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스 외교 실권 장악 확인

베이징(北京)에서 북핵 공동성명 협상이 타결이나 붕괴냐의 기로에 처했던 18일 저녁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이 리자오싱(李肇星) 중국 외교부장을 비롯한 반기문(潘基文) 외교장관 등 6자회담 각국 외교장관과 분주한 전화외교를 벌인 내용은 뭘까.

공동성명의 마지막 쟁점이었던 북한의 경수로 이용권 주장을 공동성명에 명기하되, ‘적절한 시점’에 이 문제를 논의한다는 대목에서 미국이 생각하는 ‘적절한 시점’의 분명한 뜻을 다른 각국 외교장관에게 설명하고 이들로부터 동의를 얻는 것이었다고 국무부 고위관계자가 19일(현지시간) 공개했다.

공동성명의 성패를 가르는 마지막 쟁점 해결을 위해, 미국은 ‘경수로’라는 말을 명기하는 양보를 하는 대신, 막후에선 ‘적절한 시점’에 대한 자국의 규정을 각국에 주지시키고 동의를 받아낸 것이다.

부시 행정부내 대북 강경파는 북한에 대해 “이론적으로”도 경수로를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비하면, 라이스 장관의 막판 협상 개입을 통한 미국의 입장 변화는 라이스 장관 주변에서 말하는 ‘실용주의적 원칙 외교’를 다시 한번 보여주는 동시에, 조지 부시 대통령의 신임을 바탕으로 딕 체니 부통령이나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에 대해 대외정책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관측을 확인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국무부 고위관계자는 “라이스 장관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각 회담 당사국으로부터 ‘적절한 시점’이란 북한이 핵무기확산금지조약(NPT)에 복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를 이행한 후를 뜻한다는 확언을 받아냈다”고 설명했다.

그는 “공동성명의 ‘적절한 시점’이라는 말이 언제인지, 아무도 그 뜻에 혼란을 일으키지 않도록 확실히 하는 게 우리로선 중요했다”고 라이스 장관이 막판에 직접 협상에 나선 배경을 밝혔다.

그는 4차 초안까지 들어있지 않던 ‘경수로’라는 말을 포함시킨 배경에 대해 “북한이 ‘경수로’의 거론을 원했기 때문에 어떻게든 언급하지 않고는 합의를 이룰 수 없었다”고 말해 미국이 북한에 양보했음을 인정했다.

라이스 장관도 이날 뉴욕본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전화외교 내용이라고는 밝히지 않았지만, 장래 북한의 경수로 문제 논의의 “순서는 (북한 핵의) 해체, NPT, IAEA 안전조치, 그리고 나서 논의할 수 있다는 것임을 많은 나라들이 매우 분명히 했다”고 말해 국무부 고위관계자의 설명을 뒷받침했다.

한편 북한 경수로 문제에 대한 미 행정부의 입장은 지난 7월말 제4차 6자회담이 휴회에 들어간 후 귀국한 미국측 수석대표 크리스토퍼 힐 동아태 차관보가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권 주장을 “이론적”인 것이라면서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은 입장에서 몇차례 반전을 거듭했다.

힐 차관보의 언급은 미국이 어느 정도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해석됐으나, 곧바로 부시 대통령이 한국의 대북 송전 제안을 거론하면서 북한에 대해선 평화적 핵이용도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한 이후 부시 행정부 관계자들은 모두 ‘불용’에 한목소리를 냈다.

이에 따라, 많은 6자회담 관측통들은 4차 6자회담이 속개되더라도 경수로 문제에 대한 북미의 완강한 입장 때문에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그러나 6자회담 속개 직전 부시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이라크 대통령과 회담한 후 기자들과 만나 이란 핵문제를 거론하는 가운데 “어느 정부든 평화적 핵이용을 원할 권리는 있다”고 말해 다시 분위기가 반전됐다.

당시 백악관측은 부시 대통령의 발언으로 외교가가 술렁이자, 북한에 경수로를 인정하겠다는 메시지를 보내려는 의도가 아니었으며, 그런 권리에도 불구하고 안된다는 뜻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결국 부시 대통령의 그같은 언급은 이번에 북핵 공동성명에서 ‘경수로’라는 표현이 명시되는 돌파구가 된 셈이다. 이 과정에서 라이스 장관의 조언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은 또한 북한에 대해 “검증때까지 믿지 못하겠다”는 그동안의 부시 행정부 대북 강경파 입장과 달리 “믿되 검증하겠다”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의 대소 군축협상 원칙으로 돌아간 면도 엿보인다.

라이스 장관은 당시 소련 전문가로서 대소 군축협상에 관여했었다./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