는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끓어댔다.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며칠 앞두고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결국 이 씨는 작업복을 입은 채로 돈 한 푼 없이 고향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돈으로라도 운명을 바꿔보자고 몸부림 치던 이 씨의 러시아벌목은 슬프게 막을 내렸다.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니 시내에는 벌써 소문이 짜하게 퍼져있었다. 선박공장의 이 씨가 러시아 벌목에서 죄를 짓고 추방되었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지나가면 어디서나 수군거리고 뒤소리가 심했다. 이 씨의 부모들은 동네사람들 보기 부끄럽다고 밖에 얼굴을 들고 나다니지 못했다. 손가락질 받기는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만이 아빠가 왔다고 좋아했다.

눈에 아른거리는 러시아 산속의 작은 금고


3년을 일한 품삯을 한 푼도 못 챙겨온 이 씨의 머릿속에서는 돈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비록 한 푼도 챙겨오지 못했지만 그 돈은 러시아의 어느 골짜기에 묻혀 있었다. 돈을 벌어 탈의실에 두었다면 이미 간부들의 손에 넘어갔겠지만 돈은 거기에 있지 않았다. 러시아의 어느 깊은 산속,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땅 속에 깊숙이 숨겨져 있었다.

벌목공들은 돈을 탈의함 같은 곳에 두지 않는다. 처음에는 탈의실 안에 건사했지만 그것은 남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간에 상관없이 불시에 습격하기를 좋아하는 보위원들이 건더기를 잡는 가장 좋은 기회가 탈의함을 수색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일하러 나간 틈에 탈의함 습격을 곧잘 했다. 수색이 지나가면 있던 돈이 사라지고 노동자들 사이에 불신임이 조성되었다. 돈이 없어졌다고 보위원들에게 소란을 떨어봐야 오히려 그들의 눈 밖에 나고 국가에 불만이 많은 사람으로 평정서에 쓰여져 죽을 때까지 자신을 따라다닐 게 뻔했다. 간부들이 나서 노동자들이 돈을 건사하는 규정을 만들기는 했지만 국가를 믿을 수 없는 노동자들은 자기들 식으로 건사하기 시작했다.

동전 이미지.

벌목공들은 사기 단지를 사서 자기만 알 수 있는 산 속 장소에 묻었다. 이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매번 번 돈을 차곡차곡 넣어두었다. 벌목공들은 돈을 넣는 항아리를 작은 금고라고 자랑스럽게 불렀다. 머나먼 타향에 두고 온 작은 항아리 금고는 그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었고, 어제도 오늘도 그를 괴롭게 했다.  그 돈 항아리를 그대로 버릴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개척지 같은 땅에 묻었다고 안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사정이 달라졌다. 항아리는 그가 일하던 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묻었는데 2,3년 후에는 그 산도 개발이 된다는 소문이 들렸다. 혹시 빠르면 내년에라도 시작될 지 모를 일이었다. 숨겨놓은 항아리가 밖으로 튕겨 나오는 환영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런 속앓이를 하던 중 어느덧 1년이 지났다.

다시 러시아로, 그리고 반역자로


이 씨는 4년 전 러시아로 갈 때 자기를 도와주었던 도 외사부장을 다시 찾아갔다. 외사부장은 노발대발 했다. 추천한 사람이 말썽을 일으키고 쫓겨 왔으니 추천해 준 간부들이 말밥에 오르기 마련이었다. 뭐 하나만 잘못되도 연대적인 책임이 뒤 따른다. 그는 꾹 참고 자기가 러시아에 묻어놓은 돈 항아리에 대한 말부터 꺼냈다. 거기에 상당한 액수의 돈이 들어있으며 이제 자기를 다시 러시아에 추천해주면 돌아와서 그 항아리에 있는 돈의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제 다시 러시아에 가면 반드시 개인주의, 이기주의를 버리겠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돌아올 테니 꼭 부탁드립니다. 돌아와서 숨겨둔 돈의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

돈이라는 말이 외사부장의 귀에 제꺽 걸렸다. 돈의 절반을 주겠다는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응대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몇 달을 더 쫓아다니며 떼를 썼다. 결국 외사부장은 항복하고 말았다. 외사부장은 한번 쫓겨 온 사람에 대한 문제는 심각하다고 하면서 혼자 할 결심이 아니니 연결된 모든 간부들에게 얼마 정도의 돈을 줘야 한다고 했다. 이 씨는 외사부장 뿐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돈을 주겠다는 합의를 해줬다. 힘들게 다시 문건이 꾸며졌고 끝내 다시 러시아로 가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 씨는 1995년 두번째로 러시아 벌목 길에 올랐다.

김 여인은 다시 러시아로 떠나간 남편이 이번에는 탈 없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 동네에 같이 러시아로 떠난 사람이 있었는데 몇 달이 지나자 편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잘 도착했다, 잘 하고 있으니 걱정 말라, 돌아올 때까지 부모님을 잘 모셔달라’고 하는 구구절절한 편지들이었다. 하지만 이 씨에게서는 소식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며 김 여인은 가슴을 내리 쓸었다. 시부모님들도 기다리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별일이 없으니 소식이 없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인의 남동생이 뛰어 들어왔다. 얼굴에 심각한 눈빛을 담고 있었다. “누나, 매부가 러시아 벌목장에서 도망쳤대. 반역자라고 아주 난리가 났어.” “엉? 그게 무슨…….” 여인은 숨이 꺽 막혀서 말꼬리를 번지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고 말았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도대체, 도대체 당신이 왜…. 돌아올 때는 아무 일도 없이 척 나타나 주겠다던 당신이…….” 떠날 때 남편의 그 우스갯소리가 가을낙엽처럼 바람에 훨 날아가 버렸다. 이렇게 남편은 나라의 반역자로 낙인되었다.

다시 돌아온 조국에서 


비행기에서 내린 이 씨는 안내자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서서 조국을 감상했다. 분명 하늘은 맑은데 세상은 우울감을 주는 회색 빛깔을 띄고 있어 마치 빛바랜 세상 같았다. 곧 안내자가 이끄는 대로 차에 올라탔지만 차창에 비껴 든 평양의 빛은 달릴수록 더 어두워보였다. 13년 전에 본 평양보다 더 낡아있었다. 창광거리, 광복거리들이 낡은 감투를 뒤집어 쓴 듯 세월에 바래져 있었다. 사회주의 조선을 벗어나 자본주의 캐나다에서 10여 년을 살아온 이 씨의 감회는 남달랐다. 캐나다와 북한의 격차는 그저 한숨을 쉬게 할 뿐이었다. 이 씨의 생각을 알아본 듯 안내자는 검은 안경알 속에서 눈빛을 허둥거리는 것 같더니 마침내 물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평양이 많이 변모되었죠? 이번에도 중국에 다녀오신 우리 장군님께서 평양을 좀 더 환하게 꾸릴 데 대해 말씀이 계셨고 중대건설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네 어쩐지 많이 변모된 것 같아서 자꾸 두리번거리게 됩니다.” 이 씨는 가식적인 이 나라의 의지에 맞게 한술 더 떴다. 안내자는 분명 보위부요원일 것이고 외국 사람들을 맞을 때 하는 정해진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

이 씨는 먼저 고향으로 가서 부모님의 영전에 불효한 죄를 빌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 관계자들은 절대 안 된다고 만류했다. 나라를 배신한 반역자가 다른 나라에 정착해서 부자가 돼 고향에 버젓이 나타난다면 혁명하는 나라 사람들에게 주는 정치적 상처가 클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조국의 모든 사람들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며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이 나라를 버리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나라를 배신한 반역자가 애국자로 둔갑해서 나타났다, 저렇게 달아나서 돈을 벌고 고향에 척 나타나는 것이 나쁜 것만 아니구나, 우리도 굶어죽지 말고 저런 식으로 나가는 게 어떤가 하는 생각으로 개방적인 씨앗이 곳곳에서 자라면 이 나라가 무엇이 되겠는가’라고 요란스럽게 말했다.

결국 아내와 아들이 평양으로 올라와 만나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부모님께 술 한 잔 올리고 마을에서 함께 자란 고향 동년배들의 얼굴도 보고 싶었는데… 물론 그들과 말 한마디라도 섞을까봐 보위부가 따라다니겠지만 말없는 소통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가 조국에서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승인받은 것은 겨우 3일이었다. 이 씨는 첫날에는 일군들과 함께 한창 터를 닦고 있는 의료기구공장을 돌아보며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느라 바쁘게 다녔다. 다음날은 만경대, 주체사상탑을 비롯한 여러 사적지 참관들로 바쁜 일정을 보냈다. 그의 뒤에는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따라다니던 검은 안경의 사나이가 항상 따라붙어 있었다.

이제 남은 일정은 그토록 기다리는 가족을 만나는 것이었다. 호텔로 돌아오기 전 정부관계자는 내일 가족을 만나기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아있다고 했다.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검은 안경이 들어섰다. “이 선생님, 내일 가족을 만나기 전에 꼭 지켜야 할 사항이 있소.” 이 씨는 어리둥절해서 그 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족을 만나는데 무슨 사항이 필요한가하고 생각했다. 이 씨는 깜빡했다. 10여 년간 캐나다에서 살다보니 북한이란 암울하기 그지없는 세계를 잠시 잊어버렸던 듯 싶었다. 그는 잠깐 실수했다는 것을 느끼고 검은 안경의 비위를 맞추느라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짓고 바쁘게 중얼거렸다.

“아 그렇죠. 사항, 지켜야죠.” 그자는 뱁새 같은 얼굴에 묘한 웃음을 띠고 닥치듯이 말했다. “가족들과 아무 말이나 막 하면 안 돼요. 잊지는 않았겠죠. 여기가 캐나다가 아니라는 걸요. 당신이 아무리 캐나다 국적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가족들에게 자본주의 자유사상을 심어주거나 하면 우리 법에 걸려요. 처신을 바로하길 바라오.” 그 자는 “캐나다 국적을 가진 자”라는 말을 할 때 입귀를 사납게 씰룩거렸다. 이 씨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듣기만 했다. 가슴 안에서는 울컥거림이 터져나가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 씨는 울체되어 있는 목소리로 삼키듯이 대답했다. 한참을 진정이 되지 않았다. 가족이 아니라면 영원히 발을 딛지 말았어야 할 곳이었다. 후회도 밀려왔다. 가족을 만나려고 10여 년간 피땀으로 번 돈을 국가에 바치고 수모까지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가 막히고 억울한 일이었다. 그는 주먹이 스스로 불끈 쥐어지는 것을 느끼며 두 번째 날의 밤을 보내려고 호텔로 돌아왔다. 그는 호텔 안을 잠시 돌아보았다. 내일 아내와 아들과 만날 때 무슨 말이라도 잘못 터져나가면 어떡하나 하고 궁리하며 분명 어딘가에서 숨어서 돌아갈 도청기가 걱정되었다. 방안의 모든 곳을 눈으로 훑어보기만 했다. 일어서서 어딘가를 살펴보고 만져본다는 것도 그자들에게 이상한 신호를 주는 것 같아 눈길을 방바닥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꿈에 그리던 가족과의 만남  


이 씨는 평양에 온 날부터 편하게 밤잠을 자지 못했다. 어제 밤은 더 설친 것 같았다. 밤새 머릿속에는 아내와 아들의 그림자가 무수하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락가락했다. 그림자 속에서 아내는 퍽 늙어 보이고 아들의 얼굴은 어두웠다. 하얀 천정 위에서는 늙은 아버지와 어머니까지 너울거리며 돌아다니는 것 같기도 했다. 끝내 부모님의 묘소에 가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이 씨는 가슴이 저며지는 것 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부모님의 영전에 부어 드리려고 고급주 2병을 들고 왔지만 끝내 부어드리지 못하고 간다는 게 두 번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자꾸 마음을 쓸어 만지기만 했다.

평양행 1열차는 아침에 들어섰던 것 같았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부리나케 한 사람이 뛰어들더니 가족이 호텔 앞까지 거의 도착했으니 빨리 옷을 입고 나가자고 했다. 이 씨는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내에게 어떤 말을 해야 가장 값진 말이 되나? 아니면 아내가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할까? 아들에게 무엇을 말해야 하나? 아들이 이 못난 아비를 아버지라고 불러줄까? 혹시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하는 근심이 일순간에 머릿속에 차올랐다. “이 쪽으로 오고 있어요.” 아침 일찍 나온 정부 관계자가 말했다. 아내인 것 같은 여인이, 그리고 아들인 것 같은 청년이 어깨에 가방 짐을 지고 호텔 앞마당에 들어섰다. 그 뒤에 검은 안경이 따라붙어있었다. 검은 안경이 어제처럼 지켜야 할 사항을 아내와 아들에게 미리 알려주려고 나간 것 같았다. 아내의 작은 어깨가 지난밤에 그려 본 그림보다 더 구부러져 있었다. 아들인 것 같은 청년은 어께가 쩍 벌어지고 어릴 때의 눈매가 그대로 살아있었다.

아내와 아들이구나. 뛰어나올 때부터 촉촉해졌던 눈언저리가 젖어들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 고르고 골랐던 말들은 다 사라지고 그냥 두 사람의 어깨만 꽉 껴안았다.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셋이 모두 끌어안고 흐느끼며 울었다. 이렇게 평양의 작은 호텔에서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다시 헤어져야 하는 그들의 슬픈 만남은 눈물 바다로 시작됐다.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한 가족이 모여 앉았다. 눈물어린 상봉으로는 아직도 시원하지 않은 듯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아내는 너무 억이 막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씨는 아내의 자그마하고 좁아진 어깨를 꼭 껴안고 달래기 시작했다. “여보, 미안하오. 정말로 미안하오. 앞으로도 당신에게 얼마만큼 더 미안해야 할지 알 수 없구려.” 목소리가 약해졌다.

기약없는 헤어짐 , 그러나 바뀐 운명


내일 아침이면 그들은 다시 헤어져야 했다. 이 씨도, 아내도, 아들도 서로 하고 싶은 말들이 오죽 많으랴. 그들은 가슴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 중에 어떤 이야기부터 골라 해야 가장 값진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하지만 호텔 안에서 정신없이 돌고 있을 도청장치가 걱정스러웠다. 편한 말이라도 주고받으려니 도청장치가 신경 쓰여 자꾸 입술이 다물어졌다. 자유로운 세상에 익숙해져 자본주의 생각과 언어가 자기도 모르는 새 섞여 나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 씨가 아내에게 가장 묻고 싶은 것은 고난의 행군을 어떻게 보냈냐는 것이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는 고향의 소식들을 들으며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뭘 먹고 살아갈까? 추운데 불은 때고 있을까? 옷가지들은 뭘 걸치고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지치는 시간을 보냈다. 그는 죽음의 순간을 딛고 끝까지 살아남은 아내와 아들에게 다함없는 사랑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더욱이 그 어려운 속에서 시부모님들을 끝까지 모셔준 아내에게 못난 남편으로서 사과도 충심으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이 숨기고 싶어 하는 말들이었다. 아내가 죽지 못해 살아왔다고 고백한다면 사회에 대한 비난으로 반동으로 몰릴 수 있고 듣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었다.

뭔가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밤이었다. 고요한 방에 시계소리만 째깍째깍 들려왔다. 세 사람은 서로 바라만 보고 쓰다듬기만 하는 시간을 보냈다. 아내도, 아들도 검은 안경의 지시사항을 전달받은 터라 눈치만 보며 말을 못했다. 답답하기 그지없는 시간들이 흘렀다. 그런 가운데 시간은 사정없이 흘러 새벽이 되어오기 시작했다. 이 씨는 그제야 캐나다를 떠나올 때 세웠던 계획들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아내의 옷들을 고급 옷 업체에 주문해서 가져왔다. 그는 그것을 꺼내들었다. 그는 옷들을 아내에게 입히기 전에 우선 브래지어의 볼록하게 올라온 곳을 가리키며 그 안에 달러를 넣었음을 손으로 만져 알려주었다. 팬티의 여러 부분에도 달러를 깔아 놓았다. 여러 속옷에 골고루 나누어 숨겼다.

그는 북한의 솜씨를 미리 간파하고 있었다. 북한 정부는 이산가족상봉 때에도 한국의 가족들이 북한 친척들에게 준 달러를 국가지원이라는 명목 하에 일일이 걷어갔다. 이 씨는 자기가 돌아간 후 분명히 보위부나 정부 관계자들이 달라붙어 아들과 아내의 주머니를 또 걷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은 이미 세계 면전에서 체면 없는 국가로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그는 위장으로 겉옷들에도 어느 정도의 달러를 넣어주었다. 보위부나 정부 관계자들이 걷어갈 적당량의 돈이었다. 세 사람은 밤새 잠을 못자서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너무 짧은 하룻밤이었다. 평양의 3일 밤은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고 말았다.

그렇게 가족은 다시 헤어졌다. 북한 정부는 이 씨가 나라에 돈을 지원한 대가로 아들을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해줬다. 캐나다로 돌아간 이 씨는 2년 후에 다시 북한으로 들어왔다. 자신이 돈을 투자한 의료기구공장이 다 설립되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북한 정부는 이 씨의 아내인 김 여인을 의료기구공장 명예지배인으로 임명했고 평양으로 소환해 끌어올렸다. 여인은 평양으로 올라갈 때 시부모님들의 묘소를 옮길 수가 없어 친한 친구에게 자기 집을 그대로 물려주고 묘소를 돌보게 했다. 사람들은 친구가 횡재를 했다고 부러워했다.

* 편집자주 :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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