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도 쯤이라고 기억된다. 평양에 국가의 계획안에 반영된 것도 아닌 의료기구공장이 불쑥 완공되었다. 공장을 짓는 초기에는 주민들도 어떤 경위를 거쳐 공장이 세워지게 된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공장의 명예지배인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체구가 자그마하고 여인임이 알려지면서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 여인이 내가 아는 김 씨 성을 가진 여인이었다. 아직도 그 여인이 명예지배인으로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내 짐작에는 김책공업종합대학을 졸업한 그의 아들이 지배인직을 물려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그렇게 각본이 짜여 있었다.

복잡한 운명의 여인이 갑작스럽게 출세를 한 터라 동네에도 한동안 많은 여운을 남겼다. 그 여인이 짐을 챙겨 가지고 국가적인 조동(이동)으로 평양으로 이사를 떠날 때 전 시내가 떠들썩했다. 남편과는 영원한 이별이지만 북한 사람으로서는 살아 생전에 가질 수 없는 부를 가진 여인이자 뚫을 수 없는 북한 사회의 틀과 정치의 모순을 깨어버린 대상으로 남았다. 결말이 좋게 끝나서 사건이라고 말하기가 부족하지만 그래도 역시 사건이다.

운명을 바꾼 보위부의 호출 


새벽에 길 건너 황철나무 가지 위에서 까치 한마리가 유난히 울어대더니 인민반장이 찾아왔다. “담당보위원이 찾아. 빨리 나가봐. 지금 사무실에서 기다려.” 동년배인 인민반장은 김 여인을 흘끗 쳐다보고 씹어뱉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종종걸음을 치고 사라졌다. 남편이 있을 때는 모두 살갑기만 하던 동네여인들이였다.

“네.” 김 여인은 단 마디로 대답을 하고 인민반장을 한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금방까지 반짝거리던 눈에서 정기가 사라지고 갑자기 힘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왜 또 찾는담? 죽어서 귀신이 되어 버린 사람에게 아직도 물을 일이 남았는가? 죽었으면 그만이지… 이제는 좀 잊을 법도 한데 또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았다. 온 몸이 욱신거리며 아파났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몇 년간 찍소리 없던 보위부였다.

벌목 작업 중인 모습.

러시아로 벌목을 떠난 남편이 벌목노동자들이 거주하는 구역 내를 벗어나 탈주했다는 소식이 시내에 퍼진 것은 10여 년 전이었다. 그때는 탈북이란 말을 모를 정도로 탈북 하는 사람들이 없을 때였고 탈북자가 아니라 민족반역자라는 역한 말로 불리웠다. 그만큼 국경을 벗어난 사람들에 대해 나라가 배신감을 강하게 느꼈고 그 가족은 죄인으로 평생 머리를 못 들고 살아야 할 때였다.

그 해, 여인은 자주 보위부로 불려갔다. ‘남편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는가’, ‘소식을 가지고 온 사람이 있으면 보위부에 알려라’ 그렇게 거의 1년을 다 몰아대더니 어느 날 뚝 그쳤다. 국가보위부(성)가 남편에 대한 추적에 나섰고 끝내 잡혀서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외국으로 달아난 자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잡아 죽이는 훈련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동네 여인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남편의 죽음이 거의 확실하다고 말했다. 여인은 울음도 터뜨리지 못했다. 반역자 남편을 둔 죄는 죽음을 슬퍼할 권리조차 없었다. 울면 반역자의 동조자가 되니 입술을 깨물고 참아야했다. 남편이 죽은 것이 사실인지 그때부터 보위부에서 더는 여인을 찾지 않았다.

여인은 남편이 있을 때부터 시부모님들과 함께 살았다. 아들이 도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부모님들은 정정하던 모습이 며칠 사이에 사라졌다. 시부모님들에게는 아들이 도주자든, 반역자든 자식이었고, 제발 어디서든 목숨이 붙어있길 바랐다. 아들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시부모님들은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멍하니 천장만 쳐다보다가 돌아가셨다. 여인은 젊은 나이에 생과부가 되고 혼자 몸으로 아들을 키우며 참 많은 일을 겪었다.

세월은 유수 같았다. 남편이 떠날 때 소학교에 입학했던 아들은 중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었다. 여인은 아들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남편이 중산층의 성분 때문에 자기의 앞날을 한탄했다면 반역자 아버지를 둔 아들의 앞날은 더 궁지에 빠져있었다. 졸업말기가 되자 아들은 앞날에 대한 걱정 때문에 말수가 적어졌고 한숨만 내쉬었다. 아들은 무던히도 군대에 나가고 싶어 했다.

오늘 아침도 “엄마, 옆집 영수는 벌써 군사동원부에서 신체검사 중이고 앞집 준이는 사범대학에 추천받았어…” 하고 말끝을 흐렸다. 그렇다. 반역자의 아들은 군대도 보내주지 않았고 대학에도 추천해주지 않았다. 평생 노동판에서 등이 휘도록 일해야 할 아들의 앞날이 억울했다. 여인은 헝클어진 머리를 대충 쓸어 올리고 집을 나섰다. 보위원의 사무실에 들어설 때까지 ‘도대체 왜 또 나를 찾는가’는 반감이 가슴 안에 울체되어 있었다.

집안성분에 좌절한 남편의 선택 


늘 찌뿌둥한 얼굴로 대하던 보위원이 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여인에게 의자를 권하며 물었다. “혹시 남편에게서 연락 안 왔소? 왔을 텐데…” 보위원은 묘한 웃음을 떠올리며 물었다. 여인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얼결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이내 내리 쓸며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참자, 그러잖아도 요즘 아들의 장래문제 때문에 걱정인데 더 화를 입지 말고 참자.’

여인은 다시 표정을 고치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온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죽은 사람한테서 무슨 연락입니까?“ 보위원은 여인의 얼굴표정을 간간히 주시하며 다시 물었다. “진짜 모른단 말이요?” “네.”여인의 얼굴에서 진짜 모른다는 흔적을 찾아냈는지 그제야 보위원은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말을 시작했다. “당신 남편이 죽었다는 건 그냥 소문일 뿐이요. 이제부터 내 말을 잘 듣소. 당신 남편이 살아 있소. 오늘 아침에 국가보위부에서 연락이 왔소.“

“네?” 여인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의자를 뒤로 젖히고 벌떡 일어섰다. 너무 놀라서 뒤로 벌렁 나자빠질 지경이었다. 보위원은 상관이 없다는 듯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 “빨리 여행증을 신청하오. 곧 평양으로 올라가야 하오.” 남편 없는 수년간 온갖 고생을 다하며 살아 온 여인에게 쉽게 설명이 안 되는 말들이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여인을 위해 보위원이 차근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러시아를 탈주해 떠나간 남편은 캐나다에 정착했고 10여 년 만에 조국에 연락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자기는 여전히 고향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사랑하며 나라를 뛰쳐나온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외국에서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았으며 그 돈으로 나라에 헌신할 것과 함께 두고 온 가족을 만나보고 싶다고 청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남편은 아들과 아내를 만나게 해주는 대가로 정부에 의료기구공장을 선물했다고 한다. 지금 한창 평양에 터를 잡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당에서는 남편의 죄를 용서했고 애국자로 다시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여인은 가슴이 후두두 뛰었다. ‘남편이 살아있구나, 무사했어’ 하는 생각과 함께 이때까지 고통 속에서 지탱하던 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여인은 한동안 오열에 떨었다.

여인의 남편 이 씨는 대단히 똑똑한 사람이었다. 학교 전 기간 영재라고 소문이 날 정도로 공부를 잘해 총명한 학생으로 인정받았다. 졸업 당시 고등중학교 사로청위원장으로 지낸 경력과 10년 만기 군사복무도 탈 없이 잘 하고 돌아와서 주변에서는 똑똑함을 타고났다고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는 제대 후에 선박공장 노동자로 배치받았고 공장대학을 졸업했다. 총명한 머리와 인격,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그는 이쯤하면 한 개 중소기업의 기사장자리 쯤은 차례지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숨기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사람이 아무리 똑똑하고 잘 나면 뭐하랴. 그는 집안 성분이 시원하지 않았다. 중산층으로 살아온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경력은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항상 의기가 차올랐다. “우리 조상들은 왜 일본 놈에게 돌멩이 한 개라도 던지지 못했을까”라고 탓하면서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이 씨는 조상을 잘 만나 간부로 등용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항상 서글프기만 했다. ‘나는 성분 하나만 빼면 그들보다 모든 조건이 더 충분하다. 그런데 왜 잘 될 수 없는가’ 내가 노력하면 돈도 있고 간부도 될 수 있는 세상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봄은 정녕 어디에 있는가’하고 한탄했다.

벌목 된 나무.

그가 좌절에 빠져있을 때 러시아 벌목만큼은 성분에 관계없이 뽑는다는 희소식이 전해졌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외국에 나가는 것이 간부로 승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해가 서쪽에서 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불시에 힘이 솟구쳤다. 외국에 나가 돈이라도 실컷 벌어서 잘 살아보자. 그는 새로운 욕망에 사로잡혔다. 러시아 벌목은 성분을 따지지 않고 건장한 사람들이면 다 뽑았다. 다만 장가를 가지 않았거나 장가를 갔어도 자식이 없는 사람은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씨는 부모도 있고, 아내와 아들도 있는 3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이였으니 러시아 벌목에 적합한 대상이었다. 그때부터 이 씨는 러시아 벌목을 꿈꾸었다. 아는 사람들을 내세워 가지고 뇌물을 고여 결국 러시아 벌목에 합격되었다. 그때가 1990년대 초였다. 이 씨의 아들이 3살 되던 때였다.

러시아 벌목은 떠나기 전에 이미 직함이 결정된다. 힘 있는 사람들은 간부로, 아니면 좀 헐한 직업이 차례지는데, 힘이 없고 성분도 좋지 않은 이 씨는 벌목공 직함을 가지고 출발했다. 아무렇든 좋았다. 운이 영 없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처참한 러시아 벌목 노동 현장


러시아에서의 노동이 힘들다는 것은 미리 알고 떠나왔지만 생각보다 더 처참했다. 한겨울에 울창한 밀림 안에서 나무를 자빠뜨리고 끌어내려야 하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해야 했다. 나무 한 대를 베어 끌어내리면 표 쪽지 1개가 차례졌다. 자칫 실수해서 자빠지는 나무 밑에 깔려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가 일을 시작해서 한 달 만에 3구의 시체가 실려 나갔다. 죽은 사람들은 시체를 철통에 넣어 냉동 보관했다가 고향으로 보내졌다.

그제야 성분이 나쁜 사람들은 죽어도 아깝지 않은 목숨으로 이 춥고 무서운 국가 외화벌이에 몰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루 세 끼 주는 음식도 염장 무에 밥이 전부였다. 어떤 날에는 매일 똑같은 음식에 역기가 올라와서 참을 수 없이 괴로운 날도 있었다. 힘든 일을 하고 들어오면 온 몸이 쑤셔서 술 한 잔을 마셔야 아픈 몸을 달랠 수 있었다. 고향에서 일할 때는 “로동보호”용으로 술과 간식도 나왔지만 여기서는 그런 대책도 없었다. 술도 자체로 사서 마셔야 했다. 음주금지령이 내려진 러시아에서는 술값이 대단히 비쌌다. 월급을 타서 술잔을 기울이면 집에 돌아갈 때 빈 몸으로 가야 했다. 괜히 왔다는 후회도 많았지만 그래도 어떻게 하나 3년을 잘 버텨서 좋지 않은 성분밖에 물려줄 것이 없는 자식에게 돈으로라도 그 치욕을 감싸주려는 것이 그의 인생전략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든 일에 내몰리면서도 국가는 월급을 쥐꼬리만큼 주었다. 노동자들은 앞에서는 말을 못하고 가까운 사람들끼리 뒤에서 불만을 터뜨렸다. 그 후 1년이 지나 러시아 말도 조금씩 익숙해졌다. 러시아의 모습을 보면서 깨달은 것은 우리 북한 사람들은 우리 안에 갇힌 새와 같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당시 벌목공들은 러시아에서 3년을 일해야 겨우 1000달러 내지 1500달러를 모을 수 있었다. 그것도 귀국할 때는 돈을 국가의 외환은행에 맡기는 규정이 있어 물건만 가지고 갈 수 있었다.

국가의 외환은행에 맡긴 돈은 국가가 또 거기서 프로수를 환산해서 30~40%를 떼고 주었다. 그것도 찾기 어려웠다. 국가는 벌목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돈을 찾으러 오면 은행에 돈이 없다며 싸구려 물건 같은 것으로 대신 받아가라고 요구했고 은행 직원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40% 뗀 돈에서 또 반타작을 하자고 요구해 왔다. 모두 은행에 돈이 올 날만을 눈빠지게 기다렸지만 규정대로 찾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은 목숨을 걸고 번 돈을 이렇게 떼우고 저렇게 떼웠다.

(2부에 계속)

* 편집자주 : 북한 보안서(경찰서) 등지에는 ‘필사원’이 있다. 사건을 기록하면서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현지에서 발생한 사건사고를 당국이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데일리NK는 필사원 업무를 담당했던 한 탈북민의 증언을 통해 북한 체제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한다.

다만 본지는 일반적 기사체를 고집하기 보다는 소설적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이 사건의 흐름 및 북한 주민들의 심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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