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선의 일기④]“뜻밖의 이별”

▲ 아버지와의 영원한 이별

그 후 오래간만에 병문안을 간 우리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놀라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몹시 말라 마치 뼈와 가죽밖에 없는 「귀신」같이 되어 있었습니다. 몸을 만져보니 차가워서 소스라쳐질 정도였습니다.

“어떻게․․․”

나와 오빠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는 발의 동상이 악화되어 발이 점점 썩어가는 무서운 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내버려두면 몸 전체가 썩어 아버지는 죽어버린다. 그래서 나빠진 한쪽 다리를 자를 수밖에 없단다․․․”

병문안을 가기 전에 아버지의 친구인 군인 한 분이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나는 아버지의 발이 잘려 없어진다는 말에 크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아버지의 생명이 더 중요하고, 발을 자른 후에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자른 다리는 어떻게 되어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아버지가 덮은 이불을 들쳐보려고 했더니, 아버지는 가만히 이불을 누르고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나는 또 울고 말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불 안에서 손을 꺼내어 가만히 우리들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여기 찾아오는 것은 그만두어라. 아버지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

오빠는 놀라서 말도 못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안돼요,그런말씀 하지마세요~”

나는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습니다. 어떻게든 아버지 기분을 북돋아 희망을 잃지 않게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필사적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이고 계셨습니다. 군복을 입은 사람들의 우리들의 어깨를 잡고 병실 밖으로 내보내려고 했습니다.

“안돼요, 아버지를 이대로 놔두고 갈 순 없어요․․․”

그렇지만 우리 둘은 아버지의 병을 고칠 수 없었습니다. 오빠와 나는 울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 아무것도 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의 만남이 우리 남매와 아버지의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아버지와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입원한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아직 3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지금도 마지막에 만나 뵈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엄하게 우리를 돌보시면서 우리들이 슬픈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하려고 애쓰셨습니다.

‘이런 우리들을 놔두고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돌아가셨을까?’

그때의 아버지 기분을 생각하면 슬퍼서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우리 남매는 숙부님 집에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우리를 데리러 와줄거라는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친척의 집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내 집에서 사는 것과는 다릅니다. 숙부님과 숙모님의 눈치를 살펴야 했기에 어린 우리들에게는 힘든 나날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몇 개월 되지 않을 때부터 먹을 것과 일용품의 배급이 중단되는 날이 잦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에 먹을것이 줄어들어 점점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을 어린애들인 우리들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숙부님 집의 생활도 점차 힘들어졌습니다. 언제든지 한 그릇은 먹을 수 있던 강냉이(옥수수)밥도 이제는 반 그릇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지나자 양은 더 줄어들어 한 줌 정도밖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그 한줌의 밥마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된 후로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모님은 꼭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희선아~ 들에 가서 풀 좀 뜯어와.”

나는 큰 바구니를 가지고 들에 나갔습니다. 양식을 대신할 풀을 뜯어야 했습니다. 냉이, 미나리, 쑥․․․

처음에는 보통 먹을 수 있는 풀만 골라 뜯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뿐 아니라 이웃에 살던 사람들도 이런 풀들을 뜯으러 오기 때문에 식용으로 먹을 수 있는 풀은 잠깐 사이에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먹을것이 없어지긴 어느 집이고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지막에는 어떤 풀이든 닥치는대로 뜯게 되었습니다. 뜯어온 풀은 강냉이죽에 섞어서 먹었습니다. 강냉이밥을 먹지 못하게 되면서부터는 강냉이를 죽으로 끓여서 먹었습니다. 그러다 그 강냉이 마저 바닥나고 말았기 때문에 죽에 풀을 섞었는지 풀에 죽을 섞었는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훗날 생각해보면 그것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풀죽 조차 먹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으니까요.

The Daily NK 편집부